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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만화50년사, 제6장 매니아지의 창간

posted Jan 1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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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매니아지의 창간

만화 매니아의 탄생

이 장의 타이틀로 잡은 「매니아誌」라고 하는 단어는 오해를 낳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낚시 만화, 오토바이 만화 등과 같은 취미의 전문지라는 뉘앙스가 있기 ㄸㅒ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는 아니다. 이 용어는 어디까지나 만화에 관계되는 매니아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또 낚시 만화의 전문지·오토바이 만화 전문지·로리콘 만화의 전문지 등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만화라는 문화 그 자체에 매니악하게 집착하는 잡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 것이 있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조금 상상하기 힘들지만, 소년기부터 만화를 읽어온 사람들이 청년기를 맞이하고 <문학청년>이 아니라 <만화청년>이 태두하게 된 시기, 1960년대에는 그런 잡지가 몇가지 창간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도 간행되고 있는 청림당 발행의 『월간만화 가로』(64년 창간, 이하 『가로』라고 표기)도 그 하나였다. 이 『가로』도 포함해서, 60년대 후반에 찾아온 공전의 만화 붐을 타고 만화라고 하는 표현 그 자체에 집착하는 잡지가 몇 가지정도 창간되었다. 이 장에서는 그 움직임을 추척해 보려고 한다. 다만, 이제까지처럼 사회적으로 문제시 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부상하지 않는다. 굳이 찾으라면 츠게 요시하루의 「나사식」에 세간이 주목한 것이, 사건이라고 말하면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방법이 다른 장과 밸런스를 잃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토리 만화나 극화의 태두가 만화독자의 저변을 넓혔고, 60년대 말에 매니악한 잡지까지 낳게 된다는 역사의 현실을 피해서 지나갈 수는 없으므로 여기에 한 장을 할애하도록 한다.

그러면 만화문화 그 자체에 집착한 잡지란, 만화표현 그 자체에 탐닉하는 잡지란 어떤 것이었는가. 먼저 지금 말한 『가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가로』의 창간

『가로』의 창간은 64(쇼와 39)년 9월의 일이다. 정확한 지명은 『월간 만화 가로』라고 한다. 출판소는 청림당. 나가이 마사카즈(長井勝一)가 편집을 맡았다. 나가이는 이제까지의 일본문예사나 삼양사등에서 대본만화의 출판에만 전념해 왔다. 그런 나가이가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을 연재하기 위해서 창간한 것이 『가로』였다. 나가이는 정말 좋은 만화를 게재하기 위해서는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열의가 지면에 집결된다.

아마도 그 대로 대본업출판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곧 나는 어떤 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대본만화에서는, 이제 돌아갈래야 갈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익숙하지 않은 잡지를 시작하게 된 것은, 과연 잘 될 것인가 하는 불안도 있었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라는 희망도 동시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채산문제를 별도로 친다면, 만화 월간지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사실에 내 자신이 불타고 있었다. 이 잡지에서 원하는 만화가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게 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더라도 나는 그 때, 아마도 처음으로 좋은 만화를 출판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가이 마사카츠 『「가로」편집장』82년 축마서방)

창간으로부터 수개월간은 시라토의 「자시키 와라시」「붉은 대나무」「구루 되돌리기」등의 단편을 실었지만, 같은 해 12월호부터 역사대작인 「카무이전」의 연재가 시작되고, 지식인이나 학생으로부터 대단히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쳐서는 시라토 이외에도 미즈키 시게루, 타키다 유우, 츠게 요시하루, 쿠스마사 타이라, 또한 개성적인 그림이 매력적이었던 林靜一, 사사키 마키들이 집필했다. 만화의 재미에 정통한 세대들로부터 애독자가 나오게 된다.

이 시기의 주목작은, 시라토의 「카무이전」외에, 「늪」(66년), 「붉은 꽃」(67년), 「나사식」(68년)등의 츠게 요시하루의 일련의 단편, 타키다의 「테라지마초 기담」(68년), 林靜一의 「적색 엘레지」(70년), 후루카와 「보라색 전설」(70년), 스즈키 「성냥 1개비의 이야기」(72년), 아베 신이치「아좌곡심중」(72년), 그 외에도 카와자키 유키오, 츠게 타다오, 나가시마 신지, 츠리타 쿠니코, 勝又進등의 제작품이 있다. 『가로』가 가장 충실했던 것은, 이런 작품이 게재된 60년대 후반으로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쳐서 포크송이 유행하고 앙그라극이 붐이 되고, 또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대상과 연결되어 있다.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반문화적인 표현으로써 주목받았던 것이다.

그 후 『가로』는 南神房들이 편집자가 됨에 따라 변모해 나가게 된다. 또 다른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와타나베 카즈히로, 유무라 테루히코 등, 말하자면 「헤타우마 족」, 거기다 사진가인 荒木經惟, 카피라이터인 絲井重里도 기고해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의 『가로』는 도회적인 센스를 가미한 젊은이들의 만화잡지로서 살아나간다.

다만, 현재의 『가로』는 명확하게 톤 다운되어 있다. 만화에서는 根本慶이 의기 왕성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잡지로써는 과거의 명작의 복각을 게재하거나, 만화 이외의 소재를 다루거나 하면서 모색하는 상태다. 창간으로부터 20년에 해당하는 84년에는, 「목조 모르타르 왕국』(청림당)이라는 기념책도 내는 등, 이미 『가로』는 역사의 유산이 되어 있다. 94년은 딱 창간한지 30년이 된다. 앞으로 자유로운 표현공간으로써 어떤 변모를 보여 줄 것인지, 긴 안목으로 지켜보도록 하자.

그런데, 이런 『가로』 게재작중에서 뭐니뭐니해도 화제는 시라토의 「카무이전」의 연재와, 츠게의 「나사식」을 필두로 하는 여러 작품이었다. 만화에 관한 사건이라고 하는 이 책의 테마와 연결해서 이야기하자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가로』게재의 츠게 요시하루 작품이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식인이 다양한 잡지에서 츠게의 작품을 발췌해서 예술이라고 칭찬하자, 정작 작가 자신은 그런 평가에 대해 당황한 나머지 붓이 둔해졌다는 사실까지 있어서 당시 화제를 뿌렸다. 67(쇼와 42)년 3월에는 츠게 요시하루론을 다수 게재한 만화 비평지 『만화주의』도 창간되어, 평론이라고 하는 차원으로까지 번성한는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 츠게 요시하루의 작품에 대한 평가의 흔적을 간단하게 쫓아가 보도록 하자.

