간추린 일본사
역사의 라이벌
2005/03/26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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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本 史
Ⅰ. 原始·古代
1. 古代國家의 起源
(1) 文化의 시작
일 본열도는 남북 3000km로 온대기후지역에 해당하며 아한대 침엽수림부터 아열대림까지 분포하고 있다. 홍적세의 일본열도는 아시아대륙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10만년전경의 화석인골이 출토되고, 타제석기가 나오고 있어 인류가 계속 살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열도가 현재와 같은 자연환경이 된 것은 1만년전의 충적세의 시대부터다.
이 때부터 일본열도에 거주한 인류는 일본전국에 패총과 수혈주거를 남기고 있는데, 여기에서는 활과 화살·마제석기·토기등이 발견되었다. 새끼줄무늬(繩文)가 새겨져 있어 죠몬(繩文)토기라 불리우며, 따라서 일본의 신석기시대는 죠몬(繩文)시대라 불리운다. 그러나 본격적인 농경이 시작된 것은 아니어서, 2-3호(1호당 10명이내)가 하나의 집락을 이루어 수렵·어로·채집중심의 생활을 하고 있었다.
매장방법은 굴장(屈葬)으로 토우(土偶)를 부장품으로 넣었으며, 인골에는 발치(拔齒)의 흔적이 보인다.
(2) 농경의 시작
일 본열도에서 본격적으로 농경이 시작된 것은, 기원전 3세기로, 수도(水稻)농업이 북부 큐슈(九州)부터 시작되어 기원후 1세기경에는 동북지방까지 보급되었다. 기원전 3세기 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이 시기에 청동기·철기등의 금속기와 야요이(彌生)토기가 일본열도에서 사용되게 되었다. 이를 야요이토기가 가장 먼저 발견된 토쿄(東京) 야요이쵸(彌生町)의 지명을 본따 야요이(彌生)문화라 한다.
이 새로운 문화는 외부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직접적으로는 한국남부인들의 이동에 의해 발생한 것이다. 이것은 야요이시대인의 신장이 한반도남부인과 같이 커진 점, 지석묘와 마제석촉·청동제 무기등에 한반도남부와 같은 것이 나오는 점에서 확인된다.
이 시대의 묘제로는 지석묘·상식석관등과 부장(副葬)용이었던 옹관묘등이 있었고 방형주구묘도 보인다. 기원후 1세기이후의 야요이시대후기에 낫·도끼·괭이등 철제농기구가 보급되어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빈부의 차가 생겨나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높은 지대에 해자를 둘러친 집락지가 발견되는데, 이는 전쟁이 발생하였음을 말해준다.
관개사업과 공동체 제사 및 방위를 지도하는 수장(首長)이 출현하면서 소국(小國)이 형성되었음은 {한서}·{후한서}·{삼국지} 등의 중국사서를 통해 추측할 수 있다.
(3) 야마토(大和)정권과 고분문화
3세기말부터 4세기초에 걸쳐 일본열도에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고분이 발생한다. 이는 야마토정권의 성립을 말해주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야 마토정권이란 야마토(현재의 나라지방)에 있었던 유력 호족들의 연합정권으로, 유력 호족들이 각각의 직책을 세습하면서 오오미(大臣)나 오오무라지(大連)로서 대왕과 함께 중요한 결정을 내리거나, 토모노 미야츠코(伴造)로서 실무를 맡아 보았다. 야마토정권은 지방의 유력 호족들을 쿠니노미야츠코(國造)나 아가타누시(縣主)로 임명하는 형식으로, 4세기후반부터 5세기경에 걸쳐 서부일본을 통일하였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광개토태왕비문에 보이는 [왜(倭)]와 {宋書}에 보이는 [왜왕(倭王)]은, 야마토정권과 관련이 있다.
일본고대국가의 발전에는 외부로부터의 들어온 사람에 의한 문화의 전래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현존 칠지도(七支刀)의 명문을 통해 4세기후반에 백제가 왜국과 교섭을 개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니혼쇼키(日本書紀)}에 의하면 한자·유교·불교, 의·역(易)·역(曆)학 등이 백제로 부터 전래되었다고 한다. 또한 야마토조정에서는 철기생산·양잠·토기제조·토목분야에 한국남부출신의 기술자집단이 활약하였다.
5세기이후 철제농기구사용으로 생산력이 증가하면서 일본의 고분문화는 변질하게 된다.
즉 군집분(群集墳)이 생겨나고 추장(追葬)을 할 수 있는 횡혈식석실이 백제로부터 전래되고, 회색의 경질토기인 스에키(須惠器)가 만들어진다. 지방마다 종교적 장소인 사(社)가 만들졌으며, 농사의 풍작을 위해 기년제(祈年祭)·신상제(新嘗祭)등의 종교의례가 만들어졌다.
