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점> 연대 항쟁 10주년을 맞으며 | |
2006-08-11 오전 11:05:15 | |
| 민경우 전문기자 (tongil@tongilnews.com) 올 8.15이면 연대항쟁 10주년을 맞는다. 10주년을 맞이하여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기획되고 있다. 필자는 10년 전 연대항쟁 당시 범민련 남측본부 사무처장 자격으로 7차 범민족대회를 실무적으로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다. 덕분에 연대항쟁에 대한 기억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여전히 조심스럽긴 하지만 10년 전 연대항쟁에 대한 평가는 우리가 넘어야 할 山임에 틀림없다. 연대항쟁에 대한 평가를 대중적으로 시작한다는 차원에서 개인적인 의견을 말해 보겠다. (연대항쟁에 대한 기록은 제대로 남아 있지 않은데 『연대항쟁 백서』, 연세대학교 총학생회 엮음, 『민경우가 쓴 통일운동사』, 『범민련 10년사』를 참고하기 바람) 1. 연대항쟁의 의미와 배경 연 대항쟁이란 7차 범민족대회를 말한다. 89년 문익환 목사, 임수경 학생 방북 이후 90년 이후 통일운동이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 연장선에서 남북해외가 함께 90년 8.15를 계기로 범민족대회를 추진하였고 이 성과를 토대로 90년 11월 독일 베를린에서 조국통일범민족연합(약칭 범민련)을 결성하였다. 91년에는 범민련 산하의 청년학생조직으로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약칭 범청학련, 사실상 한총련)을 결성하고 범민족대회안의 청년학생 행사로 1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개최하였다. 따라서 연대항쟁이라 함은 96년 개최된 7차 범민족대회와 그 안에서 진행된 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을 말한다. 88~91년 남북합의서로 상징되는 통일정세의 고양기속에서 90년 범민족대회와 범민련 결성은 내외의 높은 관심과 참여속에 진행되었다. 그 러나 노태우 정부의 탄압이 강경해지고(범민련과 범민족대회는 남북해외의 3자 합의를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국가보안법 체제와 양립할 수 없었다) 소련 붕괴,김영삼 정권 출범 등으로 진보적인 식자층을 중심으로 청산적인 분위기가 만연하면서 어려움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91,92년은 정부의 혹심한 탄압속에서 주로 전대협을 중심으로 행사가 진행되었고 93년 하반기부터는 범민련 해소론이 대두되어 극심한 내홍에 직면했다. 범민련 해소론은 범민련을 유지하되 새로이 대중적인 통일운동체인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94.7.2 결성)를 조직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그 후에도 통일운동의 분열은 계속되었다. 통 일운동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전대협-한총련은 93년 범민련 해소론에 적극적이었지만 95년 이후 범민련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96년 4기 한총련 집행부(의장 정명기 전남대 총학생회장)는 범민련에 강한 애착을 보여 주었다. 한편 93년 들어 선 김영삼 정부는 통일운동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는 94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비정상적인 수준으로 강화되었는데 이 연장선하에서 통일운동 세력에 대한 말살을 기도하고 있었다. 94년 5차 범민족대회 탄압, 95년 11월 범민련 남측본부 간부 29명에 대한 일제 연행 등이 그러한 사례이고 96년 연대항쟁, 97년 한총련 출범식은 그의 완성판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연대항쟁이 우발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90년대 중반 반공개적으로 진행되었던 학생운동 말살 책동의 연장선에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96년을 둘러 싼 환경은 첫째, 김영삼 정권에 대한 통일운동 말살 기도 둘째, 통일운동 진영의 분열 셋째, 강성 한총련 집행부의 출범으로 요약될 수 있다. 2. 연대항쟁의 전개 과정 7 차 범민족대회와 6차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은 매년 서울의 특정 대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범민족대회와 범청학련 통일대축전이 매년 해당 시기의 주요 통일운동 과제를 중심으로 남북해외의 3자가 합의하고 3자가 함께 참여하는 형태로 추진되었지만 매번 정부 당국의 탄압에 의해 3자 합의, 3자 회합 자체가 불허되고 정부 당국과 행사 주최측이 이를 두고 공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정 부당국은 3자합의, 3자 회합을 봉쇄했지만 3자합의는 대부분 일본을 통한 팩스 교환 형태로 강행되었고 3자 만남은 팩스 교환을 통해 결의문을 채택하는 수준에서 진행되었다. 주목할만한 것은 전대협-한총련의 경우 이를 뛰어 넘어 학생 대표를 방북시켜 실제 만남을 성사시키곤 했다. 행사의 양상은 대체로 행사장으로 예정된 대학을 정부가 원천 봉쇄하는 대신 참가자들은 다른 대학에 집결하여 통일행사를 치르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다. 이 정도만으로도 매년 8.15를 둘러 싼 충돌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정부 당국은 행사장소로 예정되어 있던 대학을 수일 이상 이중삼중으로 봉쇄하거나 심지어는 사전에 침탈하곤 했고(92년 중앙대 등) 참가자들은 날을 세워가며 관악산을 넘어 행사장에 진입하곤 했다. 