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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현대사와 일본사회당 1

posted Nov 27,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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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현대사와 일본사회당


원제: 『戦後史のなかの日本社会党』原彬久、中公新書、2000年


* 시간 남아돌아서 끄적여 봤습니다. 홈페이지에 이런식으로 쓰다만게 한두개가 아닌데, 한국오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일어 해석해둔 노트들을 찾을 수가 없네요. 그래서 그냥 안해본거 하나 해둡니다. 일본사회, 혹은 다른나라 진보정당 운동에 관심 있으면 잠시 봐두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고유명사의 표기는 CK표기법을 따르며, 번역의 원칙 같은 건 없습니다. 직역과 의역중 마음 내키는 대로 했어요. 오류, 오탈자 지적 환영합니다. 한자 병기와 역주는 []로 표기했으며 길어지는 경우 별도로 *로 표기합니다.



제1장 전후 사회주의의 출발


일본재생의 횃불


1996년 1월, 일본사회당은 당명을 ‘사회민주당’으로 바꿨다. 이 당명개정은, 당이 심기일전하여 약진하는 시그널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세기에 이르는 일본사회당 역사에 마침표를 찍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일본사회당은 이때 이미 과거의 자취는 멀리 사라져버려, 당명개정과 함께 그 역사적 역할을 마치게 된 것이다. 사람이 개명한다는 것이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결별하겠다는 다짐이 담겨있는 것처럼, 일본사회당 또한 명칭의 소멸과 함께 사라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일본사회당이 처음 전후정치에 등장했던 것은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불과 2개월 반이 지난뒤였다. 미 점령군이 일본의 ‘민주화’와 ‘비군사화’의 정책들을 가속화할 때인 1945년 11월 2일, 일본사회당은 단일 사회주의정당으로서 창당했다.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은 다른 많은 정당들보다 앞장서 재빨리 폐허의 절망을 딛고 일어나 일본재생이라는 횃불에 불을 당긴 것이다. 사분오열을 거듭했던 일본의 무산진영이 전후일본의 재기를 내걸고, 무엇보다도 사회주의일본의 실현을 목표로 대동단결했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의 기적이었다.


그러나 전후정치의 열망을 짊어지고 등장했던 일본사회당도 창당에 이르는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시대는 바뀌었고,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정당을 필요로 하고 있었지만, 이 정치집단을 만들어내고 지켜온 사람들은 戰前부터 활동해온 사회주의자나 무산운동가였다는 사실은 역시 좀 더 곱씹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전전·전중의 사회주의 세력 간 대립, 통합의 다이나미즘이 거의 그대로 8월 15일의 패전을 지나 신당의 수립·전개의 동태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전전의 무산정당


전전 무산운동에는 3가지 큰 흐름이 있다는 것에 우선 주의해야 한다. 일본무산당계(일무계), 일본노농당계(일노계), 사회민중당계(사민계)가 그것이다. 이들 무산정당은 실은 1926년 3월(5일) 창설된 노동농민당(위원장 스기야마 모토지로오[杉山元治郎])이 분열된 결과 생겨난 것들이다. 노동농민당은 그 전년도인 1925년 12월(1일), 일본 최초의 근대사회주의정당을 목표로 결성된 농민노동당(위원장 아사누마 이네지로오[浅沼稲次郎])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농민노동당이 정부관헌의 탄압에 의해 창당된 지 불과 3시간 만에 해산당한 뒤, 이것을 계승하는 형태로 노동농민당이 탄생된 것이다.