2. 율령국가와 대륙문화의 섭취
(1) 스이코(推古)조와 아스카(飛鳥)문화
6 세기에는 야마토정권의 유력호족들 사이에 항쟁이 일어나, 주도권은 오오토모(大伴)씨에서 모노노베(物部)씨, 다시 소가(蘇我)씨로 옮겨가게 되었다. 6세기말부터 7세기초에 소가씨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를 여제 스이코(推古) 천황의 섭정으로 삼아, 견수사(遣隋使)를 파견하고 관위12계제·역사 편찬등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만들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백제의 기술원조로 아스카(飛鳥)지방에 사원건축이 유행하면서 불교문화가 꽃피게 되었다. 소가씨의 아스카데라(飛鳥寺)와 쇼토쿠태자의 호류지(法隆寺)등이 건립되고,호류지(法隆寺)의 금동석가삼존상과 목조백제관음상, 코류지(廣隆寺)의 반가사유상등이 만들어졌고, 삼경의소(三經義疏)와 같은 불경주석서도 만들어졌다. 또한 고구려의 담징(曇徵)에 의해 종이·먹·그림도구의 제조법이 전해졌으며, 백제의 관륵(觀勒)은 역(曆)법을 전해 역사서와 기록의 발달을 도왔다. 이와 같이 6세기말부터 7세기전반의 백제의 영향이 강한, 불교중심의 문화를 아스카(飛鳥)문화라 한다.
(2) 율령국가의 형성과 하쿠호(白鳳)문화
640 년대에 한반도에서는 권력집중이 일어났으며, 일본에서는 소가씨가 독재권을 확립하고 있었다. 야마토조정에 당에서 귀국한 유학생들에 의해 수·당의 율령국가체제가 알려지면서, 소아씨독재를 타도하고 천황중심의 중앙집권국가를 세우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645 년, 코교쿠(皇極)천황의 장자 나카노오오에(中大兄)황자는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鎌足)와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소가(蘇我)씨정권을 타도하고, 황태자로서 국정개혁을추진하였다. 신정부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체제를 목표로 한 개혁을 추진해 나갔는데, 이를 타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 부른다.
660년 한반도에서는 당과 협력한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다. 백제의 호족들은 당과 신라에 저항하면서, 일본에 도움을 청하였다. 일본은 이에 응해 원군을 보냈으나, 663년 백촌강(白村江)싸움에서 대패한다. 신라는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676년에는 당의 세력을 몰아내어 한반도의 통일을 완성하였다.
백촌 강의 패전후 나카노오오에황자는 요지에 조선식 산성을 축성하는 등 국방을 강화하고, 668년에는 천황(天智)으로 즉위하여, 영(近江令)과 호적을 만들어 율령국가 체제를 마련하였다. 그후, 임신(壬申)의 난을 통해 즉위한 텐무(天武)천황은, 천황중심의 새로운 신분질서를 만들고, 영(飛鳥淨御原令)을 제정하고 국사편찬을 개시하였다. 701년 몸무(文武) 천황때에 일본실정에 맞게 영을 수정한 타이호(大寶)율령이 완성되어 율령정치의 틀이 정비된다.
일본 율령국가는 천황을 정점으로 하여 관료제와 중앙집권적인 행정기구를 가진 천황제국가였다. 중앙에는 천황 밑에 2관(太政官· 神祇官)과 8성을 두었다. 지방은 전국을 기내(畿內)와 7도의 행정구로 나누고 그 밑에 코쿠(國)·군(郡)·리(里)를 두고 코쿠시(國司)·군시(郡司)등을 임명하였다. 관리는 관위에 따라 관직에 임명되었으며, 관위 5위이상은 귀족으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특권이 있었다.
율령국가는 양천제적 신분사회로, 양민의 대부분은 농민으로, 6년마다 6세이상의 남녀 모두가 구분전(口分田)을 지급받는 대신 조세를 부담하였다. 특히 17세에서 65세까지의 남자농민은 조세이외에도 요역에 종사하거나, 병사로 징발되었다.
7세기후반-8세기 초 율령국가 형성기에, 백제·고구려의 멸망후 일본에 도래한 유민들의 영향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발달하였다. 텐무천황이후 국가불교의 발달과 함께 불교예술이 발달하여, 코후쿠지(興福寺)불두나 야쿠시지(藥師寺)금당약사여래상·호류지금당벽화등이 만들어졌다. 이외에도 고구려의 영향을 보여주는 타카마츠츠카(高松塚)고분벽화등이 만들어졌으며, 한시의 영향을 받아 5음7음을 기본으로 하는 와카(和歌)의 정형이 만들어진다. 이 시기의 문화를 하쿠호(白鳳)문화라고 한다.
(3) 나라시대의 문화
710 년 장안성을 모방한 헤이죠쿄(平城京)가 나라(奈良)에 완성되어 천도한 후, 784년 쿄토(京都)의 헤이안쿄(平安京)로 옮길 때까지 80여년간을 나라시대라고 한다. 이 시기에 율령정부는 일본열도의 동북과 남서로 영역을 확대하였으며, 쓰시마(對馬)·무츠(陸奧)에서 황금광산이, 무사시(武藏)에서 동광산이 개발되었다.
양잠·직물기술자를 지방에 파견하여 기술보급에 힘쓴 결과, 지방의 특산품으로서 조정에 헌상되었다. 당을 모방하여 화폐를 만들어 유통을 장려하였으나, 도읍과 기내(畿內)를 제외한 지역에서는 벼나 포가 계속 사용되었다.
8세기에는 15년 내지 20년에 한번씩 견당사가 파견되어, 많은 유학생과 유학승이 당의 문물수입에 큰 공헌을 하였다.