츠게 요시하루 평가의 발자취

츠게 작품은 당시나 오늘날이나 다양하게 읽혀지고 있다. 몇 가지나 되는 방법으로 읽혀진 것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이야 말로 츠게 작품, 특히 「산숙어」「이씨일가」「붉은 꽃」「나사식」등, 60년대 후반에 그려진 단편의 재미라고 할 것이다.

츠게 작품에 대한 평가는, 먼저 60년대 후반에 石子順潮가 만화비평지 『만화주의』나 『가로』지상에서 전개한다. 『가로』68년 2월호의 「존재론적 반만화」에서는 「늪」이나 「산숙어」를 중심으로 이제까지의 만화의 이야기라고 하는 제도를 깬 그 창작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만화주의』동인인 梶井純이나 키쿠치 아사지로(현재의 야마네 사다오)에게도 츠게 작품에 대해서 쓴 문장이 있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아카세카와 겐페이가 「그 당시는 좌익 학생의 에너지가 빛나고 있다는 점에서 학생적인 언어가 유행하고 있었다」라고 회상하는 것처럼, 난해하며 자기표현적인 체질이 강한 것이 많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사토 타다오가 『가로』츠게 요시하루 특집호(68년 6월)에 쓴 「둔세의 은자의 예술」이나 타니카와 코이치가 『만화주의』7호(69년 8월)에 실은 「불수의 이미지『나사식』」쪽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전자는 여행자같은 방관적인 시점과 현실과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작가의 심상을 문제로 하고 있으며, 후자는 아마사와 타이지로의 분석을 비판하고 「풍경」이라고 하는 단어를 축으로 이미지의 당돌한 충격성을 지적하고 있다.

여하튼, 타니카와의 평론에 인용되어 있는 아마사와 타이지로의 문장이란, 『전망』의 69년 2월호에 실려있는 「츠게 요시하로 각서」를 말한다. 「나사식」의 이미지나 상징을 상세하게 추적하면서, 그 예술성을 조감하려고 한 것이다. 『전망』이라는 잡지에, 그것도 저명한 시인이 진지하게 만화를 논하고, 찬미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모았다. 자의성이 눈에 띄지만, 츠게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글이다.

같은 시기 『문예』 69년 3월호에서는 미술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우스케가 「만화로부터 안티 만화에」라는 글에서 츠게 작품을 거론하고 있다. 나카하라는 「나사식」이 「만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쓰고, 그 테마가 「말하자면 고향상실 -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뿌리의 상실이라는 테마」에 있다고 한다.

만화 비평지 『만화주의』1호(67년 3월)가 「츠게 요시하루 특집」을 싣고, 70년에는 청림당에서 평론집 『츠게 요시하루의 세계」가 나오는 등, 붐은 과열되어 있었다.

그 뒤 조금 있다 『월간 포엠』77년 1월호가 「특집 츠게 요시하루」를, 또 『에스토리아』창간호(81년 10월)가 「츠게 요시하루 특집」을, 「유리이카」82년 3월호가 「증간특집·츠게 요시하루 현대 만화의 최전선」을, 『방서월간』91년 3월호(2월)가 「특집 츠게 요시하루·책과 그 세계」라는 특집을 싣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의 그런 특집기사에는, 앞서 말한 『츠게 요시하루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열기는 사라지고, 냉정하게 과거를 확인하는 시점이 혼합되어 있다. 츠게 요시하루의 작품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60년대라고 하는 시대속의 사실이었다. 유년에의 회귀와 불안으로 연결되는 자기 표현적 체질, 여행이나 꿈속에서의 또 하나의 자신의 발견. 그것이 사람들의 심층을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바뀌지만, 『가로』의 71년 6월호부터는 아카세가와 겐페이(작가인 오즈지 카츠히코)의 「사쿠라 화보」의 연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로』가 최초의 연재지는 아니었다. 원래는 『아사히 저널』에 70년 8월부터 연재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최종회인 『아사히 저널』의 71년 3월 19일호가, 「사쿠라 화보」 제 31회째의 내용에 의해서 회수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문제가 된 작품은, 수평선의 저쪽에 「아사히 신문」의 로고가 표시되고, 그 위에 「붉은 붉은 아침해 아침해」라고 표시된 것이다. 난외에는 「아사히는 붉지 않으면 아사히가 아니다. 화이트 색의 아사히는 있어서는 안된다. 최소한 벚꽃색으로...」라는 코멘트가 실려있다. 또한 페이지의 중앙 위쪽에 「본지중대발표」로써 「사쿠라 화보」의 「포장지」가 바뀌며, 「앗하고 놀랄 제2차 잡아먹기를 결행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결의를 표시하고 있다. 앞의 코멘트와 함께, 이 표현이 회사에서 문제시 되었다. 아사히 신문사가 다른 신문사, 혹은 잡지사를 합병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해서 회수가 이루어졌다. 아카세가와가 의도한 것은, 『아사히 신문』의 체질을 비유해서 「사쿠라 화보」가 앞으로 새로운 포장지인 『가로』로 전환하게 된다는 유머를 섞어놓은 것이지만, 신문사가 속좁은 대응을 보인 사건이었다.

『가로』는 상업주의적인 색채가 희박한 작품을 다수 실었다. 팔리지 않더라도, 좋은 작품은 평가된다. 그런 만화 매니아에 대한 신뢰를 배후에 의식하고 있었다. 이 『가로』에 자극받아 만화의 전문지가 몇가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가로』의 창간으로부터 수개월 늦게 창간된, 타가와 스이호의 작품을 메인으로 갖춘 『월간 노라쿠로』(로만 서방)이며, 또 하나는 『COM』창간의 반년정도 지나 67년 8월에 창간된 야마카와 소지 편집의 그림 이야기 잡지 『WILD』(기술출판)이었다. 그러나 이 2개지 보다 당시 만화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고, 전위적인 지면제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은, 67년에 데츠카 오사무의 무시프로상사에서 만들어낸 『COM』이라는 매니아 잡지쪽이다. 『월간 노라쿠라』와 『WILD』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고, 다음으로 『COM』에 대해서 살펴보자.

『COM』의 창간

『COM』에는 상당히 깊은 추억이 있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가로』파라기 보다는 『COM』파였다. 『가로』에서는 츠게 요시하루의 작품에 깊이 빠져든 것이 아니라, 아베 신이치나 林靜一 등의 작품을 찾아서 페이지를 뒤적거리는 독자에 지나지 않았다. 「카무이전」보다도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되던 「카무이 외전」쪽이 훨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독자였다. 그런데 『COM』쪽은, 본지를 모두 즐겁게 읽었으며, 만화를 그리기도 했기 때문에 그 투고란인 「그라콘」에도 투고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사실은 본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먼저 『COM』의 개요를 살펴보자. 실은, 『COM』은 시차를 두고 두 시기에 간행되고 있다. 각각 제1차, 제2차라고 하자. 제1차는 67(쇼와 42)년 1월에 창간되어 71년 102월까지 이어지고, 모두 58권이 출판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COM』이라고 하면 이 시기의 것을 가리킨다. 제2차는 73년 8월에 또다시 동명의 잡지로 재간을 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단 한권으로 끝나고 만다. 양쪽 모두 B5판. 데츠카 오사무가 세운 무시프로상사에 의해서 만화 매니아용의 전문지로써 간행되었다.

