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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만화50년사, 제7장 청년지의 발간

posted Jan 2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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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청년지의 발간

공전의 만화 붐

60년대 발에 일본은 공전의 만화 분을 맞이 했다. 붐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잡지의 발간부수가 거대화 되는 것, 단행본의 판매가 증가한 것, 숫자상의 번영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또 광범위한 연령층에 만화가 침투했다는 의미에서 만화 붐이었던 것이다. 6장에서 다루었던 매니아잡지 창간도 그런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지금까지 전후 만화붐은 지금까지의 스토리만화의 발전상에서 구축되었다. 그 점을 재차 확인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먼저 독자의 문제가 첫째다. 40년대 후반에 태어난 소위 ‘단카이세대’는 이 당시 10대 후반에서 20대에 걸쳐있었다. 일관해서 만화의 독자로 계속 있었기에 그들은 그 연령대에 어울리는 만화를 구해 읽었다. 출판사의 측에서도 그런 요구에 부합해 만화분야의 개척에 노력한다. 그 결과 청년대상의 성인 대상의 잡지가 계속 탄생하게 된다. 『가로』(64년 창간), 『코믹매거진』(66년), 『주간 만화 액션』(67년), 『영 코믹』(67년), 『빅코믹』(68년), 『월간 플레이코믹』(71년), 『빅코믹, 오리지널호』(72년)등의 잡지가 새로 태어났다.

66년에 극화전문지 『코믹 매거진』을 창간했던 芳文社는 이제까지 성인대상의 오락거리를 중심으로 되어있던 『주간만화』, 『만화코믹』에서, 사이토우 타카오, 平田弘史등, 대본소 만화의 세계에서 자랐던 극화작가를 기용한다. 또한 67년 9월에 소년화보사에서 창간된 『영 코믹』에서는, 사이토우 타카오, 사토 마사아키, 소노다 미츠요시(園田光慶), 요코야마 마사미치(橫山まさみち)등과 같은 대본 극화작가에게 붓을 들게하고, 60년대 말부터 70년대 말에 걸쳐서 극화 신을 이끌어 나갔다.

기성잡지도 색을 바꾼다. 『주간소년매거진』과 『주간소년선데이』도, 그 독자대상을 소·중학생에서 방향전환하여 고교생, 대학생을 대상으로하는 잡지로 변신한다. 말하자면 『주간소년매거진』은 70년 표지에 당시 일러스트레이터로 인기 있던 橫尾忠則을 기용, 참신한 인상을 주었다. 표지의 로고에 있는 ‘소년’도 그 여운이 바뀌었다.

이런 잡지들은 각각 독자적인 노선을 가졌지만, 공통으로 되어있던 것은 극화를 다수 채용해 표현의 리얼리티의 연출에 힘썼다는 점이다. 이제까지 청춘영화와 야쿠자 영화, 그런 대중소설에서나 표현되었던 세계를 보다 시각적인 리얼한 허구화하여 보여준 것이다. 그 대표선수가 사이토우 타카오, 시라토 산페이, 미즈키 시게루(水木しげる), 가와사키 노보루(川崎のぼる)의 극화작가들이었다.

이 시기 무엇보다도 주목받았던 청년지·성인지는 몽키 펀치의 「루팡 3세」, 코이케 카즈오(小池一雄, 노이치 카즈오)작 코지마 코세키(小島剛夕)에 의한 「코즈레 오오카미(의역하자면 아이를 데리고 다니는 무사)」, 카미무라 카즈오(上村一夫)의 「동서시대」 도오쿠만 프로 「아, 꽃의 응원단」등의 화제작을 낳았던 『주간만화액션』(雙葉社), 및 사이토우 프로 작「고르고 13」, 이시모리 쇼타로(石森章太郎)의 「사부와 이치도리모노히카에(佐武と市捕物控)」, 데츠카의 「키리히토 찬가」, 「아야코(奇子)」등 일련의 작품을 연재했던 『빅코믹』(소학관)이었다. 또 매니아지로는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 「나사식」을 시작으로 하는 츠게의 작품을 실었던 『가로』(靑林堂), 데츠카 오사무의 「불새」,  이시모리 쇼타로 「쥰」, 나가시마 신지(永島慎二) 「후텐」을 연재했던 『COM』(사무 프로상사), 주간지로는 「내일의 죠」와 「게게게 키타로(ゲゲゲの鬼太郞)」의 연재가 계속되었던 『주간 소년매거진』(고단샤), 가 돋보였다.

