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

홈스봄 <자본의 시대> 요약

posted Oct 15, 2016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2004년경에 쓴 글임. 다른게시판에 10년전에 올렸던게 제대로 출력이 안되어서 다시 올려봄.

 

 

자본의 시대 1848~1875
에릭 홉스봄

요약

1부 혁명의 서막

1장 여러 국민들의 봄

1.

1848년 혁명은 최초의 본격적인 세계혁명이자 마지막 세계혁명이었다.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가장 실패한 혁명이었다. 혁명으로 인해 유럽은 전환은 했으되 혁명적으로 전환하지는 않았다.

2.

혁명은 유럽을 혁명적인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구분시켰다. 그것은 역사-사회적 경제적 구조-와 정치로 구분되는 것이다. 유럽의 서부와 동부는 농민계층의 상태, 중산계급의 성격에서 차이를 보인다. 특히 중부유럽(프로이센->이탈리아 북부)은 어떤 의미에선 혁명지역의 핵심부를 이루고 있는데 여기는 선진·후진지역의 특징이 복합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대게의 쟁점은 국가의 정치적·사회적 내용만이 아니라 국가의 형태나 국가의 존재 그 자체였다. 독일·이탈리아 등이 통일국가건설의 문제와 씨름하고 있었다. 이것은 독일·이탈리아 민족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밖의 민족들까지 포함되는 문제였다. 혁명지역의 도처에서 정치는 다차원·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급진파는 단순 명료한-어디서건 단일한 중앙집권적 민주공화국 수립-이라는 방안을 취했다. 온건파는 사회혁명과 동일시하게 생각한 민주주의의 공포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혁명에 의해 무력해지기는 했어도 폐위당하지 않고 자리를 지킨 어느 왕을 설득하여 그 훌륭한 대의를 지지할 수 있겠냐는 것이 문제였다. 급진파는 소독일주의, 온건파는 대독일주의로 구분된다. 하지만 혁명정세의 긴박함이 그런 고민과 논쟁을 소모적으로 만들었다.
이들 혁명의 공통점슬 살펴보자. 1) 혁명 모두가 일단 성공했으나 재빨리 그리고 대부분 전면적 실패로 되돌아갔다. 2) 그 특징적 목적들이 결국 달성되었지만 그것들은 혁명에 의해서, 혁명적 맥락 속에서 달성되지는 않았다. 그런 열망을 받아들여 그것을 전진 시키게 될 운동은 1848년의 것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3) 노동빈민들의 사회혁명이었거나 그것을 예상케 하는 혁명들이었다. 때문에 온건한 자유주의자, 심지어 급진적 민주주의자들까지도 겁을 먹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혁명을 주도한 것이 그들이었다. 겁을 먹은 온건파들은 하나둘씩 혁명의 대열에서 이탈해나갔다. 이렇게 하여 1848년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세력연합의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간의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므로 혁명은 급진파의 힘이 강하고 민중운동과도 튼튼하게 결합되어 온건파를 압도 할 수 있거나 온건파의 힘없이도 해낼 수 있는 곳에서만 그 기세를 유지 할 수 있었다. 그런 상황은 대중의 동원을 계속적으로 필요로 한 민족해방이라는 목표가 결정적 쟁점이 되는 곳에서 가장 가능성이 컸다.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혁명이 오래 지속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외압, 합스부르크나 프랑스등 주변국의 압력으로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다.
혁명은 이처럼 어디서나 패퇴했다.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 혁명이 부르주아지의 재산에 위협을 가하자 그들은 질서와 손을 잡았다. 그 대신 이로 인해 부활한 보수체제는 정치적 후퇴를 의미하지는 않는 한 사업가들에게 경제적 자유주의, 문화적 자유주의마저도 양보하는데 인색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하여 혁명을 거친 수 서유럽의 자유주의자들이 두 가지 중요한 발견을 하였다. 1) 혁명은 위험하다. 2) 그들의 요구사항들 중 어떤 것들(대게는 경제)은 혁명 없이도 실현 가능하다는 것.
급진적 하층·중류계급을 대변하거나 지도하는 자들은 지식인, 특히 젊고 주변적인 처지에 있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들은 대체로 민주좌파의 입장에 섰다. 이들이 주도적인 것은 그나라 중산층의 문자해독능력에 의해 특징지어진 후진국들이었다. 1848년 혁명에서 지식인이 더 두드러진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눈에 띄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으로 장인(匠人)들의 전통적 생활양식이 파괴됨에 따라 분출된 진정하고 순수한 급진주의와 달리 지식인들의 급진주의는 뿌리 깊은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교육에 따른 적절한 사회적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데서 그 급진주의가 출발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극단적인 좌우를 오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흔들흔들 동요한 것 뿐 이었다.
노동인민은, 조직도, 성숙도도, 지도력도 없었다. 사회혁명의 위협으로 적을 겁먹게 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대도시에서 어울리지 않는 큰 힘을 발휘했다. 이것 때문에 그들이 지닌 몇 가지 중요한 점들이 가려졌다. 1) 수적으로 부족했다. 2) 정치적·이데올로기적으로 미숙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진 잠재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조악하기는 했지만 1848년 혁명은 공산주의가 최초로 정치적 무대에 등장한 시기였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그 추종자들마저도 구체적 청사진은 가지지 못했다. 이리하여 혁명은 파도처럼 솟구치다 깨어지면서 신화와 약속 말고는 남긴 것이 거의 없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어야 했지만 그들은 혁명으로부터 몸을 뺐다. 혁명의 영웅들은 대부분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다시는 등장하지 못했다.
하지만 1848년이 단순히 아무 중요성도 없는 짤막한 역사의 에피소드였던 것은 아니다.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지만, 그 변화는 꽤나 뿌리 깊은 것이었다. 적어도 서유럽에서는 전통적인 군주정치가 종언을 고했다. 사회질서를 수호하려는 자들은 민중의 정치학을 배워야했다.
이런 정치적 혁신중 가장 극적인 것은 프랑스 - 나폴레옹 3세의 등장이었다. 그의 등장은 노동자들이 부유한 자들의 공화국에 반대하여 그에게 표를 몰아주었기 때문이다. 루이 나폴레옹은 대부르주아의 편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소부르주아의 편으로 보였던 것이다. 이는 보통선거에 의한 민주주의가 사회질서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불만에 한 대중이 반드시 사회전복을 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교훈이다. 1848년 혁명이 패배하면서 대중은 담시 시야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르나, 다시 나타났을 때는 그들에게 전혀 공감하지 않았던 정치가들의 행동까지도 좌지우지 하게 되었다.(대중정치의 등장)


2부 전개과정

2장 대호황

1.