제1차 『COM』은, 원래 데츠카의 팬 잡지인 『철완아톰 클럽』의 후속지였다. 그 때문에, 데츠카의 신연재「불새」(67년)외에 데츠카의 과거 작품의 복간, 작품 리스트 등 데츠카 관계의 작품, 기사가 많다. 『가로』의 얼굴이 시라토 산페이였던 것처럼, 『COM』의 얼굴은 데츠카 오사무였던 것이다.

데츠카의 「불새」이외에는, 이시모리 쇼타로(나중에 이시노모리 쇼타로로 개명)가 「준」(67년)을, 나가시마 신지가 「후-텐」(67년)을, 야마카미 타츠히코가 「인류전기」(68년)등을 싣고 있다. 모두 자기표현적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 채워져 있으며, 나중의 <만화청년>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필자도 그런 작품을 즐겨 읽었던 독자의 한사람이었다.

『COM』 은, 그런 이색적인 작품의 발표의 장이었던 동시에, 신인들의 등용문으로써의 역할도 겸비하고 있었다. 미야타니 카츠히코, 아오야나 유우스케, 오카다 후미꼬, 하세카와 호세, 야마다 무라사키, 모로보시 요시카게(나중에 다이지로로 개명), 타케미야 케이꼬 등의 신인이 여기서 성장한다. 권말에 배치된 투고란 「그라콘」을 통해서다. 그 외에는 토게 아카네, 사이토 지로, 오자키 히데키, 초삼신일 등에 의한 만화평론, 다양한 특집기사, 정보기사 등이 게재되어 만화 전문지로써 이채를 발하고 있다. 제1차 종료직후, 『COM코믹스』라는 청년지도 계속해서 내지만, 통속적으로 기울더니 폐간. 다시 73년 8월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호수도 새롭게 동명의 『COM』이 발행되지만, 1호를 내고 끝나 버린다.

이렇게 『COM』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거의 만화 소년들을 노예로 만들었던 『만화소년』의 존재가 연상된다. 『만화소년』이란 학동사로부터 47년 12월에 창간된 잡지로써, 데츠카 오사무의 「정글 대제」나 「불새」, 야마카와 소지의 「녹 아웃 Q」등이 연재되고 있었다. 『만화소년』은 그런 대작을 만들어 내는 것과 동시에 투고란에도 열을 올려서, 이시노모리 쇼타로나 아카즈카 후지오, 미즈노 에이꼬, 후지꼬 F 후지오와 후지꼬 후지오 A등의 재능있는 신인을 발굴했다. 『만화소년』은 55년의 가을에 폐간을 당하게 되지만, 『COM』은 그로부터 12년후, 비슷한 의식을 품고 창간된, 만화 매니아 전문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직접적으로는 『가로』를 대항지로써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COM』의 창간시의 표어는 다음과 같다.

COM-그것은 COMICS(만화)의 약칭 / COM-그것은 COMPANION(동료, 친구)의 약칭 / 그리고 COMMUNICATION(전달, 보도)의 약칭 / 즉 만화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만화가의 속마음을 전달하는 새로운 코믹 매거진 - 그것을 생각해서 우리들은 이 잡지의 타이틀을 「COM」으로 정했다.

그런데, 『COM』의 발행처인 무시프로상사에서는 68년 4월에 신서판 단행본인 「무시 코믹스」를 간행하고 있다. 「골든 코믹스」(소학관), 「다이아몬드 코믹스」(코다마프레스), 「선 코믹스」(아사히 소노라마) 등, 66년부터 시작된 신서판 형태의 단행본과 틀린 점은, 과거의 명작을 메인으로 갖추었다는 점이다. 스기우라 시게루의 『사루토비 사스케』, 카미다 토시꼬의 『후이칭씨』, 세키타니 히사시의 『스톱! 형』, 전곡추광 『로보트 삼등병』등 그리운 만화가 다시 독자 손에 넘어오게 된 것이다. 현재는 몇 개 출판사로부터 과거의 명작의 복간을 빈번하게 행하고 있으므로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로써는 드문 일이었고, 『COM』의 발행처다운 기획으로 보였다. 나중에 과거의 작품의 복각을 메인으로 삼은 「고단샤만화문고」(고단샤), 「사라문고」(이견서방)등이 나오지만, 그 선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위에서처럼 『가로』와 『COM』은 60년대 중반기부터 70년대 초기의 만화사를 장식한 잡지였지만, 그 잡지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180도 틀린 것이었다. 『가로』가 대본만화 세계의 혼탁한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면, 『COM』은 세련되고 스마트하다. 도시적 센스가 넘쳤던 것이다.

무시프로상사는 경영수완을 문제삼아 71년 6월에 데츠카가 사장직을 사임, 73년 8월에는 다액의 부채를 안고 도산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전문으로 하던 무시 프로덕션도 73년 11월에 도산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무시프로덕션의 노동조건은 상당히 안좋았던 듯 하다. 가혹했다. 일본최초의 30분짜리 TV애니메이션의 제작 이후, 상당히 하드한 스케쥴을 수행해 왔다고 한다. 또한 데츠카의 활력이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요구가 되어 나타나게 되어 매스컴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월간 노라쿠로』와 『WILD』

타가와 스이호의 작품을 메인으로 삼은 『월간 노라쿠로』(로만 서방)의 창간은, 『가로』창간의 2개월 후인 64년 11월의 일이다. 『가로』정도의 열기는 느낄 수 없지만, 만화 붐의 한 끝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여기에 기록해 둔다.

『월간 노라쿠로』에서 타가와는 「노라쿠로 조장」이나 「노라쿠로 사관후보생」등의 새로운 시리즈를 게재하고, 문하생인 타키다 유우, 야마네 아카키, 스기우라 시게루들이 작품을 싣고 있다. 또한 이 잡지는 과거의 명작 만화를 현대에 이어받는다고 하는 의식이 농후해서, 미야오 시게오의 「경단꼬치 만유기」, 데츠카 오사무의 「죄와 벌」, 宍戸左行의 「스피드 타로」등을 다시 싣는다. 또한, 평론가인 카타요리 미츠구가 만화사의 연재를 하는 등, 잡지의 구성으로서는 나중의 『COM』과 상통되는 요소가 있었다.