요약하자면 독자의 성장과 만화문화의 성장이 매듭지어진 것으로서, 실제로 그런 계절이 찾아왔다는 뜻이다. 사회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60년대라고 하는 시대는 경제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활발한 계절이었고, 만화도 그런 문맥에서 받아들였던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ㅈㅓㄼ은이들의 동시대문화로서 애독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70년대에 들어서면, 사양화된 영화계가 눈을 들어 극화작품을 각색해 영화화했다. 東寶系에서는 「코즈레 오오카미」, 「그림자사냥」「고교생 무뢰공(高校生無頼控)」「고요키바(御用牙)」가, 도에이에서는 「전갈」,「와루 (惡)」「보디가드 키바」, 쇼치쿠(松竹)에서는 「동서시대」, 「花心中」등이 공개되었다. 특히 「동서시대」는 극화로 히트하고 또 영화의 인기도 대단해서, 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에 걸쳐서 ‘동서(同棲)’자체가 사회풍속으로 드러났다.

대학생이 만화를 읽는다는 풍속이 사회적으로 주목받는 것이 이 당시였다. 예를들면 대학생이 만화를 읽는 현상에 대해서 『아사히 저널』(65년 10월 28일)은 「대학생은 만화를 좋아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그 기사에서는 동경교육대학의 학생들 사이에서 『아사히 저널』에 만큼 강독률이 높은 잡지가『주간 소년 선데이』라고 소개하고, 대학생이 만화에 빠져있는 상황에 대해 戰中派 기자 입장에서 의구심을 표명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일반독자를 넘어서 평론가와 대학교수등의 인텔리도 주목하는 시기가 되고, 만화평론이라고 하는 주변의 분야를 더 활성화시켰다. 예를들면 이 시기 「만화의 신. 데츠카 오사무」(開高健『주간 아사히』64년 2월 21일), 「시라토 산페이의 만화발상, 닌자-사회모순의 재판자」(사토 타다오 (佐藤忠男) 『아사히 저널』64년 2월 16일)등의 평론문이 쓰여져 화제가 되고, 이에 더해 観見俊輔, 佐藤忠男, 石子順造, 天澤退一郞, 尾崎秀樹등의 지식인이 활발하게 만화를 논하고, 일반대중의 눈에도 만화문화 그 자체가 귀중한 무엇이다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지식인들의 극화논쟁

60년대 후반의 만화상황을 교과서적으로 정리하면 이상과 같은 뜻이지만, 이 중에서 만화에 얽혀있는 대본소라는 특수한 세계에 한정시켜던 과격하고 은밀한 표현이었던 극화가 대중앞으로 등장할 때, 단순히 기성의 만화작가만이 아닌, 만화를 지금까지 읽고 받아들였던 소화시켰던 사람들인 성인들에게도 반발이 생겨났다.

『극화私史30년』(84년 東考社)에서 사토 마사아키는 『아사히 예능』에 실린 「밤에 사는 짐승」이 호평 속에 끝난 뒤, 후속작의 의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돌연 중단한 경과를 회상했다. 기성의 성인만화작가들이 극화를 싣는 것에 항의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업의 만화가들에 의해서도 그럴 정도기 때문에 세간의 비난은 그보다 더 강력해져갔다. “양식”있는 구세대의 성인은 그러한 붐에 눈썹을 찌푸리고, 주간지등 대중잡지상에서는 이런저런 극화의 장단을 논하는 것으로 되어갔다. 그런 의논의 모양이 사건의 양상을 드러냈다.

여기서는 일반적인 주간지에서 전개되었던 극화의 시비론을 하나 들어 샘플로 하려고 한다. 그 예로서 당시의 의논의 어떤 형태를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73년 가을에 전개되었던 『선데이 마이니치』지상의 논쟁은, 신·구세대의 만화관의 차이를 잘 보여주는 논쟁으로서 조금 들어가 소개해보고자 한다.