1848년의 정치적 요구들은 큰 정치적 동란 없이 70년 동안 서서히 실현되었다. 그것이 20세기 후반까지 그간의 파국적인 충격(20세기 동안)을 견디게 해준 것은 1848년부터 70년대 초에 일어난 경이적인 경제적 변화에 있다.
48년 혁명은 고전적 경제위기, 작황과 절계(節季)에 따른 경기 변동 중 최후·최대의 것이었다. 그러나 순수하게 자본주의적 견지에서 보면 그것은 매우 활기 있는 상승세 경기곡선이 다시 치솟기 전 잠시 고개를 숙인 것에 불과했다.
저렴한 자본과 인플레이션, 이 두 가지가 겹쳐서 호황은 이윤에 굶주린 사업가들에게 매우 흡족한 것이 되었다. 이득은 사업자들만의 것이 아니었다. 유럽과 해외 양편에서 고용역시 비약적으로 급증했고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移住를 했다. 곡물가격은 급상승했지만 높은 고용률과 간혈적인 임금인상으로 민중들의 불만의 칼날도 많이 무뎌졌다.
이 호황의 정치적 귀결은 그 중대성이 헤아릴 수 없이 컸다. 그것은 혁명으로 흔들린 정부들에게 더 없이 귀중한 여유를 주었고, 반대로 혁명가들에게는 그 희망을 박살나게 했다. 오랜 군주국 및 公國에게는 정치적 치욕을 위한 시간을 주었고, 이제는 그 왕조의 정통성 이상으로 중요해진 안녕과 번영이라는 정통성을 주었다.
이 평온한 시대는 1857년의 불황으로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이 시기는 자본주의적 성장의 일시 중단일 뿐, 다시1860년대의 성장과 더불어 1871~73년의 대호황으로 그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불황은 정치정세에 전환을 가져왔다. 혁명가들은 1848년의 再版을 기대했지만 이는 실망으로 끝났다. 하지만 정치학은 되살아나 자유주의 정치의 모든 현안 문제들이 다시금 토론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경제는 계속 호황이었고(일시적이고 산발적인 불황들이었지만) 정치학은 이미 혁명의 정치학이 아니었다.

2.

자본주의적 승리의 시대는 자축의 거창한 예식인 만국박람회로 시작되었고, 그것에 의해 그때마다 강조되었다. 이 같은 눈부신 진보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19세기의 전반동안 경제성장에 조응하지 못한 시장의 성장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성장의 전망에 위기를 느끼게 했다. 두 가지 이유로 이런 희망(革命家)과 우려(資本家)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 이유는 기차의 발명과 근대적 생산수단에 적합한 교통·통신의 발선(철도·전신)으로 인해 자본주의 경제의 지리적 범위가 급격히 확대될 수 있었던 사실이다. 확장된 하나의 세계를 창출한 것이 이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태의 발전이다.
이 시대는 대항해시대처럼 극적인 발견이나 군사적 정복은 없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새로운 경제세계가 구세계에 첨가되고 통합되었다. 대량소비경제란 아직은 미래의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새 산업시설, 운수사업, 공공시설과 도시의 건설에 필요한 물자의 거대한 횡적 시장확대가 필요 불가결했다. 팔리는 것은 무엇이든-아편 등 수입국에서 제제와 저항을 받는 것까지- 팔았다.
이 시기 신대륙의 대규모 금유입을 살펴보자, 이는 자금경색을 제거시키고, 이자율 저하, 신용의 확대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 역할은 오늘날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최소한 세 가지는 확실하다. 1) 물가상승, 인플레이션에 꾸준한 영향을 주었다. 19세기는 전반적으로 디플레이셩의 경향을 보인다. 디플레이션이 자본가와 노동자에게 큰 타격이나 이익을 주지는 못했지만 인플레이션은 자본의 이윤폭을 넓혔다. 2) 영국의 화폐, 파운드에 기반한 안정되고 믿을 수 있는 통화기준을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통화기준이 없으면 국제무역은 어렵고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해지는 법이다. 3) 골드러쉬 자체가 태평양 주변에 매우 활동적인 경제영역을 개척하게 해주었다.
사기업의 자유화는 곧 경제적 자유주의였다. 생산 요소와 자유로운 활동을 막는 제도적 장벽들은 자유주의의 정치적 위세와 상관없이 철폐되어나갔다. 부활한 절대군주국들에서 장벽의 철폐가 과감해진 것은 없앨 것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그중 눈길을 끄는 것은 전면적인 무역자유화의 경향이다. 노사관계에서도 비경제적 강제는 후퇴하였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매매도 오직 시장만이 결정하게 된 것이다. 이 방대한 자유화 과정은 사기업을 북돋아주었고 이것이 경제확장을 촉진했다. 다만 공식적 자유화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는데, 오늘날 통제되어있는 자본-노동간의 국제적 자유이동, 즉 이민은 당시 아주 자연스런 것으로 이에 논쟁거리도 되지 않았다.
한편 경제발전을 조성하거나 저해하는데 제도적 법률적 변화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의 문제는 단순하지 않다. 확실한 것은 자본주의적 발전을 위한 다른 기반들이 마련되지 않았을 때 자유화 그 자체로는 별다른 성취를 이루어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경제적 자유주의는 적어도 1세대 동안은 정당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강력한 노조의 허용이나 노동계약의 자유마저도 이윤에 위협이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른바 노동예비군의 임금이 적절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영국이외의 지역의 국제적 자유무역의 열의였다. 영국의 경우 국제적 자유무역이란 1) 세계 모든 시장에서 다른 나라들 보다 더 싸게 물건을 팔수 있다는 것 2) 저개발국을 부추겨 식량과 원자재들을 싸게 대량으로 들여와 그 수입으로 영국제품을 사게 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영국의 경쟁국들(미국은 제외)은 왜 이 불리한 협정을 받아들였을까? 이들에게는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1) 세계경제의 확대는 영국뿐 아니라 선진공업경제모두에게도 혜택을 베풀었다. 타격받는 분야가 있어도 그렇지 않은 다른 분야들이 있었다. 2) 어떤 경쟁관계든 이 단계에서는 영국의 설비, 자원, 기술에 의존한다는 이점이 뚜렷했다.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은 공업을 억제한 것이 아니라 촉진시켰다.(특히 철강, 기계류)

3.