통 일신라와는 서로 경계하면서도 빈번히 교류하여, 신라와 관계가 재개된 668년부터 양국의 공식관계가 끝난 779년까지 신라는 46회, 일본은 26회 사신을 파견하였다. 8세기 후반이후 양국관계가 무역 중심으로 변하여, 9세기에는 사무역이 중심이 된다. 727년 발해의 사신파견으로 시작된 양국관계도 활발하여 8세기에 발해에서 11회, 일본에서 9회 사신이 파견되었다.
율령정부는 722년 100만정보개간계획을 세우고, 723년에는 개간지의 3대사유법을, 743년에는 영구사유법을 발표하였다. 이로서 토지 사유가 가능해져, 장원(莊園)발생의 단서가 마련되었다.
8 세기중반이후 잦은 정쟁으로 여러 귀족들이 몰락하였으나, 타이타개신의 공신 카마타리(鎌足)를 시조로 하는 후지와라(藤原)씨는 후히토(不比等)의 두 딸이 몸무천황과 쇼무(聖武)천황의 비가 된 이후, 계속 천황가의 인척으로서 황족에 준하는 지위를 확립하였다.
황족과 귀족의 부유한 생활을 바탕으로 나라중심의 귀족문화가 꽃피었는데, 이 문화를 쇼무(聖武)천황때의 연호를 따서 텐표(天平)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진호국가불교가 발달하여 각 지방마다 코쿠분지(國分寺)를 설립하고, 나라의 토다이지(東大寺)에는 대불을 조영하였다. 나라의 주요 사찰(南都六宗)에서는 불교의 여러 종파의 강의가 있었다.
유교중심의 귀족교육기관(大學)과, 지방호족 교육기관(國學)이 있었고, 역사서({古事記}{日本書紀})·시가집({万葉集})·지지(地誌)({風土記})등의 편찬이 이루어졌으며, 토다이지법화당과 토쇼다이지(唐招提寺)금당과 같은 당풍(唐風)건축과 소상(塑像)·건칠상(乾漆像)조각이 유행하였다.
(4) 헤이안(平安)전기의 그 문화
8 세기 후반부터 중세부담을 피하기 위한 농민의 유랑이 증가하였다. 칸무(桓武)천황은 794년에 헤이안쿄로 천도하고, 율령제 재건을 위해 12년마다 반전(班田)을 시행하고, 잡요를 경감하였다. 또한 농민병사를 폐지하는 대신 호족 자제들로 군대를 편성하고, 동북지방을 점령하였다.
헤이안(平安)천도부터 9세기말까지, 헤이안 전기에는 대학 기숙학교들과, 서민교육기관이 만들어졌으며, 한시문집과 관찬역사서가 계속 편찬되었다. 불교계에도 새로운 풍조가 일어 사이쵸(最澄)가 천태종(天台宗)을, 쿠카이(空海)가 진언종(眞言宗)을 열었으며, 신불습합(神佛習合)이 진행되어 신사의 경내에 신궁사(神宮寺)가 만들어졌다. 천태종과 진언종의 영향으로 산악가람이 늘어났으며, 나무하나로 만드는 불상조각이 유행하였고, 부처의 세계를 특이한 구도로 그린 만다라(曼茶羅)가 유행하였다.
3. 귀족정치와 문화의 국풍화
(1) 셋칸(攝關)정치
천황가의 인척 후지와라(藤原)씨는 후히토의 네 아들별로 일가를 이루어, 4가가 있었다.
858년이후 북가(北家)가 미성년 천황을 보좌하는 셋쇼(攝政)와 성년 천황을 보좌하는 칸빠쿠(關白)를 독점하였는데, 이와 같이 셋쇼와 칸빠쿠에 의한 정치를 셋칸정치라 한다.
이 정치는 11세기초에 극성기를 맞이하나 11세기말 인세이(院政)가 시작되면서 약화되었다.
이 시대에는 지방에서 반전수수법이 시행되지 못 하여, 개간지와 구분전을 사유화한 지방
호 족과 유력농민은 후지와라씨나 유력한 사원·신사의 보호를 받았다. 지방정치가 문란해지자 호족들은 자체방위를 위해 일족을 조직하여 무사단을 만든다. 이 무사단들은 다시 유력자(棟梁)를 중심으로 결합하게 되는데, 황족의 후예인 미나모토(源)씨와 타이라(平)씨가 가장 유력하였다.
(2) 國風文化
894년에 견당사가 폐지된 후, 일본은 송·고려와 공적인 국제관계를 갖지 않았다. 이 시기에 일본적인 문화가 만들어졌는데 이 헤이안 중기 문화를 코쿠후(國風)문화라 한다.
가나(假名)의 발달로 일본국문학이 발달하여, 와카(和歌)가 공식장소에서 유행하였으며, 일기나 수필({枕草子}), 이야기({源氏物語})들이 가나로 씌어졌다.
불 교의 천태종과 진언종이 귀족층의 지지를 받았으며, 대일여래(大日如來)가 일본에 와서 천황가의 조상신(天照大神)이 되었다는 본지수적설(本地垂迹說)이 생겨났다. 그러나 한편 말법사상이 유행하면서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바라는 정토교(淨土敎)도 귀족과 서민층에 널리 퍼지게 되었다.
건축에서는 신덴즈쿠리(寢殿造)라는 일본적인 건축양식이 생겨나고, 일본의 풍물을 그린 야마토에(大和繪)가 등장하게 되었다. 정토교의 유행으로 지방에 사원이 건립되고, 불상도 대량생산되었고, 왕생하려는 사람을 부처가 맞으러 오는 그림이 유행하였다.