정부 당국의 탄압이 극심하기는 했지만 참가자들의 결의 또한 만만치 않았는데 더운 여름날 행사장의 봉쇄와 집결을 둘러 싼 공방전은 전시 상황이 아니면 보기 어려울 정도로 격렬한 것이었다. 96년이 이전과 달랐던 것은 정부 당국이 예년의 수준을 뛰어 넘는 그야말로 학생운동의 궤멸을 목표로 탄압을 준비하고 있었고 한총련의 입장도 강경한 점이었다. 8.12~15 에 걸쳐 행사장은 연대를 봉쇄하려는 경찰과 학교에 진입하려는 학생들간의 충돌이 계속되었다. 봉쇄와 진입 사이의 공방이 지속되는 가운데 8.12에는 범민족대회 개막식이 8.13에는 범청학련 축전이, 8.14에는 범민족대회 전야제가 연세대학교 도서관 앞 광장과 노천강당 등에서 진행되었다. 8.15 오전 행사장에 진입하려는 최종 대오가 연세대에 진입하고 8.14 저녁부터 날을 세워가며 진행되었던 전야제가 거의 막을 내렸다. 예년에 비추어 보면 정부 당국은 3자 만남을 실현시키기 위해 판문점으로 진격하려는 참가자들의 거리 진출을 막고 참가자들은 3자 만남의 의지를 과시한 뒤 해산할 것이었다. 그러 나 8.15 오전부터 경찰 병력이 연세대 행사장으로 전격 진입하여 참가자들을 몰아 부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참가자들은 연세대 이학관과 종합관으로 나누어 집결했다. 주목할 점은 당시 연세대에 있던 근 1만명에 달하는 노동자, 청년, 사회단체 참가자들에게 학교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용한 점이다. 이는 의도적으로 학생들만을 고립시켜 대대적인 탄압에 따른 정치적 부담을 덜려는 속셈이었고 학생들만을 의도적으로 선별하여 제거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이로부터 8.16~20 사이 경찰 병력이 연세대를 이중삼중으로 포위한 가운데 학생들은 연세대 이학관과 종합관으로 고립되어 본의아닌 농성이 시작되었다. 매 년 범민족대회가 열렸어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언론은 대대적으로 연대를 둘러 싼 상황을 악의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고 청와대는 경찰에서 진압이 무리라는 의견을 올렸음에도 강경 진압을 시도하고 있었다. 반면 재야 사회단체들은 대부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학생들의 경우 예정에 없던 농성이었기 때문에 먹을 것 등 기본적인 물품이 부족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더위에 지쳐가기 시작했다. 8.20 새벽 6시경 연세대 종합관에 대한 진압이 시작되었다. 경찰은 완전무장한 헬기를 비롯 압도적인 무력을 동원하여 상황을 조기에 수습하려 하였다. 7.40분경 종합관에 대한 진압이 마무리되자 학생들은 9시 40분경부터 이학관 뒤쪽 야산과 담을 넘어 탈출을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또 다수의 학생들이 연행되었지만 집행부를 비롯 다수의 학생들이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8.12~19 동안 총 5597명이 연행(종합관에서 2193명, 이과대에서 1032명 연행되어 8.16~20에만 3223명 연행)되었고 종합관 진압과정 등에서 무수한 폭행과 성추행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충돌 과정에서 영남대학교 김하영양과 진압과정에서 전경 한 사람이 사망하기도 하였다. 3. 평가 1) 어떤 사건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그 시대의 시대적 과제와 연동해서 평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96년 당시의 시대적 상황은 어떠했을까? 80년대 중반 진보적인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진취적인 사회분위기는 90년대 초반을 계기로 중간층이 주도하는 점진적인 개혁 노선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이 와 함께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론, 삼성 등 대자본의 해외진출, 복거일.탁석산씨 등의 노골적인 탈민족론, 민족.민중과 같은 거대 담론을 부정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경실련.참여연대로 대표되는 온건한 시민운동 등이 주류를 이루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변혁과 민중, 통일과 민족 담론이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기류가 시대와 부합했는가 하는 점인데 통일,민족문제를 부정한 결과 여러 가지 심각한 후과를 낳았다. 이를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통일운동의 성과가 올바로 계승되지 못하여 6.15 공동선언과 같은 역사적 합의에 대한 대중적 지반이 취약했다. 96,97 년 통일운동을 주도했던 학생운동 역량이 약화되면서 6.15 선언 이후 조성된 통일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또 96년 연대항쟁 그리고 90년대 민족문제에 대해 애매한 입장을 취했던 자유주의 성향의 정치인들이 신주류로 등장하면서 6.15 선언에 대한 의의가 제대로 확산되지 못했다. 노무현 정부나 이종석 통일부장관 등이 보여 주는 6.15 선언에 대한 기이한(?) 태도도 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둘째,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요구가 수렴되지 못하고 북 붕괴론과 같은 시대착오적인 분위기가 대세를 이루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94 년 북미제네바 합의가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면서 북은 한편으로는 경제난으로 빠져 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핵.