지면에서는 「노라쿠로 친구의 모임」에 대한 입회자를 모집하고 있다. 타가와 스이호의 팬클럽지로써의 성격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은 『COM』의 전신이 데츠카 오사무의 팬클럽지인 『철완 아톰 클럽』이었다는 점과 부합되어 흥미를 끈다.

『가로』정도로 화제가 되지는 않고, 오히려 시대의 추세에 등을 돌린 복고취미의 경향을 드러낸 전문지였지만, 이런 잡지가 창간되었다는 사실도 60년대라고 하는 시대의 재미를 나타내주고 있다.

그 후 『COM』이 창간되고, 잠시 후에 그림이야기 전문잡지인 『WILD』가 나온다. 67(쇼와 42)년 8월의 일이다. 68년 6월까지 모두 17책을 내고 폐간된다. 발행처는 기술출판주식회사, 발매처는 타이거 서방. 처음에는 월 2회의 간행이다가 나중에 월간이 되었다. B5판에 야마카와 소지가 편집과 발행을 담당한 이 그림이야기지는, 『가로』나 『COM』과 비교해보면 페이지수가 적다. 1호는 50엔, 52페이지로써 『월간 노라쿠로』와 체재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가로』나 『COM』등의 전문지 창간에 자극받아, 그림이야기의 재흥이라는 비원을 품고 나온 것이지만, 야마카와의 신연재 「바바리안」(1호-14호)이나 구작 「유령목장」(1호-17호), 「소년 케냐」(15호-17호), 「백경」(10호-17호) 혹은 코마츠자키 시게루의 삽화, 이시카와 규타의 만화 등을 싣다가 부수가 늘어나지 못한채 휴간하고 만다.

말하자면, 그림이야기의 시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세간의 주목을 끈 『가로』나 『COM』조차 경영적으로 결코 수월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만화 전성의 시대라고는 해도 너무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잡지의 실패로써, 이제까지 그림이야기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벌어들인 야마카와 소지는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만화평론의 등장

『가로』든, 『COM』이든, 또 『월간 노라쿠로』와 『WILD』든 간에, 만화의 매니악한 전문지는 각각그럭저럭 하나의 개성이 넘친 작가의 존재에 의해 지탱해나갔다. 시라토 산페이, 데즈카 오사무, 타가와 스이호, 야마카와 소지가 각각 얼굴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아카즈카 후이오 주최에 의한 『만화 No. 1』(71년 후지오 프로)와 사이토우·타카오의 『고릴라 만화맨』(61년 사이토우 프로), 츠게 요시하루를 메인으로 하는 『코믹 바쿠』(84년 일본문예사), 藤子不二雄 매거진 적 색채가 강한 『데굴데굴 코믹』(77년 소학관) 또는 『도라에몽 클럽』(94년 소학관)등도, 그 부류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그러나 의욕작과 문제갓의 게재에서 시대의 만화의 움직임을 리드한 신인을 다수 배출했다는 점은 『가로』와 『COM』보도 나은 것은 없다. 60년대의 공간의 만화 붐은 영업적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울 지라도, 그런 돌출했던 잡지들이 살아남게 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만화비평에 있어서도 이런 제기가 있었다.

60년대는, 만화의 창작도 과열되었디만, 새로운 만화비평이 활성화되었단 점도, 무시할수 없는 움직임으로서 기억된다. 자세하게는 권말의 연표에서 볼 수 있겠지만, 藤川治水의 만화론』의 간행이 67년, 같은 해에는 石子順造의 『만화 예술론』, 또 草森紳一(쿠사모리 신이치)의 『만화생각』이 간행되고, 이후 副田義也『매혹의 소년만화』(68년), 石子順造 외 『현대만화논집』(69년), 尾崎秀樹의 『현대만화의 원점』(72년), 佐藤忠男 『일본의 만화』(73년), 石子順(石子順造와는 다른 사람)의 『어린이 만화를 찬성한다』(76년)에 까지 계속되어갔다. 정말로 활기찼던 계절로 생각된다.

앞에서도 조금 다루었지만, 『만화주의』라고 하는 만화비평 계간지도 67년 3월에 창간되어 74년 4월 까지 계속된다. 이것은 石子順造, 菊地殘次郞, 梶井純, 權藤晋등이 창간했던 만화 비평지로, 츠게 요시하루, 미즈키 시게루, 시라토 산페이, 등의 극화를 중심으로 그 시대적 의미를 고민했다. 주요한 논문으로 菊地의 「시대성과 작가정신」(5호), 權藤의 「원래 극화는 생사를 그 본체로 한다」(6호), 石子의 「태평양전쟁과 만화가들」(8호)등이 수록되어있다. 13호에서 『야행』(北冬書房)으로 흡수되었던 것은. 새로운 시대의 움직임의 길은 아니었다.

60년대의 만화 붐. 만화청년의 배출과 연결된 만화매니아를 위한 전문지의 창간. 오늘날의 비대해진 만화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만화가 지금까지의 미디어에서가 아닌 표현의 폭과 활력을 주장했던 시기로서, 이러한 매니아지는 일부의 만화를 좋아하는 청년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만화로서 자기표현의 깃발을 내걸었던 ‘만화청년’들은 일부는 이러한 잡지의 세례를 받아, 70년대의 소녀만화, 에로만화, 청년지 만화의 주력작가가 되었다.

『COM』이 휴간된 이후 『Peke』(78년 미노리書房)과 그 후속지 『코믹 어게인』, 『漫金超』(80년 채널제로)등의 잡지가 창간되었다. 이러한 매니아 잡지를 손에 넣었을 때, 역시 『COM』은 살아남아있구나, 라고 당시 묘한 감상을 하게 되었다. 51년에 태어난 나는 『COM』의 시대에 만화가가 되기 위해 만화연습을 했었다. 개인적 체험을 말하자면 『가로』와『COM』이라는 하나의 시대의 현장을 형성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서 뇌리에 남아있다. 그러므로 시대는 다시 찾아갈 수 없는 길이 아닌 것이다.
제6장 매니아지의 창간

만화 매니아의 탄생

이 장의 타이틀로 잡은 「매니아誌」라고 하는 단어는 오해를 낳을 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낚시 만화, 오토바이 만화 등과 같은 취미의 전문지라는 뉘앙스가 있기 ㄸㅒ문이다. 그러나, 그런 의미는 아니다. 이 용어는 어디까지나 만화에 관계되는 매니아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또 낚시 만화의 전문지·오토바이 만화 전문지·로리콘 만화의 전문지 등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만화라는 문화 그 자체에 매니악하게 집착하는 잡지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런 것이 있는 것일까. 현재로서는 조금 상상하기 힘들지만, 소년기부터 만화를 읽어온 사람들이 청년기를 맞이하고 <문학청년>이 아니라 <만화청년>이 태두하게 된 시기, 1960년대에는 그런 잡지가 몇가지 창간되어 있었던 것이다.