당시의 귀족의 복장도 일본색이 풍부하였다. 식생활은 비교적 간소하여, 식사는 1일 2회로, 불교의 영향으로 고기를 먹지 않았고 조리에 식용유를 사용하지도 않았다. 헤이안쿄의 귀족들의 결혼생활은 처가거주형으로, 아이도 처가에서 양육하였다. 다다미를 깔고 앉아서 생활하였으며, 연중행사가 발달하였고, 미신과 원령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3) 인세이(院政)와 타이라(平)씨의 전성
11 세기후반 후지와라((藤原)씨 소생이 아닌 고산죠(後三條)천황이 친정을 실시하면서 셋칸정치는 끝났다. 시라가와(白河)·토바(鳥羽)·고시라가와(後白河)천황등은 양위하고 상황(上皇)으로서 인(院)에서 정치를 하였는데, 이를 인세이(院政)라 한다. 인세이는 100여간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에 불사에 의한 낭비와 관직· 관위의 매매 및 승병의 시위등으로 율령정치는 더욱 붕괴되고, 장원은 확대되었다.
인세이기 말기에는 1156년 천황과 상황의 대립을 계기로, 무사단이 중앙에서 활약하게 되어, 1159년 미나모토(源)씨를 누르고 정권을 장악한 타이라(平)씨는 천황의 인척으로 약 20여년간 권력을 휘둘렀다.
인 세이기의 문화의 특징은 문화의 지방화·서민화가 진전되었다는 점이다. 정토교사상의 보급으로 지방에도 훌륭한 건축물이 만들어졌으며, 유행가요와 덴가쿠(田樂)와 같은 서민예능이 발달하였다. 설화집 ({今昔物語集})과 무사들의 활약담({陸奧話記}), 일본어 문체의 역사서({榮華物語}·{大鏡})등이 만들어졌으며, 야마토에(大和繪)에 이야기를 넣은 에마키모노(繪卷物)도 유행하였다.
Ⅱ. 中 世
1. 무가사회의 형성
(1) 카마쿠라(鎌倉)막부의 성립
타 이라(平)씨 일족정치에 대한 반감이 무사단·귀족·사원사이에서 커지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는 타이라씨타도의 병을 일으켰다. 요리토모는 1183년 동국의 행정권을 장악, 카마쿠라(鎌倉)를 거점으로 하여 세력을 확대해 나간다. 1185년 단노우라(壇の浦)의 싸움으로 타이라씨를 멸망시키고, 칙허로 슈고(守護)·지토(地頭)의 설치권을 얻어내어 군사경찰권을 장악하였고, 1192년에는 무사의 통솔자를 의미하는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으로 임명된다. 이 무가정권을 카마쿠라막부(鎌倉幕府)라 하는데, 이후 약140년간 계속되었다.
카마쿠라막부에는 쇼군(將軍)의 밑에 중앙의 조직으로 사무라이토코로(侍所)와 쿠몬죠(公文所)·만도코로(政所)·몬츄죠(問注所)등이 있었다. 또한 각지의 공령과 장원에는 쇼군의 가신을 슈고·지토로 파견하여, 치안유지와 연공징수를 담당케 하였다.
막부지배의 근본은 토지에 대한 권리(式)을 매개로 한 장군과 가신과의 주종관계에 있었으므로, 카마쿠라막부는 봉건제도에 기초한 일본최초의 정권이었다. 그러나 천황조정의 코쿠시(國司)와 장원영주들이 여전히 존재하였고, 무사들은 토지의 일부권리만을 가졌으므로, 그 지배체제는 무가와 천황조정 귀족의 이원적 지배체제로, 봉건제도는 아직 미숙하였다.
(2) 執權정치
카 마쿠라 막부의 실권은 초기에는 쇼군에 있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의 사후,부인 마사코(政子)의 부친 호죠 토키마사(北條時政)가 싯켄(執權)으로서 쇼군을 보좌하였으나, 3대장군의 암살로 미나모토씨의 쇼군(將軍)시대는 끝나고, 호죠씨가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한편 쿄토조정에서 세력을 만회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1221년 고토바(後鳥羽)상황이 군대를 일으켰지만, 막부군의 승리로 끝났다(承久의 난). 이후 막부는 황위계승에 개입하고 쿄토조정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였으며, 상황측에 가담한 귀족·무사의 영지를 몰수하고 새로 지토를 임명하였다. 그 결과 막부는 전국지배를 확대하여, 천황조정에 대한 막부의 우위가 확립되었다.
승구의 난후 막부는 집권 밑에 랜쇼(連署)와 효죠슈(評定衆)를 두어 합의제를 실시하였다. 또한 무가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무가최초의 체계적 법전인 정영식목(貞永式目) 51개조을 제정하였다.
당 시의 무사는 집(館) 주위에 흙으로 소성곽을 쌓고 주변에 해자를 두르고 살면서, 하인이나 농민을 써서 직영지를 경작케 하는 한편, 쇼칸(莊官)이나 지토로서 연공징수를 담당하고 연공의 일부를 받았다. 무사사회에서는 혈족의 결합이 공고하여 일족의 장을 대표로 하여 막부에 봉사하였으며, 여자도 포함한 분할상속이 일반적이었다. 주인에 대한 [봉공]을 위해 무예를 연마하였으며, 검소·무용(武勇)·충성·명예등을 중시하였다. 이 무가의 도덕은 에도시대의 무사도(武士道)로 이어진다.