『선데이 마이니치』지상의 논쟁은, 73년 10월 14일 호에서 시작되어 11월 11일 까지 5회 동안 계속되었다. 다분히 편집부가 짜고 쓴 기사의 분위기는 있지만, 논의 그 자체가 뜨겁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우선 10월 14일 호에서 「“죽어라 극화”파의 이론」이라는 특별기획이 편성되었다. 지면의 취지는 극화 따위는 퇴폐문화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교토대교수 會田雄次의 「저런 OX식 의 유치함을 드러내는 것이 우습다」라는 수기가 훗날 물의를 가져왔다. 會田은 극화가 ㅈㅓㄼ은 층을 중심으로 왜 인기가 있는지 말하자면 ‘전후일본이 오로지 유아성 지향교육이랄지, 유아성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을 받아왔기’때문이고, ‘지금 젊은층은 말하자면 사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인데, 더욱더 ‘이런 일본 사회는 현실만있던 성인측의 논리가 타락했다’라고 주장했다.

같은호에는 극화를 혐오하는 정치가와 문화인의 코멘트도 동시에 게재, 그 면면은 細田隆元, 松本淸張, 나메카와 미치오(滑川道夫), 小田內宏, 등 미리 답을 예측한 인선이었다.

이 기사에 반발했던 10월 21일호에서는 오시마 나기사(大島渚)가 철저하게 반론했다. 「어리석은 일등은 필요 없다. 극화야말로 현대의 대표예술이다 - 會田雄次씨에게 반론한다.」라는 타이틀로 아이다 유지(會田雄次)와 만화반대론자의 앙케이트 내용에 클레임을 걸었다. 67년에 「닌자무예첩」을 영상화했던 적도 있는 오시마뿐 아니라, 극화가 전공투세대에게 받아들여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반체제적, 비예술적측면이 찬양되었다.

곧이어 10월 28일호에는 콘도 히데조(近藤日出造), 스기우라 유키오(杉浦幸雄), 고바야시 하루오(小林治雄), 사토우 산페이등 풍속정치만화가의 재반론을 게재했다. 종래의 성인만화가들은 통속적인 극화가 주변부에서 안으로 들어와 좋을 것 같지만, 그들이 근성있는 중앙의 잡지에까지 진출하는 것은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콘도히데오는 「정말 가까이 하기 싫다. 어떤 그림이든 자신들에게 좋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고, 스기우라 유키오는 「만화는 극화에 조금도 잡아 먹히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만화와 극화는 전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서술한다. 고바야시 하루오도 「단지 관심이 없고 아는 것이 없습니다. 저의 일이란 정말 다른 분야의 일입니다.」라고 말한다. 사토우 산페이도 「극화는 “이야기”다. 소설과 친척이다. “만화”란 중심도 그림도 전혀 다른 분명한 타인이다.」 고 냉담했다.

요는 단지 읽는 것만 아니라 만화와 극화는 분명 다르고, 따라서 우리의 일이 빼앗긴 것은 결코 아니다. 사실 우리의 방식이 질이 높은 일이기 때문에 각각 다른 표현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은 무엇이든 빈약한 논의인 것이다. 같은 표현자임에도 불구하고 극화를 방패로 자신의 보수성을 표명하는 것으로 재차 기다리고 있다.

70년 9월에는 54년말부터 이어져 16년도 계속된 문예춘추의 『만화독본』이 휴간되었다. 그런 움직임을 전하는 70년 7월의 『아사히 신문』은 「에로와 극화에게 눈물을 삼키다」「붐의 원조, 붐의 패퇴」라고 제목을 실었다. 극화붐이라는 대조적인 결말이었지만 일반의 인식은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동정은 필요없다」(『아사히 저널』70년 7월 19일)는 것이었다. 극화의 성격보다도 그 이유는 메너리즘으로부터 오는 작품 수준의 저하에 보다 더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콘도와 고바야시들도 이런 『만화독본』의 휴간이 뇌리에 지워지지 않았다.