현재도 간행되고 있는 청림당 발행의 『월간만화 가로』(64년 창간, 이하 『가로』라고 표기)도 그 하나였다. 이 『가로』도 포함해서, 60년대 후반에 찾아온 공전의 만화 붐을 타고 만화라고 하는 표현 그 자체에 집착하는 잡지가 몇 가지정도 창간되었다. 이 장에서는 그 움직임을 추척해 보려고 한다. 다만, 이제까지처럼 사회적으로 문제시 된 사건이라고 하는 것은, 표면상으로는 부상하지 않는다. 굳이 찾으라면 츠게 요시하루의 「나사식」에 세간이 주목한 것이, 사건이라고 말하면 사건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술방법이 다른 장과 밸런스를 잃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토리 만화나 극화의 태두가 만화독자의 저변을 넓혔고, 60년대 말에 매니악한 잡지까지 낳게 된다는 역사의 현실을 피해서 지나갈 수는 없으므로 여기에 한 장을 할애하도록 한다.

그러면 만화문화 그 자체에 집착한 잡지란, 만화표현 그 자체에 탐닉하는 잡지란 어떤 것이었는가. 먼저 지금 말한 『가로』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가로』의 창간

『가로』의 창간은 64(쇼와 39)년 9월의 일이다. 정확한 지명은 『월간 만화 가로』라고 한다. 출판소는 청림당. 나가이 마사카즈(長井勝一)가 편집을 맡았다. 나가이는 이제까지의 일본문예사나 삼양사등에서 대본만화의 출판에만 전념해 왔다. 그런 나가이가 시라토 산페이의 「카무이전」을 연재하기 위해서 창간한 것이 『가로』였다. 나가이는 정말 좋은 만화를 게재하기 위해서는 잡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열의가 지면에 집결된다.

아마도 그 대로 대본업출판을 계속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곧 나는 어떤 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대본만화에서는, 이제 돌아갈래야 갈 장소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익숙하지 않은 잡지를 시작하게 된 것은, 과연 잘 될 것인가 하는 불안도 있었지만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라는 희망도 동시에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 채산문제를 별도로 친다면, 만화 월간지를 만들어 낸다고 하는 사실에 내 자신이 불타고 있었다. 이 잡지에서 원하는 만화가들에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해보게 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더라도 나는 그 때, 아마도 처음으로 좋은 만화를 출판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나가이 마사카츠 『「가로」편집장』82년 축마서방)

창간으로부터 수개월간은 시라토의 「자시키 와라시」「붉은 대나무」「구루 되돌리기」등의 단편을 실었지만, 같은 해 12월호부터 역사대작인 「카무이전」의 연재가 시작되고, 지식인이나 학생으로부터 대단히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쳐서는 시라토 이외에도 미즈키 시게루, 타키다 유우, 츠게 요시하루, 쿠스마사 타이라, 또한 개성적인 그림이 매력적이었던 林靜一, 사사키 마키들이 집필했다. 만화의 재미에 정통한 세대들로부터 애독자가 나오게 된다.

이 시기의 주목작은, 시라토의 「카무이전」외에, 「늪」(66년), 「붉은 꽃」(67년), 「나사식」(68년)등의 츠게 요시하루의 일련의 단편, 타키다의 「테라지마초 기담」(68년), 林靜一의 「적색 엘레지」(70년), 후루카와 「보라색 전설」(70년), 스즈키 「성냥 1개비의 이야기」(72년), 아베 신이치「아좌곡심중」(72년), 그 외에도 카와자키 유키오, 츠게 타다오, 나가시마 신지, 츠리타 쿠니코, 勝又進등의 제작품이 있다. 『가로』가 가장 충실했던 것은, 이런 작품이 게재된 60년대 후반으로부터 70년대 초반에 걸쳐서 포크송이 유행하고 앙그라극이 붐이 되고, 또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시대상과 연결되어 있다. 시대의 정서를 반영하는 반문화적인 표현으로써 주목받았던 것이다.

그 후 『가로』는 南神房들이 편집자가 됨에 따라 변모해 나가게 된다. 또 다른 새로운 스타를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와타나베 카즈히로, 유무라 테루히코 등, 말하자면 「헤타우마 족」, 거기다 사진가인 荒木經惟, 카피라이터인 絲井重里도 기고해서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의 『가로』는 도회적인 센스를 가미한 젊은이들의 만화잡지로서 살아나간다.

다만, 현재의 『가로』는 명확하게 톤 다운되어 있다. 만화에서는 根本慶이 의기 왕성함을 보여주고 있지만, 잡지로써는 과거의 명작의 복각을 게재하거나, 만화 이외의 소재를 다루거나 하면서 모색하는 상태다. 창간으로부터 20년에 해당하는 84년에는, 「목조 모르타르 왕국』(청림당)이라는 기념책도 내는 등, 이미 『가로』는 역사의 유산이 되어 있다. 94년은 딱 창간한지 30년이 된다. 앞으로 자유로운 표현공간으로써 어떤 변모를 보여 줄 것인지, 긴 안목으로 지켜보도록 하자.

그런데, 이런 『가로』 게재작중에서 뭐니뭐니해도 화제는 시라토의 「카무이전」의 연재와, 츠게의 「나사식」을 필두로 하는 여러 작품이었다. 만화에 관한 사건이라고 하는 이 책의 테마와 연결해서 이야기하자면, 앞서도 언급했듯이 『가로』게재의 츠게 요시하루 작품이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지식인이 다양한 잡지에서 츠게의 작품을 발췌해서 예술이라고 칭찬하자, 정작 작가 자신은 그런 평가에 대해 당황한 나머지 붓이 둔해졌다는 사실까지 있어서 당시 화제를 뿌렸다. 67(쇼와 42)년 3월에는 츠게 요시하루론을 다수 게재한 만화 비평지 『만화주의』도 창간되어, 평론이라고 하는 차원으로까지 번성한는 시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 츠게 요시하루의 작품에 대한 평가의 흔적을 간단하게 쫓아가 보도록 하자.

츠게 요시하루 평가의 발자취

츠게 작품은 당시나 오늘날이나 다양하게 읽혀지고 있다. 몇 가지나 되는 방법으로 읽혀진 것이다. 읽는 사람에 따라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만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이야 말로 츠게 작품, 특히 「산숙어」「이씨일가」「붉은 꽃」「나사식」등, 60년대 후반에 그려진 단편의 재미라고 할 것이다.