그러나 지토들 중에서 년공을 횡령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자, 장원영주는 장원의 지배권을 지토와 나누어 갖는 방법으로 분쟁을 해결하려 하였다. 그 결과 장원의 현지 지배는 점차 무사의 손에 맡겨지게 되었다.
카마쿠라중기에는 기내와 서일본에 쌀과 보리의 이모작이 확대되고, 비료가 이용되고 우마의 사용과 농구의 보급이 늘어났으며, 종이·염료·등유등의 원료가 재배되었다.
또한 주물사·옹기장이등의 전문수공업자가 농촌에 등장하였다.
농 촌의 생산물의 교역을 위해 정기시가 열려, 지토와 쇼칸은 상인에게 세를 거두고, 년공미등을 여기서 팔아 돈으로 만들어 쿄토나 나라의 장원영주에게 보냈다. 도시에서는 장원영주들을 대상으로 한 양조·고급직물·무기·공예품등 수공업생산이 이루어졌다.
제조와 판매의 독점을 위해 [자(座)]라는 상공업자 동업조합이 있었으며, 원격지간 거래에는 어음(爲替)이 결제수단으로
사용되어, 고리대금융업자([借上]·[土倉])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되었다. 당시의 화폐로는 무역을 통해 수입한 송의 화폐가 사용되었다.
(3) 鎌倉문화
막 부성립 초기에는 오랜전통을 지닌 공가문화가 우세했으나, 송·원 문화의 영향으로 소박하면서도 힘찬 무가 문화가 생겨났다. 전란과 재해, 귀족세력의 몰락과 타이라(平)씨의 성쇠를 본 사람들은 더욱 더 현실부정의 말법사상을 가지게 되어 종교에 구원을 구하였다.
이러한 때 나타난 것이 카마쿠라신불교(鎌倉新佛敎)다.
신 불교는 계율·학문·기진(寄進)등을 중시하는 구불교를 배척하고 염불·선·제목(題目)중에서 한 길을 정진하면 구제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크게 정토교계·선종·니치랜종(日蓮宗)으로 나눌 수 있다. 정토교계통에는, 정토종·정토진종·시종(時宗)이 있는데 모두 염불을 중시하여, 무사·서민층에 퍼졌다. 니치랜종은 니치랜이 창시한 것으로 관동의 무사층에 퍼졌는데, 제목(南無妙法蓮華經 7글자)를 외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송에 유학한 승려에 의해 선종도 전해졌는데, 공안(公案)을 중시하였던 임제종과 좌선을 중시한 조동종이 있었다.
신불교의 등장으로 나라의 구불교계에서도 혁신이 일어나, 빈민·병자를 구제하고, 도로·다리를 건설하였다.
카 마쿠라시대의 문학으로는 군기물({平家物語})·설화집({古今著聞集})·수필({徒然草})들이 발전하였다. 학문도 발달하여 공가사회에서는 고전연구({釋日本紀}), 송학(宋學), 역사({愚管抄})의 편찬이 있었으며, 무가사회에서도 카마쿠라막부의 역사({吾妻鏡})가 편찬되고, 호죠씨는 카나자와문고(金澤文庫)를 설치하였다.
카마쿠라시대에는 예술의 새로운 경향이 나타났다. 조각은 힘있고 인간미 넘쳤으며, 초상을 조각하기도 하였으며, 그림은 두루말이 그림(繪卷物)과 초상화가 발달하였다.
공예품으로는 도검과 도기·갑주의 생산이 발달하였다.
(4) 원구(元寇)와 막부의 쇠퇴
12 세기초 강남의 남송과 일본사이에 국교는 열리지 않았으나, 사무역과 승려·상인의 왕래는 활발하였다. 13세기후반 원의 후비라이의 조공요구를 싯켄 토키무네(時宗)가 거절하자, 원은 고려와 연합군을 만들어 1274년 큐슈북부를 침략하였다. 원군의 화약과 집단전법에 일본군은 고전하였으나, 때마침 폭풍이 불어 원군이 물러갔다. 그후 원은 남송을 멸망시키고 1281년 다시큐슈북부에 침입하였으나, 일본군의 분전과 폭풍우로 다시 패퇴하였다. 이 두차례의 원의 침입을 [겐코(元寇)]라 한다.
[겐코]때에 조정과 사원·신사에서는 신불(神佛)의 가호를 비는 기도가 계속되었는데 원이 퇴각하자, 일본에는 신국사상이 강화되었다. 전시하 막부의 호죠씨는 독재체제를 통해, 전국 지배를 강화하게 되었으나, 전비를 부담하였으면서도 보상을 받지 못한 무사들은 막부를 불신하게 되었다. 분할상속제도로 궁핍해진 무사들은, 영지를 팔든가 빚을 지게 되었다. 막부는 1297년 무사들이 판 영지를 원상회복케 하는 명령을 내렸으나 별로 효과는 없었으며, 기내부근에서 장원영주나 막부·슈고의 지배에 반항하는 무사들의 집단행동이 일어나면서 막부체제는 동요하게 되었다.