이 시기 공업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지극히 뻔한)만큼이나 더 중요한 것은 공업화가 지역별로 불균등하지만 지리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철도와 기선의 보급이 모든 대륙에 기계력을 도입하게 되어 그것이 없었으면 공업화하지 못했을 나라까지도 공업화를 가능하게 했다.
철도의 도래는 그 자체가 혁명적 상징이자 성취였다. 철도는 세계를 상호작용하는 단일한 경제체제로 합치게 했는데, 이 단일 경제체제의 출현은 공업화의 가장 크고 넓게 빛나는 측면이었다. 그러나 의미심장한 것은 주요산업중심권들 사이에서 드러나는 발전의 불균등성이었다. 벨기에는 규모는 작았으나 비교적 중요했다. 영국은 성장둔화에도 그 상대적 지위를 계속 유지했다. 미국의 산업팽창은 비상했지만 독일이 더 눈부셨다. 독일 공업화는 정치적의미도 중요했다. 산업발전이 가져오는 정치적 귀결은 어느 때보다도 중대한 것이 되고 있었다. 이후 어느 나라도 工業발전 없이는 열강의 대열에서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시대의 특징적인 산물인 철과 석판의 결합물인 철도가 시대의 눈부심 상징이 되었다. 공업화의 첫 단계에서 가장 전형적 산물인 섬유는 상대적으로 성장이 더디었다. 그러나 새로운 重工業이 당래의 혁명적 기술을 가능하게 했지만 이시기엔 규모를 제외하고 특별히 혁명적일 것은 없었다. 크게 보아 1870년대 까지의 産業革命은 1760~1840년의 기술 혁신에 기반하고 있었다. 하지만 19세기 전반의 몇 십 년 동안에 훨씬 더 혁명적인 기술에 바탕을 둔 두종류의 공업-화학공업과 전기공업- 이 발달하게 되었다. 초기 공업화는 고급과학지식을 필요로 하지 않았지만 19세기 중반이후는 점점 그렇지 않게 되었다. 나아가 연구실험실은 산업발전에 필수 불가결한 일부가 되었다. 점점 더 큰 意味를 가지게 된 것이다. 대중교육과 적절한 고등교육기관을 모두 갖추지 못하고서 근대적 경제를 세운다는 것을 불가능해졌다. 경제발전이 그보다 높은 단계에서 필요로 한 것은 과학적 독창성과 정밀성이 아닌, 즉 연구보다는 개발이었다.
오늘의 시점에서 돌이켜 보면 기술적 돌파구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었다.(석유·고무·비철금속) 그러나 아직 그런 시대에 들어서지는 못하고 있었다. 과학에 기초를 둔 분야이외의 주요한 산업상의 혁신으로는 아마도 기계의 대량생산일 것이다. 대량생산 공학의 진보는 거의 대부분 미국에서 나왔다.(콜트리볼버, 윈체스터 라이플, 대량생산된 시계, 제봉틀, 근대적인 일관작업) 기계로 생산되는 기계의 본질은 개개인에 의해 대량의 표준규격품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제품은 아직도 특수한 것이었다. 유럽 지식인들은 미국이 유럽처럼 숙련된 장인이 있으면 굳이 질나쁜 제품을 생산해 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할 뿐이었다.

4.

1870년대 초 세상을 살펴본 실업가들은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의 효력은 오래가지 않았다. 1차 산업혁명(석탄, 면화, 철강, 증기기관)이 지닌 기술적 잠재성을 거대했으나 그런 기술들은 벌써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1870년대 초만해도 그런 불안은 우습게 여겨졌다. 그러나 경제적 확장의 과정은 이상할 정도로 파국적이라서 불황과 호황을 반복했다. 세계적 불황 중 최초의 것을 겪은 뒤인 1850년에 경기순환의 주기성을 승인하고 이를 측정해낸다. 그러나 이런 중단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 시기는 끝없는 투자의 시대였다.
그런 뒤에 붕괴가 왔다. 이는 매우 극적이었다. 장기적 대호황의 초기에 볼 수 있던 슬럼프. 즉, 불황과는 달리 이 불황은 도무지 끝이 있을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동시대의 사람들은 대호황에 뒤이어 대불황이 따른 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1870년의 불황은 그렇게 튼튼하게 뿌리내린 것처럼 보였던 19세기 중반의 자유주의의 기초를 허물어뜨리고 파괴했다.
1840년대 말부터 70년대 중반은 당시 식자들이 상상하듯, 무한히 진보하는 시기가 아니다. 어떤 특수한 종류의 막간극과 같은 시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성취한 바는 지극히 감명적이었다. 이시기에 산업 자본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세계경제로 발전했고,  세계라는 말은 지리적인 표현으로부터 끊임없이 활동하는 현실적 체계로 바뀌었다. 역사는 이때부터 세계사가 된 것이다.


3장 하나가 된 세계

1.

옛 시대의 세계사라는 것은 이곳저곳의 역사를 끌어 모으는 것뿐이다. 무지는 세계의 단일성 결여에 대한 원인보다는 표징(表徵)이었다. 그 원인은 정치·경제적 연결의 미약함에 있다. 그러나 이 시대를 거치며 세계는 긴밀해지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의 결정적 전제조건이자 특징인 세계시장은 오래전부터 발전해오고 있었다.
미지의 영역에 대한 탐험의 과정이 세계시장의 성장과 어떤 연관을 가지냐의 문제는 복잡하다. 외교정책의 부산물, 열정적 선교활동의 부산물, 과학적 호기심, 그리고 이 시대의 후반부에는 저널리즘과 출판사업의 부산물이기도 했다. 다만 많은 탐험가들은 자신의 활동의 경제적 의미를 알지 못했으며, 알 수도 없었다. 탐험은 단지 발견이 아닌, 발전을 시킨다는 것을 의미했다. 탐험가는 차차 무역상인, 탐광꾼, 측량사, 철도·전신건설자, 백인 입식자(入植)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다. 이리하여 1875년의 세계는 과거 어느 때보다 더 많이 알려진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지리적 지식이상으로 중요했던 것은 세계의 동떨어진 곳들이 철도·증기선·전신과 같은 교통·통신 기관에 의해서 서로 연결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운송력과 속도는 전대미문의 것이었다. 1872년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가 가능한 것은 이전 시기보다 발전된 해상 운송력과 철도에 근거한다.
변화는 실제로 육상에서(철도) 일어났다. 이는 증기기관차의 속도를 높인 것이 아니라 철도 건설의 확장에 따른 것이다.

2.

1845년 당시 유럽을 제외한 지역에서 저개발국중 조금이라도 철도를 가진 곳은 쿠바 뿐이었다. 1855년에 이르면 5대륙에 모두 철도가 개통되었다. 19세기의 3사분기는 양적으로 보아 처음으로 진정한 철도시대가 시작된 시기였다.
대규모 간선철도의 건설은 당시까지의 人類 歷史上 가장 큰 공동 사업이었고 공업기술의 눈부신 성과이기도 했다. 험준한 지형을 경이적으로 달리는 철도들을 보며 우리는 철도를 건설한 산업화의 돌격대들에게도 감탄하게 된다. 최초의 증기열차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놀라움도 상상 할 수 있다. 또 거창한 변혁을 조직하고 지휘한 지독한 기질의 소유자들에게도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산업의 로망(浪漫)은 철도건설을 위해 자금을 조달해 주었을 뿐인 은행가, 금융업자, 증권업자들 까지도 휘감아버렸다.
이 같은 로멘티시즘과 기업과 금융의 결합은 호기심 왕성한 프랑스의 생시몽 주의자 일파에 의해 가장 극적으로 과시되었다. 이들도 1848년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를 졸업하고 산업의 지휘관으로서, 교통·통신기관의 건설자로서 모험적인 기업활동으로 옮겨갔다. 이런 사람들도 몇 개 대륙, 몇 개 대양에 걸친 규모로 일을 생각했다. 이들에게 세계는 철도와 증기기관으로 연결되어 묶인 단일체였다.
세계적으로 보면 간선철도망은 국제적 해운망의 補足物에 지나지 않았다. 아시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 및 라틴아메리카에서 철도는 경제적으로는 1차 산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지역을 항구로 연결하는 장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선박의 운행속도는 별반 현저하게 빨라지지 않았다. 세계의 해상수성에서 증기선이 현저히 증가하고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범선이 근소한 차로 앞서가고 있었다. 범선이 경쟁에서 탈락하게 된 것은 1870~80년대의 일이다. 증기선의 승리는 영국 상선대, 그 배후에 있는 영국 경제의 승리였다.
이 시대 가장 경이적인 기술혁신은 電信이었다. 이 기술은 1830년대 그 채비가 다 갖추어 있었다. 그 뒤 갑자기 돌파구가 열린 것은 1847년 전선절연기술등 보조기술의 발명덕분이다. 유럽의 선진지역들은 1848년 이후 몇 년 동안 재빨리 전신을 채택했다. 가장 뜻 깊은 발전은 해저전선의 건설이다. 전보는 내용 자체보다는 그러한 전보를 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훨씬 더 사람을 흥분 시킬 만한 성과였다.
세계적인 전신시스템의 건설은 정치적인 요소와 상공업적인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미국을 제외하고 국내전신은 거의 완전히 국가가 소유·운영하거나 그렇게 되었다. 사실 전신은 군사·치안의 목적만이 아니라 행정상의 목적을 위해서도 정부에게 매우 직접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다. 영토가 넓을수록 먼 전초(前哨)지점과 통하는 신속한 정보전달의 수단이 필요했다. 그리고 사업가들에 이어 일반 시민들도 곧 그것을 이용 할 줄 알게 되었다.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국제적 뉴스가 지구상의 충분히 다른 장소들로부터 자유로이 해저 전선을 통해 다음날 아침 식탁으로 전해질 수 있게 되었을 때, 즉 1860년대에 비로소 中世가 끝난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이 정보전달 속도의 빠른 가속화는 하나의 역설적 결과를 낳았다. 신기술을 이용 할 수 있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간의 격차를 넓혀 놓은 것이다. 즉 후진지역의 상대적 후진성을 더 심화시키는 꼴이었다. 무법·미개의 서부(wildwest)와 암흑대륙의 대조성은 부분적으로 이러한 차이에서 나온 것이다.
탐험가·여행가들에 대한 대중의 열광도 놀라울 만한 것 이었다. 이들은 기술의 변경지대나, 그 변경지대마저도 벗어난 세계를 가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철도·기선·전신이 바야흐로 전지구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실제로 입증하는데 있었고 세계여행을 가로막는 불안정성이 얼마만한 것이며 아직 남은 공백지대가 어떠한가 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끈 여행가들은 근대적 도움 없이 미지의 세계에 부딪혔던 사람들이다.(탐험가·선교사·모험가·박물학자) 이 시대는 이들의 뒤를 이어 안락한 여행가들의 새로운 여행을 위한 황금시대의 개막기었다.