그러나 당 결성 반년이 지나, 노동농민당은 이번에는 내부 문제, 즉 공산주의자의 입당문제를 둘러싼 중대한 내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결국 같은 해(1926년 12월 5일), 공산주의와 계급투쟁을 배제하며 자본주의의 합리적 개혁을 외치는 요시노 사쿠조오[吉野作造], 카타야마 테츠[片山哲],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 등 우파세력이 노동농민당에서 이탈하여, 사민당, 즉 사회민중당(위원장 아베 이소오[安部磯雄])을 설립한다. 전후 사회당에서 니시오파, 그리고 그 니시오파를 중심으로 한 민사당, 즉 민주사회당(1960년 1월 24일 창당)으로 이어지는 정치집단이다. 또한 사회민중당 결성 4일후인 12월 9일에는, 아사누마 이네지로오, 아소오 히사시[麻生久], 코오노 미츠[河野密]등 마르크스주의에 선 무산진영 중간파도 노동농민당을 나와 일노당, 즉 일본노농당(서기장 미와 쥬소오[三輪寿壮])을 결성한다. 전후 니시오파와 함께 우파 또는 중간파를 형성하는 카와카미(죠오타로오[丈太郎])파 그룹은 이 흐름을 기원으로 하고 있다.


이렇게 이들 두 세력이 빠져나간 노동농민당은 12월 12일의 대회에서 오오야마 이쿠오[大山郁夫]를 새로운 의장으로 선출하여 당의 재흥을 꾀했다. 이후 노동농민당은 사회주의운동의 좌파로서, 게다가 일본공산당(비합법)의 영향 아래 놓인 채, 바로 합법부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를 신봉하면서도 비합법 공산당의 지배를 혐오한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스즈키 모사부로오[鈴木茂三郎], 쿠로다 히사오[黒田寿男], 사카이 토시히코 [堺利彦], 코보리 진지[小堀甚二]들은, 1927년(쇼와2년) 12월에 이론지 『노농』을 발행하고, 곧이어 이듬해인 1928년 7월(22일)에는 노동농민당을 이탈하여 새로이 무산대중당을 창설한다. 사회주의정당의 ‘두뇌를 맡은’(스즈키 모사부로오 『어느 사회주의자의 반평생』) 『노농』에는, 이들 이외에도 아라타 칸손[荒田寒村], 오카다 소오지[岡田宗司], 사키사카 이츠로오[向坂逸郎], 이노마타 츠나오[猪俣津南男], 타카노 마코토[高野実], 이네무라 쥰조오[稲村順三], 이코오 코오도오[伊藤好道]등 전후 사회당 좌파를 맡을 쟁쟁한 인재가 결집했다. 훗날 이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그룹이 노농파라고 불린 것은 이 잡지명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또한 공산당에 반발하면서도 계급투쟁주의에 철저한 이 노농파가 대체로 일무당 즉 일본무산당(1937년 3월 11일 발족, 위원장 가토오 칸쥬우[加藤勘十])으로 이어진 것 때문에, 노농파는 자주 일무계로 불리게 된다. 전후사회당에 일대 세력이 되는 좌파집단, 그중에서도 스즈키(모사부로오)파 와 그 주변 그룹은 주로 이 노농파 내지는 일무계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다.


세 개의 원류


사회주의운동에서 앞서 말한 세 계열, 즉 일무계, 일노계, 사민계는 그 후 패전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다른 정파를 끌어들이는 상호접근, 반목, 이간을, 또 어느 때는 각 당파 내에서 갈등과 내분을 겪으면서, 살벌하기까지 한 이합집산의 파도에 휩쓸려갔다. 중요한 것은 이들 세 당파가 각각 인적, 사상적으로 일정한 변화를 거치면서도, 어떤 강인한 생명력을 지속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전의 무산운동을 음으로 양으로 움직여나간 이들 세 개의 원류는 패전후 사회당 결성에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훗날 대부분이 그대로 사회당의 노선투쟁과 파벌활동에 주요한 구동력이 되었다.


폐허 속에서


패전의 잿더미 속에서, 처음으로 사회주의정당 결성으로 움직여 나간 것은 이른바 우파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주목 할 것은, 사민계의 유력자 니시오 스에히로의 움직임이었다. 사민당이 노동농민당에서 분당하여 사회민중당을 설립할 때, 이것이 가능했던 추진력은 총동맹(일본노동총동맹의 약칭. 전전 노동조합운동의 내셔널센터)이었는데, 니시오는 이 총동맹을 시종일관 주도했던 주요 간부의 한 사람이었다. 신당 수립으로 향하는 니시오의 행동은, 이르게도(1945년) 8월 15일, 즉 패전일에 시작된 것이다.