2. 무가사회의 성장
(1)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의 성립
1324 년과 1331년에 고다이고(後醍 )천황이 벌인 막부타도운동을 계기로하여, 무사들이 각지에서 거병하였다.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尊氏)와 닛타 요시타카(新田義貞)도 막부에 반기를 들고 호죠(北條)씨일족을 공격하여 1333년 카마쿠라막부를 멸망시켰다.
그 러나 타카우지가 무가정치의 부활을 꾀하여 1336년 쿄토조정을 공격하자, 고다이고 천황은 남쪽 요시노(吉野)로 도망갔다. 이후 1392년까지 타카우지가 세운 쿄토의 천황(北朝)과 요시노의 천황(南朝)이 병존하여, 전국의 무사들도 둘로 나뉘어 싸웠다.
이 50여년의 쟁란기를 남북조시대라 한다.
북 조의 타카우지는 켄무식목(建武式目)을 제정하여 정치의 기본을 정하고 1338년 세이다이쇼군에 임명되어 막부정치가 부활했다. 3대장군 요시미츠(義滿)때에 남북조가 통일되고(1392), 막부기구가 정비되었다. 막부는 장군 밑에 정무를 총괄하는 3인의 칸래이(管領)를 두고, 그 밑에 카마쿠라시대이래의 사무라이도코로(侍所)등의 지배기구를 두었다.
지방에는 슈고를 설치하고 관동에 카마쿠라부(鎌倉府), 구주에 큐슈탐제(九州探題)등을 두었다. 요시미츠는 막부를 쿄토의 무로마치(室町)에 두었으므로, 이 아시카가씨의 막부는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라 불리운다.
남북조시대에 막부는 슈고(守護)에게 군사·경비권외에 년공의 반을 거둘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이를 계기로 수호는 장원을 지배하고 무사들을 가신으로 삼아 영주가 되었다.
이렇게 영주로 변한 강력한 수호를 슈고다이묘(守護大名)라 한다. 유력한 슈고다이묘는 관래이(管領)와 사무라이도코로의 장관이 되었으므로 이 시대의 막부는 수교다이묘의 연합정권과 같았다.
[겐코]이후 원과 정식국교는 없었으나, 무역은 활발하여 상인·승려들이 왕래하였다.
카마쿠라시대말부터 큐슈북부와 세토(瀨戶)내해연안의 무사와 어민들이 중국과 한국의
연안에 진출하여 무역을 하거나 해적이 되었는데, 이들을 중국과 조선에서는 왜구(倭寇)라 불렀다.
명의 왜구단속 요구를 받아들인 요시미츠(義滿)는, 정식무역선에 도항증명서(勘合)를 발행하였는데, 감합은 점차 슈고다이묘 호소가와(細川)· 오우치(大內)씨가 발행하게 되었다.
1419 년 조선은 쓰시마(對馬)를 공격하고, 왜구 금압을 일본측에 요구하는 한편, 쓰시마의 소(宗)씨에게 도항자의 통제와 특허무역을 허락하였으나, 1510년 삼포의 난이후에는 무역은 쇠퇴하였다. 일본은 조선에 염료와 후추등을 수출하고, 목면·대장경등을 수입하였다.
15세기초 상씨가 등장하여 오키나와를 통일하고, 16세기에는 류큐(琉球)왕국이 건설되어, 중국·조선·일본 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에 상선을 파견하여 향료등의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다.
(2) 막부의 쇠퇴와 서민의 대두
무로마치막부초기에는 쇼군과 유력다이묘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 러나 6대 쇼군은 슈고다이묘의 통제를 강화한 [만인공포]정치의 실시로 반발을 사서결국 살해당하고, 막부의 쇼군의 권위는 흔들리게 되었다. 8대쇼군 때에 쇼군도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슈고다이묘의 힘은 더욱 강해졌다. 특히 호소가와(細川)씨와 야마나(山名)씨의 막부내에서 세력다툼이 치열하였는데, 여기에 쇼군가와 칸래이가의 상속다툼이 겹쳐 1467년(應仁 원년) 44개국 슈고다이묘의 27만 대군이 동서군으로 나뉘어 11년간 싸웠다.
이를 응인(應仁)의 난(1467-77)이라 한다.
응인의 난 이후 약 100년간 일본전국의 무사들이 싸우는 센코쿠(戰國)시대가 계속되었다.
센 코쿠시대에 하극상의 전란 속에서 새로 세력을 확대한 유력영주를 센코코다이묘(戰國大名)라 한다. 센코쿠다이묘에는 이마가와(今川)·타케다(武田)씨등와 같이 슈고다이묘(守護大名)출신도 있었으나, 오다(織田)· 모리(毛利)씨등 대부분은 다이묘의
가신 출신이었다.
센 코쿠다이묘는 강력한 군대와 독자적인 법을 만들어 장원영주를 무시하고 무사·농민을 지배하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위해, 경지개발, 관개·치수공사, 금은동산의 개발, 상공업자의 보호에 노력하였다. 센코쿠다이묘는 대개 성을 쌓고 부하와 상공업자를 모여 살게 해 도시(城下町)를 만들었다.