3.

국제경제의 활동망이 긴밀해지면서 지리적으로 매우 동떨어져 있는 지역마저도 세계의 그밖의 부분들에 대한 직접적인 관계 속으로 끌려들어갔다. 이 시대의 형태를 결정하는데 큰 몫을 한 경제적 사건의 하나는 캘리포니아 금광의 발견이다.
이 지역은 그 지형적 가치에도 불구하고 당장 자본주의적 기업과 관련을 맺게 되지는 않았다. 골드러시는 이러한 상황에 재빨리 변화를 가져왔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발전이 몰고울 경제적 영향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있었으나, 당시의 사람들에게서 예상치 못한 사건인 것은 분명하다. 유럽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국지적인 사태가 유럽대륙에 거의 즉각적이고도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만큼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성을 잘 보여주는 예도 없을 것이다.
지리적으로 훨씬 더 멀리 떨어진 지역에 이 골드러시의 영향이 즉각적으로 미쳤다는 것은 뜻밖이다. 무엇이든 수출될 수 있는 것을 캘리포니아로 수출되었다. 모든 물건 값이 급등했다. 더 의미심장한 것은 인간의 이동이었다. 급증하던 중국인 이민은 오랜 인종차별적 선동의 절정으로 1882년 중국인이민제한법의 제정에 이르게 된다. 이로서 경제적 유인에 이끌려 자발적으로 동양사회가 서양사회로 옮겨간 최초의 예인 대량이민은 종지부를 고한다. 그 밖의 자극은 전통적인 이주자들을 미 서해안 쪽으로 돌린 것뿐이었다.
북아메리카로 향하는 이민자들은 압도적으로 해로를 통해 들어왔다. 그러나 이 여정을 좀 더 안전한 것으로 만들려는 것과 함께 그 소요시간을 단축시키게 되는 유인은 압도적으로 강했다. 이는 파나마운하의 건설 착공으로 나타난다. 파나마는 오늘날도 그러하듯 양키 소유 하에 연명하는 도시가 되었고 파나마지협은 국제무역의 십자로가 되었다.
이러다보니 관찰자들이 경제세계를 서로 얽힌 단일의 복합체로만 보지 않고 다음과 같이 보았다. 각 부분이 서로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민감하고, 그런 사건을 통해서 화폐물자·인력이 수요와 공급, 이익과 손실의 거역할 수 없는 자극에 따라서 그리고 근대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원활하게 그리고 날로 더 급격히 움직이는 것이 경제세계라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런 움직임에 둔하거나 격리된 지역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지역들도 조만간 모두 이러한 움직임에 끌려 들어가고 말 것이라는 것을 누가 의심했겠는가.

4.

세계의 단일화 과정에서 오늘날과 19세기 중반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20세기 후반에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국제적 표준화이다. 19세기에 거의 있을 수 없던 것은 상이한 언어권 사이의 문화적 표준화였다. 당시에도 선진세계의 모델은 보다 후진적인 세계에서 얼마 안 되는 지배층의 생활양식으로서 모방되고 있었다.(동일한 언어권 內部의 標準化)
19세기 중반의 부르주아 예언자들이 표준화된 단일세계의 도래를 기대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지구상 도처에 전파된 자유주의가 국민적 차이까지도 소멸시키게 될, 그런 세계였다.
커뮤니케이션의 발달은 새로운 종류의 국제적인 조정기구와 표준화기구-전신·우편·기상-들의 설립이 요구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위적인 세계 언어를 고안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국제적인 표준화와 일체화는 여전히 미미했고 부분적인 현상에 머물러있었다. 이는 민주주의의 바탕위에 성장한 국민국가와 그 문화들이 국제적 표준화를 어렵게 하거나 우회하게 하였다. 장기적 전망은 차치하더라도 언어는 중·단기적으로 서로 다른 국민들의 형성에 의하여 발전이 된다는 것을 당시 자유주의적 관찰자들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계의 단일화는 내용상으로는 다양한 분화를 의미했다. 세계적인 자본주의 체계는 서로 경쟁하는 여러 ‘국민경제’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자유주의의 성패는 각 nation들이 자유주의화 하는 것에 있었다. 이 시기 진보의 唱導者(the advocates)들은 조만간 그렇게 되리라 확신했지만 그들의 확신은 튼튼하지 못한 근거위에 서 있었다.
세계의 일체화가 무조건 유리했던 것은 아니다. 이러한 사태의 고전적 예증이 국제적인 불황이었다. 1840년대에는 아직도 농업순환(agrarian cycle)이 세계경제에서 우위에 있었지만 그 영향은 국지적이었다. 자연현상이 세계적으로 일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공업화된 경제는 나폴레옹 이후부터 경기순환(trade cycle)의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그 영향은 공업화된 일부의 세계에 지나지 않았다.
1848년 이후 두 가지 사태가 발전되어 사정은 달라지게 되었다. 1) 경기순환형의 공황이 진정으로 세계적 규모로 된 일이다. 2) 농업적 경제변동은 적어도 공업화된 국가에서는 효력을 많이 상실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1) 식량의 대량수송으로 국제적 식량부족이 감소하고 가격이 균등화 하는 현상. 2) 식량부족의 타격이 공업에서 창출되는 고용효과에 의해 상쇄. 3) 세계경제의 지배력 강화로 농업역시 자연의 변동보다는 세계시장 가격변동에 더 많이 좌우된 점들이다.
이 모든 사태의 발전은 세계에서 이미 국제경제 속으로 진입해있는 부분에서만 영향을 주었다. 아직 세계경제에 속하지 않는 지역이 많았다. 1848-75년 동안 세계가 단일화 되었다는 것을 과장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장래의 중요성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4장 분쟁과 전쟁

1.