11월 4일호는 「극화론 제4탄! 극화가에게도 말하게 해주자」라는 제목이다. 극화의 당사자로 있는 타츠미 요시히로(辰巳ヨシヒロ), 마사키 모리(眞崎守), 코이케 카즈오의 코멘트도 실어 세대의 단층을 명백히했다. 타츠미는 극화표현이 초기의 가지고있던 독이 현재 사라지고 있는 실태를 우려하고, 마사키는 최근의 극화론이 자기혐오와 근친증오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원작자인 코이케 카즈오는 극화가 영화와 소설과 같은 모체의 하나로 10년 후 20년 후에는 뉴스를 극화로 알려낼지, 활자로 극화를 편성할지의 표현이 생겨날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 세 사람의 발언은 누구라도 흥미가 깊다. 특히 타츠미가 오늘날의 극화가 초기의 활력을 잃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는 것은 인기라고 일컬어지는 공동화를 간파한 탁견이었다.

이 잡지의 연재특집은 11월 11일의 「신문은 왜 극화를 싣지 않는가」라는 기사로 계속되지만, 이런 논의는 물론 결론이 드러나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서로 좋은 감정을 노정하는 것으로 지나지 않는다고 말 한다면 그뿐이지만, 어떤 의견의 상이함을 드러내는 것은 의미가 있다. 60년대말부터 70년대에 걸친 극화의 유행, 그것이 갑작스런 저널리즘의 무대로 출현했던 것이고, 독자의 지지를 얻어 대중화되는 노선을 선택한 것이다. 그런 시대의 움직임을 기록했던 것이다.

「아수라」사건

「아수라」사건

극화는 60년대라는 사회변동의 계절의 한가운데에서 시대의 분위기와 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어울리는 방식으로 독자에게 환영받아왔다. 그 결과 60년대 말 부터 70년대에 걸쳐서는 청년지의 창간과 함께 기성의 소년주간지 두 잡지도  독자의 등급을 업그레이드 시켰다. 실제로 『주간 소년 선데이』와 『주간 소년 매거진』은 청년지로서 성격을 더하여 갔다. 표현으로서의 만화가 비록 어린이 취향일 것만 같아도 실제로는 청년층까지 영향을 자유자재로 주었던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틈을 이용하여 순진한 어린이를 대상으로한 『주간소년점프』와 『데굴데굴 코믹』이 판매를 늘려갔다. 그렇게 변해가는 소년지에 얽힌 사건을 다음에 소개한다. 조지 아키야마(ジョージ 秋山)에 의해 「아수라」의 문제화로 작가자신 실종한 사건이다.

조지 아키야마는 모리타 켄지(森田拳次)의 어시스턴트를 거쳐 66년 「카이코츠 군」으로 『별책 소년매거진』에 대뷔했다. 그 뒤 『주간 소년 매거진』에 개그만화 「퍼트맨 X」를 67년부터 다음해에 걸쳐 연재 , 호평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제9회 고단샤아동만화상을 수상했던 아키야마는 이후 「허풍선이 동동」 「잔혹 베이비」등의 개그만화를 소년지에 연재했다. 그러나, 70년에 이르러 3월부터 『주간소년선데이』에 철저한 악의 주인공 蒲郡風太郞의 인생을 그린 「쩐의 분쟁」을 , 역시 같은해 8월부터 『주간 소년 매거진』에 가혹한 환경의 가운데서 인육마저 먹는 삶을 사는 남자의 이야기 「아수라」를 그려 광범위한 세간의 주목을 받게되었다. 주목이라는 것은 물론 부정적인 의미다.

특히 「아수라」의 잔혹한 묘사가 문제가 되었다.

이 작품은 혼세를 배경으로 먹을 것도 사는 곳도 없는 극한상태에서 살아나가는 인간의 삶이 그려져 있다. 이야기의 시작에서 기아의 가운데서 인육을 먹어 살아남는 한 사람의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임신한 것 같다. 여자는 출산을 한다. 그가 주인공인 아수라라고 불리는 아이다. 어미는 '무엇이든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구더기가 들끓는 사체를 가지고 와 구워먹는다. 그것만으로도 잔혹하지만 이야기는 더욱 쇼킹한 방향으로 전개되어간다. 어미인 여자는 먹을것이 결핍하게 되자 이번에는 자신의 아들을 구워먹으려 한다. 그러나 아수라는 화상을 입으면서도 살아난 가난한 농가에 간신히 도착해 쓰레기를 뒤져 먹는다. 그 뒤 그집에서도 여자가 죽어 父子가그 고기를 먹어 살아가고, 아수라가 또 그의 아들을 먹는다는 이야기가 연달아 계속된다.