무로마치시대에는 마경·우경·비료등이 널리 보급되고, 관개·배수기술의 발달로 이모작이 전국에 확대되었으며, 16세기에는 면화의 재배도 시작되었다. 유력농민 중에서 무사가 되는 사람들이 늘어나, 이들 지도하에 농민들은 촌마다 자치조직을 만들어 단결을 꾀하였다. 관개용수와 산야의 공동이용을 위한 규약을 정하고, 장원영주나 슈고다이묘와 연공을 교섭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무사의 침략과 농민의 자립에 의해 장원영주의 지배는 붕괴하고 장원은 유명무실해졌다.
수공업 도 각지에서 발달하게 되었다. 수공업자들은 주문생산 뿐만 아니라 시장생산도 하게 되었다. 견직물·도기·술·도검등의 제조기술이 진보하여 각지방의 특산품이 생겨 났으며, 전문적인 직인도 많아져 이들의 동업조합도 발달하였다. 교통의 요지에는 상품 거래 중개상이 생겨났으며, 운송업자들이 활약하였다. 수상교통도 발달하여 정기선(廻船)이 있었다. 물자의 유통도 활발해져 무로마치시대 중기이후 정기시는 5일마다 열리게 되었다. 송·원·명의 중국화폐와 과거의 일본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연공도 전납으로 변하고, 토지의 매매에도 화폐가 사용되었으며, 어음도 사용되었다.
화 폐경제의 진전은 금융업자·고리대금업자를 부유하게 하였으나, 무사와 농민은 빚 때문에 토지를 파는 사람들이 생겼다. 촌과 도시(町)의 자치가 발달하면서 연공감액·부채탕감등을 요구하는 무사·농민·종교단체등의 집단행동이 일어나, 막부와 슈고다이묘가 지배하는 사회를 동요시켰다.
(3) 무로마치(室町)문화
무로마치시대의 문화는 무가세력과 민중의 대두를 바탕으로 발전하였는데, 그 성격은 카마쿠라시대의 무가문화에 선종을 매개로 하여 전해진 중국문화의 영향이 더해진 것이었다.
3 대쇼군이 쿄토의 키타야마(北山)에 세운 킨카쿠(金閣)는 귀족적인 신덴즈쿠리(寢殿造)양식과 선종사원의 양식을 채용한 건물로, 이를 대표로 하는 무로마치초기의 문화를 카타야마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임제종이 막부의 보호로 번영하였고, 선종의 영향으로 수묵화가 유행하고 선종 경전 및 한시문집의 출판이 이루어졌다. 또한 가무연극인 노(能)의 전문예능집단이 등장하여 막부의 보호로 발전하였다.
8대쇼군이 쿄토의 히가시야마(東山)에 세운 긴카쿠(銀閣)는 선종사원양식을 무사의 주거양식에 도입한 것으로, 이것으로 대표되는 무로마치 후기의 문화를 히가시야마 문화라 한다. 이 시기에는 응신의 난으로 지방으로 피난간 공가와 승려들에 의해 쿄토
문화가 지방에 파급되었으며, 상공업자나 농민중에서도 새로운 문화가 생겨났다.
무 로마치시대문화의 특징은 무사와 귀족뿐만 아니라 민중이 즐길 수 있는 문화가 탄생하였다는 점이다. 복수의 사람들이 와카(和歌)를 계속 이어 간 랜가(連歌)라든가, 노(能)의 막간에 상연되었던 쿄겐(狂言),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춤을 추었던 봉오도리(盆踊り)등이 그것이다. 또한 이 시대문화에는 다다미·후스마·토코노마 등 일본식 건축과 다도·화도 (花道)등의 전통문화에서, 오늘날 일본 생활문화의 원류가 많다. 카마쿠라시대의 신불교도 무사·농민·상공업자들의 신앙에 의해 도시와 농촌에 퍼져 더욱 교세를 확장하였다.
센코쿠(戰國)시대에는 유력한 다이묘들의 죠카마치(城下町)를 중심으로 각지에 문화의 중심이 생겨났다. 유학이 다이묘들의 필수학문이 되었고, 무사자제는 주로 사원에서 교육받았는데, 특히 우에스기(上杉)씨의 아시카가(足利)학교는 전국의 선승과 무사들이 모여들었던 학교로, 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었다. 한편 도시의 부유한 상공업자나 촌락의 유력자들도 읽고 쓰고 계산하는 능력을 기르게 되었다.
Ⅲ. 近 世
1. 막번(幕藩)체제의 확립
(1) 쇼쿠호(織豊)정권
1543 년 타네가시마(種子島)에 표착한 포루투갈인이 대포를 전래한 후 포루투갈과 에스파니아의 상선이 일본에 와서 무역을 하였다. 또한 1549년 예수회의 선교사 사비에르를 시초로, 많은 선교사가 일본에서 포교·교육·의료활동을 하여, 신자의 수는
급증하였다.
대 포의 전래로 보병 대포부대가 활약하게 되면서, 통일사업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로 이어진다. 오다 노부나가는 1573년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막부를 멸망시키고, 오우미(近江)의 아즈치(安土)성을 근거지로 하여 국내통일에 힘썼으나, 부하장수의 배반으로 1582년 자살하였다.
오다의 부하 토요토미는 1583년 오다의 후계자 지위를 확립하고, 오사카(大坂)성을 축성하여 통일의 거점으로 삼아, 1590년에는 전국통일을 완수하였다. 토요토미정권은 토지조사를 통해 경작자를 연공부담자로 정하고, 농민의 무기를 몰수하여 병농분리를꾀하였다. 한편 대외정책면에서는 크리스트교를 탄압하고, 고아·루손·대만의 조공을 요구하였으며, 1592년과 1597년에 조선을 침략하였다.