1850년대의 대호황은 세계적 규모의 공업경제와 단일화 된 세계역사의 기초가 되었다. 경제의 대확장과 발전은 대중의 불만과 압력을 약화시킬 안전판을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정치적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었으며 1850년대 마지막 무렵에는 더 이상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것은 각 정부들에게는 본질적으로 국내정치의 문제였다. 그러나 라인강 동부에서는 서로 국내문제와 국제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었다. 이는 유럽대륙의 국경에 가해지는 실질적인 어떤 變更도 다른 열강들의 이해관계를 건드리게 되었다.(이탈리아, 독일들)
그러나 이 폭탄은 폭발력을 잃고 있었다.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유럽의 각국 정부들은 1850대 말부터 일어난 민주주의자들과 새로이 등장한 노동운동에 의한 정치적 동요에 직면한 것이 사실이다. 1860년대에 이르면 정부는 일시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도 언제나 상황을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정부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요구 가운데 약간의 것들은 언제나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10년간은 개혁과 정치적 자유화의 시기였다.
1860년대 지배자들의 정치는 세 가지 요인에 의해 다듬어졌다. 1) 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오히려 적응해야 할 경제적 정치적 변화. 2) 신흥세력에게 베풀 양보의 종류와 한계. 3) 지배자들에게 주어진 상당정도의 주도권과 사태를 조종할 수 있는 여지.
이 시기 유럽의 두드러진 정치가로 카부르와 비스마르크를 들 수 있다. 모두 명석했고 반혁명적이었다. 그럼에도 반대세력들의 강령을 받아들이고 나서는 그 內容중 민주적이거나 혁명적인 함축성을 거세하고 이것을 그대로 실행했다. 또한 국가의 통일에서 민중들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유의했다. 둘 다 유연하여 반대파를 자신의 체계 속에 통합 시킬 수 있었지만 반대파가 지배권을 갖게 되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통일된 독일이 너무 민주적이면 안 되고 프로이센이 지배하기에 너무 크면 안 된다는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는 여유가 있었다. 이는 1) 오스트리아의 배제, 2) 오스트리아의 무력화, 3) 오스트리아의 존속, 때문이다. 비스마르크는 이 세 가지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카부르는 상층의 외교·정치에 의해 반쯤 통일이 되고, 가리발디의 군사 지휘아래 민주적·공화주의적 혁명전쟁에 의해 반쯤 통일이 된 상황을 직시하고 신속한 사고·책략으로 통일을 수행해 나갔다.
이들의 업적이 찬란한 것은 개인적 재능이 아니라, 국제적 경쟁, 혁명의 위험이 없었던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 독일의 자유주의자, 급진적 민주주의자, 혁명가들은 찬·반의 의사표시 말고는 한 것이 없었다. 이탈리아의 좌파는 가리발디의 원정으로 인해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목적인 공화국 수립에는 실패했다. 그 외 다른 지역들의 독립과 공화제 운동은 좋지 못한 결과를 낳았다.
1860년대의 정치를 움직인 사람들은 그들이 큰 정치적 위험 없이 극렬한 선택과 실천을 할 수 있었기에 상당히 용이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2.

나폴레옹 전쟁이후 강대국 정부들은 서로간의 충돌을 피하고 있었다. 대전쟁은 언제나 혁명을 몰고 온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48년 혁명이후 그런 동기들이 크게 악화되었다. 그 때문에 1848년 이후 30년간은 혁명의 시대가 아닌 전쟁의 시대가 되었다. 여기서는 국제정치와 국내정치가 서로 얽혀 전개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국제관계 체계안에서의 긴장과 변화를 살펴보자.
당시 외교담당자들은 중요한 문제는 분쟁이 일어날 경우 대규모 전쟁으로 갈수 있고 5대열강(영국,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 했을 것이다. 미국은 유럽의 관심밖에 있었고, 미국 역시 유럽이 아닌 다른 대륙에 관심이 쏠려있었다.
유럽의 열강들에게 외교적 타협의 여지는 있었다. 그럼에도 알력을 일으킬 불씨가 존재했다. 그것은 해체되어가는 오스만제국, 東地中海, 지금의 중동 및 러시아의 동쪽 국경과 영국의 인도 서쪽국경 사이의 러시아와 영국의 상충하는 야심이라는 두 가지가 겹쳐 일어나는 것들이었다. 열강의 외상들은 끊임없이 이른바 ‘동방문제’에 정신이 팔려있었다.
1848년 혁명에도 불구하고 열강에 의한 국제정치는 옛날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 후 몇십년 동안 사정이 달라졌다. 잠재적으로 가장 취약해보였던 프랑스가 인민주의적 제국으로서 혁명을 통해 부활한 것이다. 제2제정기 프랑스의 대외적 모험들은 특별히 프랑스적이라 할 것은 없다. 비유럽세계를 통틀어 제물로 삼키는 활동에 프랑스도 참가 할 수 있을 만큼 강력했다는 것뿐이다. 프랑스의 야망이 해외에서 추구될 경우 별문제 없었지만 열강이 경쟁을 벌이는 지역 일 경우에 미묘한 균형은 교란되었다. 이런 교란의 최초의 결과가 크림전쟁(1854~56)이다. 1860년대에는 프랑스라는 제3의 플레이어가 있었고, 그 플레이는 예측을 불허하는 것이었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외교적 귀결은 일시적인 것뿐이었고, 루마니아가 사실상 독립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以後 러시아 차리즘의 변화 및 개혁은 크림전쟁이라는 에피소드에 의해 촉진된 국제정치 체제의 변화에 의해 용이하게 일어 날 수 있었다.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은 부수적으로 나폴레옹 제2제국의 붕괴와 파리코뮌을 일어나게 했다. 오스트리아는 재구성되었다. 새로운 열강-이탈리아-이 창건되었다. 이 모든 변화는 직·간접적으로 독일·이탈리아의 통일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이 시대에 있었던 전쟁들 때문에 이 시기는 유럽사에서 1815~1914년의 시대에서 평화로운 한 세기에서 다소나마 호전적인 막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전쟁은 흔했어도 전쟁의 공포가 형성되지는 않았다.
중국과 미국·남미는 물론 유럽에서 벌어진 전쟁들은 무수한 인명피해를 낳았다.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1860년대는 流血의 10년간이었다. 역사상의 이 시기를 상대적으로 전란에 휩싸이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
1) 세계적인 자본주의의 팽창의 과정, 비서구 세계의 진장증대와 공업세계의 야심이 증대되면서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직·간접의 분쟁을 증대시켰다. 2) 특히 유럽에서 정부가 취할 정책적 수단으로서 전쟁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각국 정부들은 혁명의 공포에서 벗어나 다른 정부들의 행동을 제어하기 위해 강경해졌다. 이 시기 경제적 경쟁이 국지적 마찰이상으로 벌어지는 일은 없었고, 사업상 경쟁이 정부의 지원과 완전히 독립되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맑스마저도- 유럽에서 벌어지는 전쟁의 1차적 원인이 경제적인 것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3) 자본주의의 새로운 기술을 사용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전쟁이나 정책이 가져온 변화는 관찰자득이 인식했던 것보다도 훨씬 뿌리 깊은 변모였다. 변하지 않는 것은 저개발세계에 대하여 엄청나게 우월한 입장에 있었다는 점이다.
강대국의 관계들도 일변했다. 나폴레옹의 패배 이후 반세기 동안 본질적 강대국은 영국  뿐이었다. 그러나 1860년대에 세 가지 일이 일어났다. 1) 공업화의 확대결과 영국 외에도 본질적으로 공업자본주의 국가-미국, 프로이센, 프랑스, 일본-들이 생겨났다. 2) 공업화의 진전으로 부의 能力이 국제적 세력관계에서 점점 더 결정적인 요소가 되어갔다. 3) 유럽이외의 두 국가(미국, 일본)가 자주적인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처음으로 세계적 분쟁의 가능성이 형성되었다.
세력구조의 변화는 海外에서는 아직 큰 중요성을 가지지 못했지만 유럽 내부에서는 그 影響이 당장에 感知되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더 이상 잠재적 결정세력이 아니었다. 역으로 독일이 새로운 결정적 세력이 되어 1945년까지 그 자리를 지키게 된다.
그리하여 형식적인 국제정치 체제는 실제로부터 점차 유리되었다. 국제정치 체제는 강대국 사이의 일종의 寡頭體制가 되었다. 그러나 1875년 무렵에는 이 점들이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 세력구조의 기초가 다져진 것이 1860년대의 일이다. 유럽전면전쟁에 대한 공포도 이때 시작되었다. 자유주의의 승리의 시대는 여러 분쟁 속에서도 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1875년 이후는 그렇지 않았다.