8월 15일 아침, 오오사카에 거처를 두고 있던 니시오는 시내의 은행으로 가고 있었다. ‘2000엔 정도의 정기예금’을 인출하기 위해서였다. 정기예금 수령을 기다리면서, 그는 은행원과 다른 고객과 함께 ‘숙직실의 라디오’앞에서 그 ‘중대방송’을 듣게 된다(니시오 스에히로 『대중과 함께 -나의 반평생의 기록』). 니시오는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천황이 읽어나가는 패전조서에 ‘여직원들은 소리 높여 울고 있었다. 나도 전부터 이 전쟁은 질 것이라고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뺨에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니시오는 ‘내 눈물의 반은 전쟁에 졌다는 슬픔의 눈물이고, 다른 반은 기쁨의 눈물이었다.’라고 말한다. 나머지 절반의 ‘기쁨의 눈물’은 물론 일본 재생의 찬스를 잡았다는 기쁨의 눈물이었다.


신당의 모색


은행에서 ‘정기예금을 받은’ 니시오는, 그 발길을 교토로 향했다. 케이한[京阪]전차로 교토 시조역[四条駅]까지 가서 ‘여기부터 근처[半町] 카와바타쵸[川端町]’에 찾아가는 목적지는 ‘오랜 동지’ 미즈타니 쵸오자부로오[水谷長三朗]였다. 니시오는 미즈타니에게 설명했다. ‘일본 재건은 우리들의 두 어깨에 달려있다. 그러하기에 노동조합과 농민조합의 재조직, 사회주의 정당의 창립이 선결과제다.’ 소위 니시오의 신당구상이었다.


미즈타니의 승낙을 받는 것은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틀 후인 8월 17일, ‘식량과 여행용구를 채워 넣은 등산배낭을 짊어 매고’ 오오사카를 출발한 니시오는, 토오쿄오에 도착한 뒤, 20일 부터 뒤따라 온 미즈타니와 함께 히라노 리키조오[平野力三]와 3자회담에 들어갔다. 물론 ‘신당’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히라노는, 일본농민조합 우파들에서 출발한 일농당, 즉 일본농민당 결성 당시의 간사장이었다. 1928(쇼오와3)년 12월(20일) 이 일농당을 무산대중당과 일노당등과 합당하여 일본대중당을 만들어, 스스로 서기장에 취임한 사람이 바로 히라노였다. ‘일본국체의 진흥[振起]’·‘산업국책의 확립’을 강령으로하는 일농당은, 무산운동속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우익을 대표’(코오노 미츠 『일본사회정당사』)하는 정당이었다고 전해지지만, 이것을 지도한 히라노가 전후 재빨리 니시오, 미즈타니와의 제휴에 의해 단일 사회주의정당 결성에 착수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이 세 사람이 훗날 ‘(사회당)결당 3인방[三人男]’으로 불리는 기점이 이 때 였다.


패전의 시점에서 현직 중의원 의원으로 있던 니시오, 미즈타니, 히라노가 신당결성으로 행동을 바로 일으켰던 그때, 실은 원외의 우파세력 그중에서도 니시오와 함께 구 민사계의 사람들이, 카타야마 테츠, 하라 효오[原彪], 스즈키 분지[鈴木文治](전 총동맹회장)등을 중심으로 8월 초순에는 이미 ‘신당’을 ‘모색’하고 있었다. 결국 8월 20일 경 빠르게도 그들은 ‘정식으로 정당결성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의회정당연구회 『정치연감 1974년』).