츠게 작품에 대한 평가는, 먼저 60년대 후반에 石子順潮가 만화비평지 『만화주의』나 『가로』지상에서 전개한다. 『가로』68년 2월호의 「존재론적 반만화」에서는 「늪」이나 「산숙어」를 중심으로 이제까지의 만화의 이야기라고 하는 제도를 깬 그 창작에 높은 평가를 내렸다.

『만화주의』동인인 梶井純이나 키쿠치 아사지로(현재의 야마네 사다오)에게도 츠게 작품에 대해서 쓴 문장이 있지만,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아카세카와 겐페이가 「그 당시는 좌익 학생의 에너지가 빛나고 있다는 점에서 학생적인 언어가 유행하고 있었다」라고 회상하는 것처럼, 난해하며 자기표현적인 체질이 강한 것이 많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오히려, 사토 타다오가 『가로』츠게 요시하루 특집호(68년 6월)에 쓴 「둔세의 은자의 예술」이나 타니카와 코이치가 『만화주의』7호(69년 8월)에 실은 「불수의 이미지『나사식』」쪽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전자는 여행자같은 방관적인 시점과 현실과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작가의 심상을 문제로 하고 있으며, 후자는 아마사와 타이지로의 분석을 비판하고 「풍경」이라고 하는 단어를 축으로 이미지의 당돌한 충격성을 지적하고 있다.

여하튼, 타니카와의 평론에 인용되어 있는 아마사와 타이지로의 문장이란, 『전망』의 69년 2월호에 실려있는 「츠게 요시하로 각서」를 말한다. 「나사식」의 이미지나 상징을 상세하게 추적하면서, 그 예술성을 조감하려고 한 것이다. 『전망』이라는 잡지에, 그것도 저명한 시인이 진지하게 만화를 논하고, 찬미했다는 점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모았다. 자의성이 눈에 띄지만, 츠게 작품을 세상에 알렸다는 점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글이다.

같은 시기 『문예』 69년 3월호에서는 미술평론가인 나카하라 유우스케가 「만화로부터 안티 만화에」라는 글에서 츠게 작품을 거론하고 있다. 나카하라는 「나사식」이 「만화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생각한다」라고 쓰고, 그 테마가 「말하자면 고향상실 - 여러 가지 의미에서의 뿌리의 상실이라는 테마」에 있다고 한다.

만화 비평지 『만화주의』1호(67년 3월)가 「츠게 요시하루 특집」을 싣고, 70년에는 청림당에서 평론집 『츠게 요시하루의 세계」가 나오는 등, 붐은 과열되어 있었다.

그 뒤 조금 있다 『월간 포엠』77년 1월호가 「특집 츠게 요시하루」를, 또 『에스토리아』창간호(81년 10월)가 「츠게 요시하루 특집」을, 「유리이카」82년 3월호가 「증간특집·츠게 요시하루 현대 만화의 최전선」을, 『방서월간』91년 3월호(2월)가 「특집 츠게 요시하루·책과 그 세계」라는 특집을 싣고 있다.

그러나, 70년대 후반의 그런 특집기사에는, 앞서 말한 『츠게 요시하루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열기는 사라지고, 냉정하게 과거를 확인하는 시점이 혼합되어 있다. 츠게 요시하루의 작품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역시 60년대라고 하는 시대속의 사실이었다. 유년에의 회귀와 불안으로 연결되는 자기 표현적 체질, 여행이나 꿈속에서의 또 하나의 자신의 발견. 그것이 사람들의 심층을 흔들었다고 생각한다.

이야기가 바뀌지만, 『가로』의 71년 6월호부터는 아카세가와 겐페이(작가인 오즈지 카츠히코)의 「사쿠라 화보」의 연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가로』가 최초의 연재지는 아니었다. 원래는 『아사히 저널』에 70년 8월부터 연재되고 있던 것이었다. 그 최종회인 『아사히 저널』의 71년 3월 19일호가, 「사쿠라 화보」 제 31회째의 내용에 의해서 회수되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문제가 된 작품은, 수평선의 저쪽에 「아사히 신문」의 로고가 표시되고, 그 위에 「붉은 붉은 아침해 아침해」라고 표시된 것이다. 난외에는 「아사히는 붉지 않으면 아사히가 아니다. 화이트 색의 아사히는 있어서는 안된다. 최소한 벚꽃색으로...」라는 코멘트가 실려있다. 또한 페이지의 중앙 위쪽에 「본지중대발표」로써 「사쿠라 화보」의 「포장지」가 바뀌며, 「앗하고 놀랄 제2차 잡아먹기를 결행하게 되었습니다」라는 결의를 표시하고 있다. 앞의 코멘트와 함께, 이 표현이 회사에서 문제시 되었다. 아사히 신문사가 다른 신문사, 혹은 잡지사를 합병할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다고 해서 회수가 이루어졌다. 아카세가와가 의도한 것은, 『아사히 신문』의 체질을 비유해서 「사쿠라 화보」가 앞으로 새로운 포장지인 『가로』로 전환하게 된다는 유머를 섞어놓은 것이지만, 신문사가 속좁은 대응을 보인 사건이었다.

『가로』는 상업주의적인 색채가 희박한 작품을 다수 실었다. 팔리지 않더라도, 좋은 작품은 평가된다. 그런 만화 매니아에 대한 신뢰를 배후에 의식하고 있었다. 이 『가로』에 자극받아 만화의 전문지가 몇가지 생겨나게 된다. 하나는 『가로』의 창간으로부터 수개월 늦게 창간된, 타가와 스이호의 작품을 메인으로 갖춘 『월간 노라쿠로』(로만 서방)이며, 또 하나는 『COM』창간의 반년정도 지나 67년 8월에 창간된 야마카와 소지 편집의 그림 이야기 잡지 『WILD』(기술출판)이었다. 그러나 이 2개지 보다 당시 만화 청년의 마음을 사로잡고, 전위적인 지면제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게 된 것은, 67년에 데츠카 오사무의 무시프로상사에서 만들어낸 『COM』이라는 매니아 잡지쪽이다. 『월간 노라쿠라』와 『WILD』에 대해서는 나중에 보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고, 다음으로 『COM』에 대해서 살펴보자.