이런 전개의 와중에 작가인 조지 아키야마는 살아가는 것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이 시기 조지 아키야마는 『주간 소년선데이』지상에서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한다」라는 주인공의 이야기 「쩐의 분쟁」을 그려 화제가 되었다. 사람의 악함을 그린 이야기 였다. 유기수은을 강에 흘리는 기업의 사장이라는 설정이 당시의 공해병 미나마타병을 떠올리게 해 주목을 받았었다. 그래서 이런 「아수라」였다.

비난은 그 잔혹묘사에 집중되었다.

우선 가나가와현 아동복지심의회가 7월 22일 문화재부회의에서 이 작품 제1회를 실었던 『주간 소년 매거진』 70년 8월 2일호(32호)를 유해도서로 지정했다. 가나가와현 안에서 18세 미만의 미성년에 대한 판매를 금지시키고 출판사인 고단샤에도 항의했다. 지정한 이유는 '잔인, 부도덕하고 범죄성이 있다. 비상식적인 동시에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준다'라는 것이다. 덧붙여서 이 70년에는 나가이 고(永井 豪)의 「파렴치 학원」이 미에, 후쿠오카 두 현에서 데츠카 오사무의 「자포자기 마리아」가 후쿠오카현에서 공격을 받았다.

계속해서 후쿠오카현 아동복지심의회가 「아수라」가 아직도 몇주간 연재가 계속되고 있다는 이유로 8월 16일호, 23일호 30일호를 유해물로 지정하고 나서 지사의 답변을 기다렸다. 이런 「아수라」에 이어 기왕지사 다른 만화도 잔혹묘사로 유해지정을 받게된다. 『주간소년매거진』16일호의 나가이 고의 「킥카이 군」의 고문장면과 23일의 마사키 모리 「배째다」의 살인장면이 그것으로 두 작품 모두 유해물로 판정받았다.

여기서는 오로지 「아수라」에 대해서만 살펴보겠다.

당시의 신문과 잡지는 실제로 떠들썩했다.

또한 70년 7월 23일의 『요미우리 신문』이 「잔인 만화 판매안함」의 제목의 기사를 보도했다. 6단 기사로 크게 실어버렸다. 같은 날 『마이니치 신문』도 사태를 보도, 다은날인 24일에 『요미우리 신문』은 「편집수첩」란에서 점점 변호하는 식으로 이 작품이 가는 길을 지켜본다고 썼다. 반대로 같은날의 『마이니치신문』의 「憂樂帳」란에서는 ‘의도마저 피한다면 무엇도 지나가게 놔둘수 없을 것이다.’라고 매섭게 대응하고, 26일의 『아사히 신문』 「天聲人語」란은 어린이의 흥미가 성인을 휘두르고 있는 것은 어린이와 성인의 세대간 전쟁이 시작된 것은 아닐까 라고 비교적 냉정하게 이 문제를 받아들이고 있다.

보도는 멈추지 않았다. 28일의 『요미우리 신문』은 독자의 투서를 특집으로 게재, 31일호는 심의회가 31일 고단샤에 자숙권고한 것을 보도했다. 8월에 들어서면 1일 『마이니치 신문』은 『주간 소년매거진』 8월 16일호에 실린 「아수라」도 잔인하다면 심의회가 고단샤로의 개선권고를 할 것이라고 전하고, 19일의 『아사히 신문』은 「오늘의 문제」란에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현대만화계의 실황을 알 수 있다고 말하고, 26일의 『야마나시 일일 신문』은 성인의 노력으로 어린이가 빠져버린 “만화의 열병”을 식히는 것이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곧 이어 27일 『아사히 신문』또 다음 28일의 『아카하타』는 먼저 눈에 띄는 것으로 새로운 『주간 소년매거진』의 8월 16일, 23일, 30일호가 각각 유해지정받는 것을 알리고 있다.