한 편, 좌파세력의 움직임도 이와 동시에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우파세력이 신당결성으로 가닥을 잡고 직선적으로 추진한데 비해, 좌파진영의 신당구상에는 약간 곡절이 있다. 아라타 칸손은 이렇게 증언한다. “구 일본무산당계의 카토오 칸쥬우 군들은 이전부터 깊은 관계였던 후지타[藤田] 아무개(이사무[勇])와 서로 상의하여, 후작 토쿠가와 요시치카[徳河義親]를 추대하여 국민 뭐시기 협회를 만드려는 것으로 알려졌다. 어차피 미국에 몰수당할 황실재산이라며 토쿠가와 후작을 설득해내어 그 중에서 2억엔을 끌어내 후지산 기슭에 평화연구소를 세워 츄우오오대학[中央大学]을 매수하자는 등, 꿈 같은 소리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아라타 칸손 저작집4-사회운동 쇼오와 전후』)” 또한 카토오 칸쥬우, 스즈키 모사부로오등 구일무계가 니시오, 미즈타니. 히라노등에 의한 신당결성의 이니셔티브에 대항해 ‘별도의 “마르크스주의적”인 정당을 만들지 어떨지를 협의’했던 것도 전해진다.(이나다 코오키[梁田浩祺] 『일본사회당』)


국가사회주의의 흔적


그런데, 전전 무산진영의 세 개의 원류중 하나, 이른바 신당 결성에 관계된 구 일노계의 행동은, 구 일무계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한층 곡절이 많았다. 이것은 구 일노계가 전전 전중, 대체로 국가주의에 기울어져 전쟁협력으로 기울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무산운동가중에서 국가사회주의를 신봉하고. 대정익찬체제를 지지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은, 물론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특히 일노계의 대세가 이러한 경향이 농후했다는 것은 부정 할 수 없다. 


태평양 전쟁의 입구라고 해야 할 만주사변(1931년 9월 18일)으로부터 8개월후, 사민당(사회민중당)의 아카마츠 카츠마로[赤松克麿]등은 히라노 리키조오등과 함께 일본국가사회당을 만들어(1932년 5월 29일), 때마침 국방체제강화의 가마꾼을 맡았지만, 한편으로는, 같은 해 7월(24일) 일본 최초의 단일무산정당으로 설립된 사회대중당(위원장 아베 이소오[安部磯雄]) 또한, 1934년 경부터 급속하게 국가주의로 기울어갔다(앞에서 언급한 ‘일본무산당’은 사회대중당의 이러한 흐름에 반발하여 탈당한 사람들에 의해 창당되었다). ‘일본혁명’을 ‘군부세력과 무산계급의 결합’에 의해 실현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했다는 것(아소오 히사시 전 간행위원회『아소오 히사시 전』)이 사회대중당, 특히 그중에서도 일무계였다. 그런데 전시중, 일무계 현직 중의원 중에서는 전시체제의 실력자 키시 노부스케[岸信介]를 사실상의 당수로 하는 호국동지회(1945년 3월 11일 결성)에 소속된 사람들도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키시 노부스케 그룹의 분열


키시 노부스케는, 전후 15년, 즉 1960년의 이른바 ‘60년 안보’를 마무리한 수상이다. 키시가 전전 혁신관료의 톱리더로 있던 만주국 경영에서 수완을 발휘했을 때, 토오죠오 [東条英機]내각의 상공대신․군수차관으로서 태평양전쟁을 수행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토오죠오 내각에 있으면서 '토오죠오 타도'로 나아가, 종전 5개월 전애는 '혁신'과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이른바 '키시 신당'인 호국동지회를 조직한다. 여기에도 아카기 무네노리[赤城宗徳], 후네다 나카[船田中], 이노 히로야[井野碩哉]등 전후보수세력의 중진이되는 사람들과 함께 미야게 쇼오이치[三宅正一], 스기야마 모토지로오, 카와마타 세이온 [川俣清音]등 일노계의 유력자도 포함되어있다.