『COM』의 창간

『COM』에는 상당히 깊은 추억이 있다. 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가로』파라기 보다는 『COM』파였다. 『가로』에서는 츠게 요시하루의 작품에 깊이 빠져든 것이 아니라, 아베 신이치나 林靜一 등의 작품을 찾아서 페이지를 뒤적거리는 독자에 지나지 않았다. 「카무이전」보다도 『주간 소년 선데이』에 연재되던 「카무이 외전」쪽이 훨신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독자였다. 그런데 『COM』쪽은, 본지를 모두 즐겁게 읽었으며, 만화를 그리기도 했기 때문에 그 투고란인 「그라콘」에도 투고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사실은 본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먼저 『COM』의 개요를 살펴보자. 실은, 『COM』은 시차를 두고 두 시기에 간행되고 있다. 각각 제1차, 제2차라고 하자. 제1차는 67(쇼와 42)년 1월에 창간되어 71년 102월까지 이어지고, 모두 58권이 출판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COM』이라고 하면 이 시기의 것을 가리킨다. 제2차는 73년 8월에 또다시 동명의 잡지로 재간을 꾀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단 한권으로 끝나고 만다. 양쪽 모두 B5판. 데츠카 오사무가 세운 무시프로상사에 의해서 만화 매니아용의 전문지로써 간행되었다.

제1차 『COM』은, 원래 데츠카의 팬 잡지인 『철완아톰 클럽』의 후속지였다. 그 때문에, 데츠카의 신연재「불새」(67년)외에 데츠카의 과거 작품의 복간, 작품 리스트 등 데츠카 관계의 작품, 기사가 많다. 『가로』의 얼굴이 시라토 산페이였던 것처럼, 『COM』의 얼굴은 데츠카 오사무였던 것이다.

데츠카의 「불새」이외에는, 이시모리 쇼타로(나중에 이시노모리 쇼타로로 개명)가 「준」(67년)을, 나가시마 신지가 「후-텐」(67년)을, 야마카미 타츠히코가 「인류전기」(68년)등을 싣고 있다. 모두 자기표현적 색채가 강한 작품으로 채워져 있으며, 나중의 <만화청년>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다. 필자도 그런 작품을 즐겨 읽었던 독자의 한사람이었다.

『COM』 은, 그런 이색적인 작품의 발표의 장이었던 동시에, 신인들의 등용문으로써의 역할도 겸비하고 있었다. 미야타니 카츠히코, 아오야나 유우스케, 오카다 후미꼬, 하세카와 호세, 야마다 무라사키, 모로보시 요시카게(나중에 다이지로로 개명), 타케미야 케이꼬 등의 신인이 여기서 성장한다. 권말에 배치된 투고란 「그라콘」을 통해서다. 그 외에는 토게 아카네, 사이토 지로, 오자키 히데키, 초삼신일 등에 의한 만화평론, 다양한 특집기사, 정보기사 등이 게재되어 만화 전문지로써 이채를 발하고 있다. 제1차 종료직후, 『COM코믹스』라는 청년지도 계속해서 내지만, 통속적으로 기울더니 폐간. 다시 73년 8월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호수도 새롭게 동명의 『COM』이 발행되지만, 1호를 내고 끝나 버린다.

이렇게 『COM』의 역사를 살펴보면, 과거의 만화 소년들을 노예로 만들었던 『만화소년』의 존재가 연상된다. 『만화소년』이란 학동사로부터 47년 12월에 창간된 잡지로써, 데츠카 오사무의 「정글 대제」나 「불새」, 야마카와 소지의 「녹 아웃 Q」등이 연재되고 있었다. 『만화소년』은 그런 대작을 만들어 내는 것과 동시에 투고란에도 열을 올려서, 이시노모리 쇼타로나 아카즈카 후지오, 미즈노 에이꼬, 후지꼬 F 후지오와 후지꼬 후지오 A등의 재능있는 신인을 발굴했다. 『만화소년』은 55년의 가을에 폐간을 당하게 되지만, 『COM』은 그로부터 12년후, 비슷한 의식을 품고 창간된, 만화 매니아 전문지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직접적으로는 『가로』를 대항지로써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점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덧붙이자면 『COM』의 창간시의 표어는 다음과 같다.

COM-그것은 COMICS(만화)의 약칭 / COM-그것은 COMPANION(동료, 친구)의 약칭 / 그리고 COMMUNICATION(전달, 보도)의 약칭 / 즉 만화를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만화가의 속마음을 전달하는 새로운 코믹 매거진 - 그것을 생각해서 우리들은 이 잡지의 타이틀을 「COM」으로 정했다.

그런데, 『COM』의 발행처인 무시프로상사에서는 68년 4월에 신서판 단행본인 「무시 코믹스」를 간행하고 있다. 「골든 코믹스」(소학관), 「다이아몬드 코믹스」(코다마프레스), 「선 코믹스」(아사히 소노라마) 등, 66년부터 시작된 신서판 형태의 단행본과 틀린 점은, 과거의 명작을 메인으로 갖추었다는 점이다. 스기우라 시게루의 『사루토비 사스케』, 카미다 토시꼬의 『후이칭씨』, 세키타니 히사시의 『스톱! 형』, 전곡추광 『로보트 삼등병』등 그리운 만화가 다시 독자 손에 넘어오게 된 것이다. 현재는 몇 개 출판사로부터 과거의 명작의 복간을 빈번하게 행하고 있으므로 별로 놀랄 만한 일은 아니지만, 당시로써는 드문 일이었고, 『COM』의 발행처다운 기획으로 보였다. 나중에 과거의 작품의 복각을 메인으로 삼은 「고단샤만화문고」(고단샤), 「사라문고」(이견서방)등이 나오지만, 그 선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위에서처럼 『가로』와 『COM』은 60년대 중반기부터 70년대 초기의 만화사를 장식한 잡지였지만, 그 잡지가 갖고 있는 이미지는 180도 틀린 것이었다. 『가로』가 대본만화 세계의 혼탁한 이미지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면, 『COM』은 세련되고 스마트하다. 도시적 센스가 넘쳤던 것이다.

무시프로상사는 경영수완을 문제삼아 71년 6월에 데츠카가 사장직을 사임, 73년 8월에는 다액의 부채를 안고 도산한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전문으로 하던 무시 프로덕션도 73년 11월에 도산한다.

덧붙여 말하자면, 무시프로덕션의 노동조건은 상당히 안좋았던 듯 하다. 가혹했다. 일본최초의 30분짜리 TV애니메이션의 제작 이후, 상당히 하드한 스케쥴을 수행해 왔다고 한다. 또한 데츠카의 활력이 그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가혹한 요구가 되어 나타나게 되어 매스컴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월간 노라쿠로』와 『WILD』

타가와 스이호의 작품을 메인으로 삼은 『월간 노라쿠로』(로만 서방)의 창간은, 『가로』창간의 2개월 후인 64년 11월의 일이다. 『가로』정도의 열기는 느낄 수 없지만, 만화 붐의 한 끝을 드러내고 있으므로 여기에 기록해 둔다.