미사일 개발을 강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90년대 중반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에 대한 요구가 제대로 수렴되지 못한 후과인데 연대항쟁의 핵심 구호가 북미 사이의 평화협정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는 연대항쟁에 대한 핵심적인 평가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셋 째, 일본의 군국주의화를 방치한 점이다. <김영삼-김대중-노무현 정부 초기> 무렵 역사바로세우기, 신한일관계 등 새로운 한일관계를 주창하곤 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진행되는 미일동맹 강화와 일본 군국주의 경향을 사실상 방치.묵인한 것으로 이후 대일 관계에 커다란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넷째, 세계화론에 대한 사상적 저항력을 약화시켜 IMF, 신자유주의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말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연대항쟁에서 학생들이 외쳤던 주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던 여러 민족적 문제의 해결을 주장한 것으로 대체로 시대와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2) 김영삼 정권이 거의 전횡에 가까운 탄압을 자행하고 심각한 희생으로 귀결된 것은 당시 진보적 지식인, 사회단체의 무관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당 시 진보적 지식인, 사회단체들은 학생들의 주장이 친북적, 좌경적이라는 정부 당국의 입장에 동의하여 사실상 정권의 탄압을 묵인했다. 이는 당시 진보적 지식인, 사회단체들의 입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입장이 자신들과 다르다고 해서 학생들에 대한 무단적인 탄압을 묵과한 것은 노선과 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최소한의 민주주의와 관련된 심각한 문제였다.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 따위의 주장을 남북이 공동으로 외친다고 해서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그에 대한 생각이 다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부 당국의 탄압을 묵인하는 태도는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3) 끝으로 학생운동의 관점에서 평가해야할 지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4기 집행부는 처음부터 행사장(연대) 절대 고수를 천명하고 있었고 시종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는데 이는 정세를 옳게 보지 못하고 정권의 탄압을 자초한 실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연세대에 고립된 상황에서 질서정연하게 대오를 통제하고 8.20 탈출을 결행할 수 있었던 점은 학생운동의 높은 조직성의 표현이다. 만약 당시 한총련 지도부가 우왕좌왕했다면 정말 심각한 결과를 빚었을 것이다. 이후 정명기 의장을 비롯 학생운동 지도부가 각 대학을 돌아 다니며 통일운동의 정당성을 적극 선전하려 했던 모습도 당당하고 의젓한 태도로 높이 평가할만 하다. 둘째는 96년 연대항쟁에 대한 대중적인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다. 김 영삼 정권의 의도, 진보적인 식자층의 분위기 등을 당시에는 잘 알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연대항쟁 이후에는 경험적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고통스럽더라도 대중적 지반을 공고히하고 국민적 신뢰를 획득하는데 힘을 쏟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치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96년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점이 97년 한총련 출범식의 원인을 제공했고, 학생운동의 약화가 96년 연대항쟁보다는 1년 후에 벌어진 97년 한총련 출범식과 보다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안타까운 지점이다. 4. 글을 맺으며 북 핵.미사일 문제는 점차 심각성을 더해 가고 있다. 아마도 전쟁, 핵을 가진 북, 핵.미사일 폐기-평화협정 중 하나로 귀결될 것이다. 이 중 전쟁이나 핵을 가진 북이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니라면 남는 것은 세 번째 경로 뿐이다. 그리고 평화협정의 핵심은 결국 북과 미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평화적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96년 연대에서 우리가 함께 외쳤던 주장이다. 어려운 시기 민족의 자주와 평화를 위해 함께 어깨 걸고 싸웠던 과거는 올바로 계승되고 발전되어야 한다. [출처] <초점> 연대항쟁 10주년을 맞으며|작성자 mkw19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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