‘60년 안보’게다가 안보개정을 둘러싼 자민․사회 양당의 격돌 속에서조차, 사회당의 카와마타 세이온이 수상 키시 노부스케와 개인적 왕래를 계속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키시 나카코[岸仲子](키시 노부스케의 맏며느리)는 이런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내가 자주 (수상관저에서) 부엌일을 하고 있으면 카와마타상이 맛있는 다시마 츠쿠타니(역주: 절임요리)를 만들어 주었다. 카와마타 상은 ‘집안이 들끓어서’라고 말하면서도 그 츠쿠타니를 비닐에 담아 가져다 주었다. …… 그 안보의 소동속에서, 카와마타상은 우리집의 뒷문에서 볼 수 있었다. 정말로 거기(뒷문)은 신문사의 사람들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키시 나카코 인터뷰)


중요한 것은, 일찍이 전시체제에 친숙해져있던 일노계의 정치가들이,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하여 신당결성에 어떻게 반응하고 있었는가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일본사회당 결성의 주도권을 쥐고있던 니시오등 사민계가, 일단 이 일노계의 사람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호국동지회의 일부 즉 후네다, 아카기등은, 이후 개진당 → 일본민주당 → 자유민주당으로 이어지는 일본협동당(1945년 12월 18일 창당)을 만들고, 다른 일부 즉 미야케, 스기야마, 카와마타등은 카와카미 죠오타로오, 아사누마 이네지로등과 함께, 니시오등 사민계에 의해 신당창당의 권유에 호응했다.


요컨대, 국가주의자 키시 노부스케의 휘하에 있던 사람들과 키시 그룹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은, 각각 일본사회당과 보수진영으로 분열해 갔다는 것이다. 전후 3년간 전법 용의자로서 새장속에 갇혀있던 키시가, 전후정치로 뛰어들면서 후술에 나오듯이 사회당의 일부를 포함한 보수신당 결성에 관심을 보이면서도, 사회당 분열(1951년 10월)후의 우파사회당에 스스로 입당을 타진하는 것은 이와 같은 맥락에 따르면 그다지 놀랄만한 것은 아니었다.(하라 요시히사 『키시 노부스케 - 권세의 정치가』)


대동단결로


일본사회당 발족에 이르는 과정에서, 전전 무산진영내의 우파와 중간파, 즉 구 사민계와 구 일노계가 비교적 이른시기에 뭉친 것에 비해 구 일무계 즉 마르크스주의에 가장 충실한, 게다가 반전으로 일관했던 좌파는 오히려 분열된 입장에 놓여져 있었다. 히라노 미즈타니와 ‘끊임없이 긴밀한 연락을 취해가면서 일심동체와 같은 협력으로 움직여나갔던’(니시오 『대중과 함께』) 니시오는, 당시를 돌아보며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이 사이 구 사민계와 구 일노계 안에서는, 카토오[加藤], 스즈키[鈴木]등의 구 일본무산당계는 배재해야 한다는 강한 의견이 있었지만, 처음 출발로는, 단일 사회주의 정당이 안된다면, 대중이 매력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는 게 미즈타니, 히라노 두 사람의 의견이었다. 나는 사민계의 의향을 어떻게든 고려했지만, 일무계는 소수파라서, 이를 억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두 사람의 의견에 찬성해, 좌파를 받아들이는 방침을 정했다.” ‘(좌파는) 억누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니시오의 방침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그 때부터 2년을 지나면서 보기 좋게 뒤통수를 맞았다.


니시오 스에히로와 하토야마 이치로오


“좌파를 받아들이는 방침을 정했”던 우파․중간파 주도의 신당구상은, 마침내 구체적인 창당준비의 단계로 나아갔지만, 이를 둘러싸고 먼저 두 가지 중요한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하나는 니시오, 미즈타니, 히라노 등이 일찍이 반 토오죠오의 입장에 있었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와의 사이에서, 패전후 서둘러 ‘신당’에 입을 맞춰 본 것이다. 그들의 경우는, 8월 20일이 지나 히라노가 하토야마로로부터 요청을 받아 니시오등에게 전달하여 실현된 것이다. 전시하인 1942년 4월에 있었던 익찬선거에서 비추천 당선의원은 ‘반 토오죠오’그룹을 만들었지만, 그 안에서 함께 싸웠던 하토야마, 사이토오 타카오[斎藤隆夫], 미키 부키치[三木武吉], 사사카와 요오이치[笹川良一]들과, 니시오, 미즈타니, 히라노 등이었다. '공통의 인연'도 있던 하토야마는, '정당을 만든다면 오히려 전전의 무산정당 세력도 포함시킨 진보적인 거대정당을 만들것을 고려해 손뼉을 마주쳐보자'는 것이었다(『하토야마 이치로오 회고록』).