이상 신문을 중심으로 규제의 움직임과 기사의 추이를 살펴보았지만 어쨌든 그 반향이 커져갔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신문기사에서 「『구린 것은 흔들다』라는 것은 미안하다」(『주간 아사히』 70년 9월 11일)등의 주간지기사, 또는 교육잡지와 서적등의 모체를 포함한다면, 제법일 것이다.

이런 기사는 익명의 글도 꽤 게재되었다. 말하자면 문예평론가의아자키 호츠키(尾崎秀樹)는 「현대소년만화론」(『도쿄신문』70년 9월 16일)에서 「아수라」문제가 ‘이 만화상황에 대한 구세대의 생리적인 거부반응 말고는 아니다.’라고 해석하고, 「어린이만화의 퇴폐」(『주간독서인』 70년 9월 21일)에서 梶井純은 정말 다른 관점에서 이번 문제에 질문을 던진다. ‘조지 아키야마의 사상이 궁극적으로는 값싼 휴머니즘과 그것을 지배하는 교조적인 좌익사관으로 전면적인 신뢰가 별로 가지 않는다.’라고 하며 「아수라」를 졸작으로 평가절하했다. 작가인 사키 류조(佐木隆三)도 ‘식인이라는 공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또한 호흡이 얕기 때문에 빨리 사후처리에 고심한 장면이 무엇보다 기분이 좋지 않다. (중략) 그저 애써 “유해판정”을 받는 영광에 욕심냈기 때문에 실제로는 유해하지 않은 것이다. 때문에 말하자면 전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신문기사에는 그 잔혹묘사가 문제가 되었다지만 梶井과 佐木는 작품의 비유해성 그것이 문제라고 문제의 소재를 뒤집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소동의 이듬해, 작가인 조지 아키야마가 실종되었다. 71년 5월의 일이다. 연 수입 5000만엔의 입장을 버리고, 은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니시무라 시게오(西村繁男)의 『안녕, 젊은 청춘의 『소년점프』』에서 잡지 창간당시의 카이츠카 히로시(貝塚ひろし)의 실종사건이 회상되었는데, 당시의 인기만화가에게는 종종 있는 일 같다. 츠게 요시하루와 아즈마 히데오(吾妻ひでお)의 예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조지 아키야마는 초인기 작가였고 「아수라」라는 문제작을 집필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욱 화제가 되었다.

덧붙여서 아키야마는 실종직전 심경을 토로하는 작품 「고백」(71년 3월~5월 『주간 소년 선데이』)을 그렸다. 소설 같이 꾸민 작품의 라스트에서 작가는 ‘나는 정말 만화를 찾아서 방랑의 여행을 떠난다. 그때까지 은퇴다.’라고 결의를 썼다. 떠돌이 생활이 시작된 것은 2년후였다.

「노라쿠로」의 부활과 「쉽게 죽여!」차별 사건

그 뒤, 이 시기쯤 어이없이 패배한 문제를 어느 정도 언급하고자 한다. 하나는 戰前의 타가와 스이호(田河水泡)의 만화 「노라쿠로」가 『소년구락부』재평가의 움직임과 연결되어 복간되어, 그런대로 인기를 얻은 것 때문에 군국주의의 재래라는 비난을 받은 사건과, 다른 하나는 『장편 코믹』(호분샤(芳文社))에 게재된 近藤腥의 극화 「쉽게 죽여!」가 재일조선인의 차별을 조장하는 내용이라서 항의를 받은 사건이다.

우선 「노라쿠로」복간의 쪽은, 고단샤문화를 재평가하는 흐름 가운데에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66년부터 「메이지 100년 기념 · 고단샤 창업 60년 기념」이라는 타이틀의 재록본 『소년구락부걸작선』이 출판되었다. 다음 해 67년 3월에는 그 별권에 타가와 스이호의 『노라쿠로 만화전집』이 출판되었다. 평론가 인 이시코 쥰조石子順造은 「만화의 현황과 사상적 경향」(『前衛』67년 7월)에서 이러한 복간 움직임에 항의했다. 이시코에 의하면 복간에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본의 아동문화에 대해서 자유주의적 경향을 군국주의적인 경향이 짓밟은 과정을 기록한 부정적인 자료로서다.’또한 ‘그 부활은 무엇보다 제국군대의 생황의 부활 외에 다름 아니다.’라고 한다. 그러한 도식이 너무 단순하게 넘어가는 것에 반발한 것이, 아자키 호츠키, 이시코 쥰조,사토 타다오(佐藤忠男), 야마구치 마사오(山口昌男)등 이었다.