5장 국민들의 형성

1.

1848~70년대에 이르는 시기 국제정치체제에서 nationality의 문제가 중심적인 爭點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면 世界는 어찌하여 여기에 이르렀던 것인가. ‘국민들의 봄’이었던 1848년은 국제적 시각에서 볼 때 명백히 민족들의 자기주장의 시대였다. 아니, 그보다는 서로 경쟁하는 민족들이 자기주장을 하는 시기였다. 혁명은 실패했지만, 같은 열망이 그 후 25년 동안 유럽政治를 支配했다. ‘국민국가의 형성’이라고 불렀던 事態가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nation의 개념에 대해서는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국민국가가 형성된 이 시대에도 그것은 국민들(nation)을 주권 국민국가(nation-state)로 개편함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한 개편은 논리적이고 필연적이고 필요하며 바람직한 것으로 믿어졌다. 그러한 국민국가는 국민의 성원이 定住함으로서 지역이 확립된, 일관적인 영토를 가지는 것이었다. 또 ‘국민’이란 그 과거의 역사, 공통의 문화, 그 인종적 구성 그리고 더욱더 ‘언어’에 의하여 規定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의미에는 논리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他집단과 구별되는 집단과 그 성격이야 있지만 그것이 국민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니다. 국가의 판도가 국민들의 정주지와 일치하는 19세기적인 영역국가(territorial state)역시 그러하다. 19세기적인 영역국가란 비교적 새로운 역사적 현상이었다.
일반적 강령으로서 국민국가를 형성하려고 하는 소망은 그 자체가 프랑스 革命의 産物이었다. 우리는 국민, nationalism의 成立과 國民國家의 創出을 명확히 구별 할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분석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다. 유럽은 두 그룹 - 국가 성립의 열망에 의문의 여지가 없는 ‘민족들’과 그것에 상당한 문제가 있는 ‘민족’의 두 갈래로 갈려있었기 때문이다.
이것들을(민족을 두 갈래로 보는 인식) 가능하게 하는 것은 政治史的 사실, 식자층의 제도적·문화적 역사 따위가 가장 확실한 길잡이가 되어준다. 한 국민의 성립여부에 관한 역사적 基準에는 지배층 또는 엘리트의 制度와 文化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nationalism을 내세우는 이데올로기적인 立論들은 이와는 매우 달아서 훨씬 더 급진적이고 민족적·혁명적인 것들이었다.
그들의 입장은 역사나 문화와 상관없이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착취당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입각하고 있었다. 이를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인 立論의 근거는 찾거나 만들 수 있었다. 이런 의미의 국민적 독자성의 기초는 인종적이거나 언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었다. 오히려 구전문화와 민중-사실상 농민들-의 習俗과 생활양식에 입각하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전형적으로 비역사적·準歷史的인 민족들이 역시 소규모의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19세기 내셔널리즘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크고 힘을 가진 민족이어야 한다는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독립 못지않게 통일이 그 원리의 하나가 되어있었다. 이는 각 소민족들의 상충·갈등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국가를 진보와 결합시켜 이들을 동일시한 사람들의 단순한 논법은 소수의 후진민족들을 實在하는 민족으로서 성격을 부인하거나, 역사의 진보에 따라 더 큰 실재하는 민족 내부의 지방으로 편입되어야 하거나, 어떤 문화민족에 동화시킴으로서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이 같은 논의에는 反平等的인 要所가 강하게 깔려있고, 그보다 더 강한 자기 변호가 깔렸다. 이를 다른 민족을 억압하려는 음모라고 치부할 일은 아니다. 이러한 주장은 소수의 언어를 ‘방언’의 지위로 강등 시킬 것을 생각한 것에 불과한 억압당하는 民族의 대변자일 뿐이었다.
소수민족의 민족적 열망에 직면한 ‘여러 국민의 유럽’論者들은 세 갈레의 기로에 서있었다. 1) 소수민족의 요구의 정당성, 존재의 전면 부인 2) 소수민족의 운동을 지역적 가치를 요구하는 운동으로 격하 3) 소수민족의 존재는 부인 할수 없지만 그와 동시에 어떻게 처리 할 수도 없는 현실로서 받아들이기

2.