하토야마에게는 우에하라 에츠지로오[植原悦二郎], 오오노 반보쿠[大野伴睦], 안토오 마사즈미[安藤正純]등이 배석하여 니시오등과 회담했지만, 하토야마의 ‘진보적인 거대정당’ 구상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이 회담에서 부서졌다. 하토야마등의 제안에 대한 니시오의 응답은 다음과 같았다. “우리 지도자 동지는 어른이면서 대국적으로 생각해주거나, 협조가 가능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등 뒤에 있는 많은 세력을 동의시킨다는 것은 꽤나 곤란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니시오 스에히로의 정치각서』) 결국 하토야마도, “아무레도 여러분들과 우리는 자라온 환경이 달라서 함께 하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르겠군”이라고 ‘판단을 내려’서, ‘이 이야기는 중단되어 버린 것’이었다.(『하토야마 이치로오 회고록』)


결국 니시오등 무산진영 우파는 중간파 이른바 일노계에 우선 제안을 해놓고, 그리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좌파와의 단결이 과제였지만, 실은 그 이전에, 후일 일본자유당 결성(1945년 11월 9일)로 나아가는 하토야마등 보수측과와 ‘합동’을 일축했던 것이다. 그러나 하토야마와 니시오는 똑같이 ‘정치적 여운을 남기고 해어졌다’(『니시오 스에히로의 정치각서』)고 회상하는 이 회담의 요지는, 이른바 반년 후에 떠오른 ‘하토야마 내각(하토야마의 공직 추방에 의해 불성립)으로의 연립문제’와 결국 그때부터 1년여 후의 보수측(민주당․국민협동당)과의 연립내각(카타야마 내각 - 1947년 5월)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토쿠가와 당수’ 구상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할 사건은 패전후 신속한 일본사회당 결성 과정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구체제의 후작인 토쿠가와 요시치카[徳川義親]나 백작 아리마 요리야스[有馬頼寧]를 당수로 세우려는 것을 획책했다는 것이다.


오와리 토쿠가와 가문의 19대 당주 토쿠가와 요시치카 후작은 일반에게는 ‘범사냥 도노사마[殿様]’(전전에 말레이반도에서 술탄과 호랑이 사냥을 했다)로서 유명하다. ‘친밀한 전우’인 우익의 이론적 지도자 오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등이 주도하는 3월 사건(1931년 3월 결행 예정의 쿠데타 미수사건. 육군 수뇌와 사쿠라회 급진파가 기획)에 ‘오늘의 5억에도 필적’하는 ‘20만엔’의 ‘혁명자금’ 제공을 승낙한 것이 바로 요시치카였다(나카노 마사오[中野雅夫] 『혁명은 예술처럼-토쿠가와 요시치카의 생애[革命は芸術なり‐徳川義親の生涯]』). 1936년 2.26사건, 이른바 육군반란군에 의한 쿠데타 사건에도 그의 모습이 보인다.


신기한 것은 전전 토쿠가와 요시치카가 군부‧민간우익의 ‘국가개조계획’을 지원하는 한편으로, 어쩐 일인지 카토오 칸쥬우[加藤勘十] 같은 무산진영의 사람들과도 접점이 있어왔다는 것이다. 그탓인지, 전기 아라타 칸손[荒田寒村]의 술회에서도 있는 것처럼, 패전후 곧 토쿠가와 주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모여들었다. 구일무계 스즈키 모오사부로오에 따르면, 토쿠가와와 ‘천하의 낭인[浪人]’ 후지타 이사무[藤田勇]의 발기로, 그리고 ‘후지타와 긴밀한’ 카토오의 ‘주선’도 있어서 구무산진영의 사람들에게 ‘사회주의신당’을 서로 이야기하기 위한 안내장이 발송되기도 했다(스즈키, 전게서).