나도 한 번 이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생활자의 심정 - 「노라쿠로」의 골계와 비애」(『極光』5호 83년, 이후 『만화비평대계』 제1권에 수록, 89년 平凡社)에서 쓴 적 있지만 실제로는 「노라쿠로」라는 만화에는 역으로 체제비판적인 요소가 초반부에 내포되고 있다. 이시코의 글에서 단순하게 표면만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은 만화라는 통속적인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가장 졸렬한 방법말고는 없다고 생각한다.

『장편 코믹』지상의 近藤腥작 「쉽게 죽여!」가 가져온 문제의 쪽은 항의자측의 기사운영위원회로부터 「『장편 코믹』의 배외사상극화에 대한 항의의 과정」(『조선연구』 74년 4월)에서 기초자료와 함께 상세하게 다뤄지고 있는데, 그것을 함께 소개하겠다. 나 자신은 이 작품을 읽지 못했는데, 내용의 요약도 이 기사에 기초하여 한 것임을 미리 알려둔다. 「쉽게 죽여!」의 게재는 73년 7월 4일호, 내용은 북조선의 스파이를 괴멸시키려는 일본의 스파이 활동을 그리고 있다. 북조선적의 李紅玉은 일본 이름을 타니미야 사리(谷官サリ-)라고 한다. 그녀는 포르노 영화의 배우지만 본래 임무는 ‘일본에 잠입한 비합법 공작원의 연락책’으로서 ‘영화배우 외에 콜걸도 겸하고 있다. 밤에는 일본의 정계와 실업계의 거물들에게 몸을 주고’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임무다. 이 사리에게 일본의 스파이 児道豪가 북조선의 스파이라고 속이고 접근, 육체관계를 가져 북조선 스파이 조직 제283부대 대일 잠입 공작원 18명을 몰살하는 스토리다. 일본조선연구소 운영위원회는 6월 30일부로 항의를 호분샤에 전달했다. 그 취지는 ‘이것이 조선과 재일 조선인에 대한 악의에 가득찬 테마를 뿌려 일본인의 배외의식을 부추기는 의도의 작품으로 누구의 눈에도 명백한 것이다.’ 또한 북조선의 스파이의 계획이 음료수에 약제를 섞어 일본인의 두뇌를 미치게 하는 점은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의 원인이 되었던 테마로 아주 붕어빵인 것으로 소름이 돋는 것을 금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위원회는 편집장과 작가와 회담을 가졌다. 그 결과, 이 잡지에 사과를, 일간 『동경중앙스포츠』에도 동지의 광고와 함께 사과가 게재되었다. 『조선연구』의 기사의 후반에는 그 ‘사과’의 전문과 함께 호분샤 발행의 잡지 『장편 코믹』을 시작으로 『만화 코믹』, 『만화 펀치』, 『장편 극화』, 『주간 만화 TIMES』의 편집부에 대한 코멘트까지 수록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냄새나는 것에 뚜껑을, 항의하는 방법은 겉으로만의 반성을 만들어 냈을 뿐이지만, 이러한 문맥을 읽는 것만으로도 편집자측은 성실하게 대응했던 것으로 전하고 있다.

이상 청년지가 창간되고나서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친 사건을 보았다. 이 시기는 청년만화와 성인만화가 모두 활력에 가득찬 시기로서, 만화문화 그 것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었던 시기였다. 만화라는 것 득체의 알수 없는 에너지가 사회에 이러저러한 파문을 일으켰다. 몇몇 사건은 그러한 시대의 상황을 알게 해준다.

그 뒤 73년의 오일쇼크를 겪으면서 만화문화는 비대화에 다다른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실을 수반하지 못하고, 보이는 것만 발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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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를 성장해 2000년대를 살고 있다. 사회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스스로를 역사학도라고 생각한다. 면식과 만화 수다와 어린이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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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더기 2008.01.20 21:24
    일단 쓰는대로 추가해서 올리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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