국민국가를 형성하겠다는 운동과 nationalism사이에는 이 같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전자는 후자에 입각한다고 주장하면서 정치적 구조물을 건설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가공의 것이므로 민족을 상상하는 모두가 그 정치적 구조물을 건설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nationalsm과 국민국가가 괴리된 극단적인 예는 이탈리아였다. 그 성격과 표방하는 기도(企圖)가 무엇이건 민족이념을 내거는 운동은 성장·확산되었다. 그러나 민족주의 지도자들의 사상과 그 지도자들을 따랐던 사람들이 실제로 품었던 사상을 동일시 하면 안된다.
민족주의의 보편적 존재와 동질성을 당연한 것으로 보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특히 새로이 나타난 나라들에서는 19세기 중반에 오직 신화와 선전으로만 내셔널리즘이 당연시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대체로 일반대중에게 진지한 지지를 받지 못하고 지방의 부르주아와 귀족과 일반대중의 중간계층에서 존재했다. 가장 전통적이고 후진적이거나 가난한 계층, 즉 노동자, 하인층과 농민들이 교육받은 엘리트들의 뒤를 이어 마지막으로 이 운동에 휩쓸려 들었다.
대중적 민족주의는 전에 없던 새로운 것으로서 이탈리아·독일의 운동에서 볼수 있는 엘리트 중심, 중류층 중심의 민족주의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대중적 민족주의가 일찍부터 존재하고 있었다. 비록 정치·경제적으로 큰 결과를 낳은 바가 없었지만 보다 전통적이었고 혁명적이었으며 그 고장 중류층의 영향을 덜 받은 민족주의였다. 농민과 산악인들이 외국인의 지배에 대하여 일으킨 반란이 피압박 의식과 排外的 감정, 古來의 전통에 대한 집착, 진정한 신앙, 그리고 인종적 동일성에 대한 막연한 감각 따위와 결합되었을 때, 이것을 nationalism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이것이 근대적인 민족운동과 결합되었을 경우에만 nationalism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중 강력한 예는 아일랜드의 경우다. 1850년대 말에 뚜렷하게 모습을 나타낸 패니어會의 새로운 점은 중산계급의 온건파와 완전히 독립되어있었고 그 지지는 일반 민중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무장반란에 의해 영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한다는 것을 하나의 강령으로서 처음으로 전면에 내새웠다. 이들의 운동은 20세기 저개발 국가들에서 일어났던 혁명적인 민족운동을 예상케 하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들이 사회주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패니어주의는 자유주의가 승리를 구가하던 시대의 대중적 내셔널리즘이었다.
이 시대에 내셔널리즘이 대중적인 힘이 된 것은 적어도 백인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부인 할 수 없다. 내셔널리즘은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정치의식과 발 맞추어 앙양(昻揚)되어갔다. 혁명전통이 국민적인 것이었고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국민적 문제에 깊이 관련되어있었기 때문이다.
국민적(민족적) 정치의식을 대치할 수 있는 정치의식이란 노동자계급의 국제주의가 아니라 국민국가라는 척도보다 훨씬 작거나 그것과 무관한 정치 이하의 정치의식이었다. 좌파의 국제주의란 다른 국가의 좌파에 대한 연대와 지원을 의미했으나 정열적인 민족주의 신념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국제주의는 국익의 정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함을 의미 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나름의 nationalism에 무감각 했던 것은 아니다. P.T도 B.G와 마찬가지로 개념상으로만 국제적 존재이지 현실적으로는 국민국가, 또는 인종적·언어적 차이에 의해 결정되는 여러 그룹의 총체로서만 존재했다. 시민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데올로기에서는 ‘국가(state)’와 ‘국민(nation)’이 일치하도록 되어있었던 만큼 국가의 이름에 의한 정치는 곧 국민의 이름에 의한 정치를 의미했다.

3.

민족감정이나 충성심과 상관없이 nation이란 인공적인 산물이다. nation은 새로울 뿐만 아니라 건설되어야 할 당위로서 국민적 통일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를 필요로 했다. 이는 우선적으로 state를 의미하고 국가적 고용, 교육, 병역을 의미했다.
발전된 국가에서는 이 시기 各級 교육제도가 상당히 확충되었다. 고등교육·중등교육에 비해 큰 변화는 초등교육에서 일어났다. 초등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읽고 쓰기, 加減乘除가 아니라, 학생들에게 사회적 가치(여러 덕목, 애국심등)를 심어주는데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는 그전엔 국가가 등한시했던 분야이며 초등교육의 성장은 정치에 대한 대중의 참여와 일정히 관련되어있다.
새로운 국민국가에서는 이런 교육제도가 결정적중요성을 지녔다. 이런 교육제도를 통해서만 ‘국어’가 현실적으로 사용되는 언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는 이것이 사회적 추세와 맞물리는 중요한 문제였다. 나아가 교육에 쓰는 언어를 하나로 정하여 강요하는 것은 하나의 문화, 하나의 국민성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는 다민족 국가에서는 더욱 중요하게 대두되었는데, 이러한 강요된 국어화는 同化와 劣位의 소수민족임을 감수하느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섰던 사람들로 하여금 대항 내셔널리즘을 자동적으로 낳게 했다. 이는 nationalism의 역설이지만 자유주의 시대는 이 역설을 파악하지 못했다. 아직은 nation이나 nationality의 형태가 제대로 잡힌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다민족국가가 되려하지 않고 독자적인 국민적으로 이주자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이민자들 역시 그들의 출신을 더욱 자각했다. 이 같이 nationalism은 아직도 B.G적 자유주의의 테두리 안에서 다룰 수 있고 양립 할수 있다고 믿어졌다. 국민의 세계는 자유주의의 세계가 될 것이고 자유주의 세계는 여러 nation으로 이루어진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후의 역사는 양자간의 관계가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님을 보여주게 되었다.