이 안내장을 받은 것은, 카타야마 테츠, 니시오 스에히로, 아사무라 이네지로[浅沼稲次郎] 등 구 일노계, 스즈키 모사부로오, 아라타 칸손, 쿠로다 히사오등 구 일무계, 그리고 구 일농계의 히라노 리키조오, 등 ‘20여명’이었다(같은책). 토쿠가와저택에서 열린 8월 24일의 회합에서는 카타야마, 니시오, 카토오, 스즈키, 히라노, 미즈타니 쵸오사부로오등 10여명이 참석했지만, 주목할 것은, 그들이 새로운 사회주의정당의 당수로서 토쿠가와를 밀어주려는 것이었다(『정당연감 1947년』).


사회주의와 국가주의


그러나, 이 ‘토쿠가와 당수’ 구상은 얼마 못가 사라지게 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우파에서 좌파까지 그중에서도 군국주의에 거리를 두어 온 일무계와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자들 마저도, 전전부터 각종 군부․우익쿠데타에 관여한 토쿠가와에 먼저 다가가 신당문제에 그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토쿠가와 당수’가 흐지부지된 후에 떠오른 것은 ‘아리마 요리야스[有馬頼寧] 당수’였다. 토쿠가와와 같은 구화족(백작)으로, 전 대정익찬회 사무국장이라는 것이 아리마의 상징적 이력이었다. 아리마가 패전직후부터 접촉한 것중 하나는 구 일노계의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후네다[船田] 그룹이었다. 좋게 말해 아리마가 종전직후 ‘신당’에 얽혀 밀접하게 연락을 취한 것은 미야케 쇼오이치[三宅正一], 후네다 등 초기 ‘기시 신당’의 호국동지회를 중심으로하는 인맥이었다. 이토오 타카시[伊藤隆]의 연구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에게서 나온 ‘아리마 당수’는 아리마 주변의 반대도 있어 곧 사라졌다. 그러나 문제는 아리마가 ‘장래 통일무산정당과 후네다 일당[一党]을 결국 통합시키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이토오 타케시 「전후정당의 형성과정」, 나카무라 타카후사[中村隆英] 편『점령기 일본의 경제와 정치』 수록). ‘후네다 일당’이 구 일노계를 포함한 호국동지회(기시 신당)와 겹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리마의 이 구상은 그렇게 뜬금없다고만 할 수 없다. 또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본의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적 융통성”마저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어느쪽이든 국가주의, 통제경제론을 주장한 기시 노부스케와 사회주의자들, 군부․우익과 친밀한 관계였던 토쿠가와 요시치카와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대정익찬회의 거물 아리마 요리야스와 사회주의자들, 이들의 상관도를 그려보면, 이 사회주의자들이 구 사민계의 일부를 제외한 무언가의 형태가 마르크스주의의 세례를 받았다고 생각할 때, 적게는 일본의 마르크시즘 내지 사회주의와 국가주의와의 사이에는 상호왕복의 소지가 충분히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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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를 성장해 2000년대를 살고 있다. 사회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스스로를 역사학도라고 생각한다. 면식과 만화 수다와 어린이를 좋아한다.


  1. 일본사회당의 파벌

    일본사회당의 파벌 일본사회당의파벌.hwp 일본사회당의파벌v1.0.pdf 일러두기 - 이 문서는 니시카와 토모카즈西川知一, 카와다 준이치河田潤一등이 쓴 『정당파벌-비교정치학적연구政党派閥―比較政治学的研究』(1996, 미네르바서방ミネルヴァ書房)중 후쿠나가 후미오福永文夫가 쓴 6장 ‘일본사회당의 파벌’을 번역한 것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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