『월간 노라쿠로』에서 타가와는 「노라쿠로 조장」이나 「노라쿠로 사관후보생」등의 새로운 시리즈를 게재하고, 문하생인 타키다 유우, 야마네 아카키, 스기우라 시게루들이 작품을 싣고 있다. 또한 이 잡지는 과거의 명작 만화를 현대에 이어받는다고 하는 의식이 농후해서, 미야오 시게오의 「경단꼬치 만유기」, 데츠카 오사무의 「죄와 벌」, 宍戸左行의 「스피드 타로」등을 다시 싣는다. 또한, 평론가인 카타요리 미츠구가 만화사의 연재를 하는 등, 잡지의 구성으로서는 나중의 『COM』과 상통되는 요소가 있었다.

지면에서는 「노라쿠로 친구의 모임」에 대한 입회자를 모집하고 있다. 타가와 스이호의 팬클럽지로써의 성격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점은 『COM』의 전신이 데츠카 오사무의 팬클럽지인 『철완 아톰 클럽』이었다는 점과 부합되어 흥미를 끈다.

『가로』정도로 화제가 되지는 않고, 오히려 시대의 추세에 등을 돌린 복고취미의 경향을 드러낸 전문지였지만, 이런 잡지가 창간되었다는 사실도 60년대라고 하는 시대의 재미를 나타내주고 있다.

그 후 『COM』이 창간되고, 잠시 후에 그림이야기 전문잡지인 『WILD』가 나온다. 67(쇼와 42)년 8월의 일이다. 68년 6월까지 모두 17책을 내고 폐간된다. 발행처는 기술출판주식회사, 발매처는 타이거 서방. 처음에는 월 2회의 간행이다가 나중에 월간이 되었다. B5판에 야마카와 소지가 편집과 발행을 담당한 이 그림이야기지는, 『가로』나 『COM』과 비교해보면 페이지수가 적다. 1호는 50엔, 52페이지로써 『월간 노라쿠로』와 체재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가로』나 『COM』등의 전문지 창간에 자극받아, 그림이야기의 재흥이라는 비원을 품고 나온 것이지만, 야마카와의 신연재 「바바리안」(1호-14호)이나 구작 「유령목장」(1호-17호), 「소년 케냐」(15호-17호), 「백경」(10호-17호) 혹은 코마츠자키 시게루의 삽화, 이시카와 규타의 만화 등을 싣다가 부수가 늘어나지 못한채 휴간하고 만다.

말하자면, 그림이야기의 시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세간의 주목을 끈 『가로』나 『COM』조차 경영적으로 결코 수월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만화 전성의 시대라고는 해도 너무 무모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잡지의 실패로써, 이제까지 그림이야기를 통해 막대한 재산을 벌어들인 야마카와 소지는 경제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만화평론의 등장

『가로』든, 『COM』이든, 또 『월간 노라쿠로』와 『WILD』든 간에, 만화의 매니악한 전문지는 각각그럭저럭 하나의 개성이 넘친 작가의 존재에 의해 지탱해나갔다. 시라토 산페이, 데즈카 오사무, 타가와 스이호, 야마카와 소지가 각각 얼굴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아카즈카 후이오 주최에 의한 『만화 No. 1』(71년 후지오 프로)와 사이토우·타카오의 『고릴라 만화맨』(61년 사이토우 프로), 츠게 요시하루를 메인으로 하는 『코믹 바쿠』(84년 일본문예사), 藤子不二雄 매거진 적 색채가 강한 『데굴데굴 코믹』(77년 소학관) 또는 『도라에몽 클럽』(94년 소학관)등도, 그 부류에 들어갈지 모르겠다. 그러나 의욕작과 문제갓의 게재에서 시대의 만화의 움직임을 리드한 신인을 다수 배출했다는 점은 『가로』와 『COM』보도 나은 것은 없다. 60년대의 공간의 만화 붐은 영업적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울 지라도, 그런 돌출했던 잡지들이 살아남게 했던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만화비평에 있어서도 이런 제기가 있었다.

60년대는, 만화의 창작도 과열되었디만, 새로운 만화비평이 활성화되었단 점도, 무시할수 없는 움직임으로서 기억된다. 자세하게는 권말의 연표에서 볼 수 있겠지만, 藤川治水의 만화론』의 간행이 67년, 같은 해에는 石子順造의 『만화 예술론』, 또 草森紳一(쿠사모리 신이치)의 『만화생각』이 간행되고, 이후 副田義也『매혹의 소년만화』(68년), 石子順造 외 『현대만화논집』(69년), 尾崎秀樹의 『현대만화의 원점』(72년), 佐藤忠男 『일본의 만화』(73년), 石子順(石子順造와는 다른 사람)의 『어린이 만화를 찬성한다』(76년)에 까지 계속되어갔다. 정말로 활기찼던 계절로 생각된다.

앞에서도 조금 다루었지만, 『만화주의』라고 하는 만화비평 계간지도 67년 3월에 창간되어 74년 4월 까지 계속된다. 이것은 石子順造, 菊地殘次郞, 梶井純, 權藤晋등이 창간했던 만화 비평지로, 츠게 요시하루, 미즈키 시게루, 시라토 산페이, 등의 극화를 중심으로 그 시대적 의미를 고민했다. 주요한 논문으로 菊地의 「시대성과 작가정신」(5호), 權藤의 「원래 극화는 생사를 그 본체로 한다」(6호), 石子의 「태평양전쟁과 만화가들」(8호)등이 수록되어있다. 13호에서 『야행』(北冬書房)으로 흡수되었던 것은. 새로운 시대의 움직임의 길은 아니었다.

60년대의 만화 붐. 만화청년의 배출과 연결된 만화매니아를 위한 전문지의 창간. 오늘날의 비대해진 만화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지만, 만화가 지금까지의 미디어에서가 아닌 표현의 폭과 활력을 주장했던 시기로서, 이러한 매니아지는 일부의 만화를 좋아하는 청년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만화로서 자기표현의 깃발을 내걸었던 ‘만화청년’들은 일부는 이러한 잡지의 세례를 받아, 70년대의 소녀만화, 에로만화, 청년지 만화의 주력작가가 되었다.

『COM』이 휴간된 이후 『Peke』(78년 미노리書房)과 그 후속지 『코믹 어게인』, 『漫金超』(80년 채널제로)등의 잡지가 창간되었다. 이러한 매니아 잡지를 손에 넣었을 때, 역시 『COM』은 살아남아있구나, 라고 당시 묘한 감상을 하게 되었다. 51년에 태어난 나는 『COM』의 시대에 만화가가 되기 위해 만화연습을 했었다. 개인적 체험을 말하자면 『가로』와『COM』이라는 하나의 시대의 현장을 형성했다는 것은,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서 뇌리에 남아있다. 곧 그런 시대가 다시 돌아오지 못하라는 법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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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를 성장해 2000년대를 살고 있다. 사회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스스로를 역사학도라고 생각한다. 면식과 만화 수다와 어린이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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