오다·토요토미시대의 문화는, 신흥다이묘·거상(巨商)들의 기풍을 반영하여 호화롭고 웅장하며 현세적·향락적이었다. 특히 성곽건축에 그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대부터 사탕과 간장이 사용되었고 1일 3회의 식사와 간식이 일반적이 되었으나, 서민들은 여전히 잡곡을 주식으로 하였다.
(2) 에도막부(江戶幕府)의 성립
히 데요시의 사후,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1600년 세키가하라(關ケ原)싸움에서 승리하여 전국지배권을 확립한다. 이에야스는 1603년에는 세이다이쇼군으로 임명되어 에도막부를 열고, 1615년 오사카성을 공격하여 토요토미씨를 멸망시킨다. 과거의 어떤 무가정권보다도 강력하였던 에도막부는 260여년간 계속된다.
에도막부는 쇼군 밑에 로츄(老中)이하의 관직을 두어 쇼군의 부하무사를 임명하였다.
쇼군의 부하무사는 다이묘(大名)와 하타모토(旗本), 고케닌(御家人)으로 나뉘어, 다이묘는쇼군으로부터 1만석이상의 영지를 수여받은 무사로, 그 영지를 번(藩)이라 했다.
하타모토과 고케닌은 1만석미만의 영지를 받은 쇼군직속의 2만수천명정도의 가신으로 막부 군사력의 중심이 되었으며, 특히 하타모토는 쇼군을 알현할 수 있었다.
에 도막부의 쇼군은 다이묘의 영지내(藩)의 정치에 간섭하는 일은 없었으나, 막부에 대한 반란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하여, 다이묘는 처자를 에도에 두고 자신의 영지와 에도를 왕복하면서 살게 하였다. 이 왕복비용과 에도 생활비용 및 막부의 토목공사등의 부담으로 번(藩)의 재정은 궁핍해졌다.
에도시대에 쇼군(將軍)과 다이묘의 영주권에 의해 토지·인민을 지배하는 체제를 막번체제라 하는데, 이는 농민이 부담하는 연공과 부역을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사회였다.
막부의 경제력은 약 400만석의 직할지(天領)의 연공과 직할도시의 영업세, 주요광산과 도로, 화폐의 주조권등에 있었다.
에도막부는 사농공상·천민으로 나뉜 엄격한 신분제도를 확립하여, 집안대대로 전해 온 직업과 가부장의 절대권을 중요시하였다. 또한 막부는 사원을 민중지배에 이용하기 위해, 혼인·여행·취직에 필요한 증서를 절에서 발부하게 하였다.
무 사도라는 엄격한 도덕을 요구받았던 무사는, 성의 경비와 영지내의 행정을 맡아보고 봉록으로 토지나 쌀·화폐를 받았으나, 상급무사를 제외하고는 생활에 여유가 없었다. 전 인구의 80%이상이었던 농민은 수확량의 40%-50%의 연공을 바쳐서 무사의 생활을 지탱하였다. 농민은 전답의 매매·분할상속금지, 일상생활등에서 규제를 받고 있었다. 농민에는 자작농과 소작농의 신분계층이 있어, 자작농은 연공·잡세·노역등을 부담하였고, 유력한 자작농은 관리로 촌의 운영에 참가하였다.
(3) 쇄국정책
이 에야스는 무역 이익때문에 포루투갈과 스페인의 상선의 내항을 환영하고 크리스트교 포교도 묵인하였으며, 무역선에는 도항허가증(朱印狀)을 주어 보호하였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신자가 70만명이나 되자, 막부는 이 종교의 인간평등사상과, 부유한 다이묘의 등장에 대해 위험을 느끼게 되었다. 영국·네델란드가 일본무역 독점을 위해, 스페인과 포루투갈의 영토확장 야심을 막부에 알리자, 막부는 포교를 금지시키고 무역을 단속하였다.
선교사나 신자는 국외에 추방되든가 처형당하였으며, 무역항은 히라토(平戶)와 나가사키 (長崎)로 제한되고, 스페인선의 내항은 금지되었다. 또한 일본인의 해외도항과 해외 거주 일본인의 귀국도 금지되었다.
크리스트교 신자 중심의 시마바라(島原)의 난을 진압한 막부는, 모든 사람들을 절의 신자로 등록하게 하는 제도를 만들고 1639년 포루투갈선의 내항을 금지한 쇄국령을 발표한다.
이 로서 네델란드·명·조선을 제외한 외국과의 통교는 금지되어 이후 200여년간의 쇄국체제에 돌입하였다. 그러나 무역항 나가사키에서 네델란드·중국과의 무역이 이루어졌으며, 이에야스때 국교를 수복한 조선과는 쓰시마의 소(宗)씨를 통해 외교· 무역이
이루어졌고 쇼군의 교체시마다 조선에서 통신사가 파견되었다. 또한 1년에 한번씩 내항하는 네델란드상선이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막부는 외국의 동향을 짐작할 수 있었다.
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성장해 2000년대를 살고 있다. 사회학과 정치학을 전공하지만, 스스로를 역사학도라고 생각한다. 면식과 만화, 수다와 어린이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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