6장 민주주의 세력들

1.
nationalism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역시 역사적인 힘이었다. 이 시대 민족주의 운동이 대중화되어있는 상황에서 양자는 동일한 것이었다. 실제로 모든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해왔다.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중요했던 것은 대중들의 신념이 아니라 대중들의 신념이 정치에서 힘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대중은 위험한 존재지만 선진국들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대응책-정치제도적인 공간-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대의제 정부에서 지배층은 모든 사람이 국정을 운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수준과 능력만큼 정치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가장 보수적인 자 외에는 설득력이 없었다. 부르주아 사회의 기본적인 법률적 평등과 교육의 진전, 사회적 유동선의 확보로 인해 그러한 정치적 차별이 어려워지고 있었다.
대중들의 정치적 압력이 높아갔지만 1850년대는 대부분의 지배자들에게 숨돌릴 여유를 주었다. 하지만 프랑스에선 대중은 잘 다루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중요성이 증대했는데, 그래서 제2제정은 한층 근대적 정치를 펼치는 실험장이 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국민들과의 관계에서는 꽤나 불운했다. 또한 국제적·국내적 정치적 企圖모두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정치꾼이었다. 하지만 그의 사회적 배경이 그에게 전혀 새롭고 기발한 역할을 맡게 했다. 1848년 이전에는 보나파르트 집안 출신으로 帝王權의 참칭자(僭稱)로서 비전통적인 사고를 가지게 했다. 또한 민족주의자와 생시몽주의자 속에서 성장하여 민족주의에 대한 강한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혁명은 그에게 보나파르트라는 이름 때문에 압도적인 표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기회를 주었다. 그가 권좌에 눌러 앉는 데는 굳이 투표에 의한 지지가 필요하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다른 야심가들을 굴복시키고 지지하게 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이외의 곳에서 보통선거에 의해 대국가를 통치하는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는 국민투표와 의회를 점점 더 조종해나갔다. 한편 대의제에 대한 그의 태도는 애매했다. 한 편 그 자신이 선거전의 투사로서 인민투표라는 무기를 항상 대기시키고 있었다. 어쨌든 그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정치적으로 조작된 것은 아니었다. 또 그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동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는 도시에서는 진보파의 지지를 바랬지만 실패했다. 그가 실제로 의존한 것은 보수적 요소인 서부의 농민층이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사유재산에 대한 위협에 확고히 반대하는 안정된 반혁명적 정권으로 보였다. 그리고 로마교황의 수호자이기도 했다. 나폴레옹이야 말로 ‘자기계급의 이익을 자기 이름’으로 관철시키지 못했던 대중들의 집행권력이었다.
1850년대 보통선거를 하는 곳은 스위스 밖에 없었다. 그러나 대의제 의회는 그 영향력과 상관없이 낯익은 존재가 되어있었다. 대게는 선거참여의 제한과 세습제와 당연직 의원으로 구성된 제1원(상원)의 제동으로 인해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었고 그럴 생각도 없었다.
1860년대에 가서 민중의 壓力이 높아지자 정치를 민중으로부터 차단시킬 수는 없게 되었다. 1860년대의 10년동안 참정권의 범위는 크던 작던 넓어진다. 대의제 정치를 향한 전진은 정치세계에 두 가지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상류계급과 일반대중의 문제다. 예로부터 세습귀족과 신흥 B.G는 양쪽 모두 숫자의 강점을 지니지 못했으나 후자는 수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귀족도 정치제도에 의해 비호를 받았지만 B.G가 기댈 것은 재력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B.G가 정치 시스템에서 힘을 갖게 된 것은 투표권을 가진 非B.G 계층의 지지를 동원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B.G에게는 小B.G와 L.C, 그리고 드물게 農民의 지위를 유지한 채, 그들에 대한 헤게모니는 유지하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대체적으로 이 시기 B.G는 이 일에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밑으로부터의 압력이 커지면서 더 민주적이고 급진적인 분파가 어느 정도 독립적 세력이 되어있거나 자유주의파로부터 갈라지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이런 급진파들은 좌파의 깃발 아래서 선거에 이기면 재빨리 온건파로 옮겨 앉았다. 실제로 자유주의가 계속 득세하고 있었다. 자유주의만이 경제발전을 위한 효과적인 정책을 대표하고 있었고, 과학과 이성과 역사와 진보를 대표한다고 거의 모두가 믿고 있었다. 이념적 차이에도 당시 정치인, 공직자들 모두는 자유주의자였다. 우파 - 반대파는 진심으로 반동을 원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속도를 늦추어 보겠다는 것뿐이었다. 이 목표는 전진과 안정, 질서와 진보, 이 두 파에 욕구에 대처할 필요를 위해 우파 속에 간직되어있던 지식인들에 의해 합리화 되었다.
그리하여 보수주의는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된 자유주의적 B.G의 성원이나 집단들의 마음을 휘어잡기도 했다. 보수주의는 새로운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의존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이들에게 공식적 교회제도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意味를 가지게 된다. 교회조직은 자유주의에 의해 위협당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자유주의에 대항한 매우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이 시기 상류계급에 의한 정치 중 새로웠던 점은 자유주의적 B.G가 어느 만큼은 입헌주의적 형태의 정치세력으로서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선거권은 대부분 매우 제한되어 현대적인 대중정치 내지 그 어떤 다른 형태의 대중정치 따위는 아예 문제가 될 수도 없었다. 그러므로 무대 위에 올라선 중산계급의 무리들이 자신들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진정한 ‘인민’의 자리를 거의 독차지 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자유주의자들의 선거에서의 승리는 투표제도의 핸디캡에 의한 바가 크다. 때문에 다수의 민중이 선거에 무관심한 가운데 자유주의파가 1860년대 거둔 승리라는 것이 소수의 도시 B.G의 정치적 견해 이상의 무엇을 대표 했다고 보기 어렵다.
적어도 비스마르크는 그 자유주의파의 승리를 소수의 都市B.G가 승리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의회와 군주제 정부 사이의 분쟁을 무시하는 통치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할 수 있었다. 그는 엄격한 의미에서 B.G.R이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왜냐면 B.G가 아닌 다른 계층들이 동원되어야만 진적한 혁명이 될 수 있는데 B.G들은 스스로 바리케이트를 쌓으려 드는 일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자유주의적 B.G의 강령들을 토지귀족이 가진 우월한 지위와 결합 시킬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용하는 것에는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다수의 자유주의적 B.G들은 정치적 실권은 주지 않고 강령만을 이러저러하게 선택하겠다는 비스마르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들 보수파들은 도시의 사업가들이 자유쥬의자라 할지라도, 결코 그들의 대중은 자유주의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 일파는 때때로 참정권을 확대하겠다는 위협을 서슴치 않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대중들도 자신과 동일한 의미의 보수파라고 생각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일단 정치무대에 올라서면 대중들은 필연적으로 엑스트라가 아닌 하나의 배우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다.

2.

정치에서 그 자체의 독자적 주체성과 역할을 최초로, 그리고 가장 위험스러울 정도로 확립한 집단은 20년간의 공업화에 의해 그 수가 크게 불어난 P.T였다. 노동운동은 1848년의 혁명들의 실패와 그 후 10년간의 경제적 확장의 시기에 약화되기는 했으나 파괴되지는 않았다. 1849년 이후 1~2년간 혁명의 부활에 얼마간 희망을 걸고 있던 맑스는 그 후 1857년의 공황에 믿음을 걸어보았으나 이후f에는 장기적인 전망으로 자위 할 수밖에 없었다. L.C의 정치조직 또는 그들에게 헌신하려던 정치조직들 중 살아남았던 것들도 차츰 보잘 것 없는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온건한 경제투쟁과 자기 방어적 수준에서는 L.C의 조직이 존재했고 성장을 억누를 수도 없었다. 영국은 주목할 만한 예외다. 노동조합과 파업이 유럽의 거의 전역에서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노동운동이 존속하고 성장했다. 영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숙련직공들이 강력한 지방적 조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들 조합은 장차 노동조합운동이 뻗어나갈 채비를 갖추는 기지의 구실을 했다.
노동운동은 이 무렵 상대적으로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지만 사려 깊은 관찰자들은 이 같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P.T의 진출은 무엇보다 국제적인 과정이었다. 자유주의가 부활한 것처럼 P.T의 진출이 여러 나라에서 동시에 일어났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L.C의 국제적 단결, 즉 급진좌파의 국제적 단결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건 좌파의 승리 또는 패배가 모든 급진주의자들에게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직접·당장 영향이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또한 노동자들 사이의 국제적·조직적인 접촉만으로도 상대방 노동운동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런던에서 창립된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주의는 순수조합주의자, 프루동주의자, 바쿠닌주의자들과의 내부투쟁을 겪게 되지만 사태의 진전에 따라 맑스의 사상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같은 사태 발전은 1860년대에는 좀처럼 예견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당시는 맑스주의적인 - 사회주의적 대중노동운동이 있었을 뿐이며 이것이 1863년 이후 독일에서 발견한 대중노동운동이었다. 이 흐름은 마침내 1875년 SPD를 결성하게 된다. 이 운동은 맑스를 스승으로 삼고 있어 맑스와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었다. 인터내셔널은 당시만 해도 이렇다 할 중요한 L.C 정당을 만들지는 못했지만 여러 나라에서 L.C가 대중적인 공업적 노조운동의 조직적 육성에 나섰던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노조들이 솟구치듯 생겨났고 그것들이 인터내셔널에 대중적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각국정부와 B.G의 일부는 1860년대에 제법 일찍 L.C의 대두를 인식하고 있었다. 자유주의는 社會改良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들 중 일부는 P.T의 지지를 잃을 위험성을 의식하여 사회개량이라는 희생을 불사할 용의까지 갖추고 있었다. 또 멘체스터주의가 전면적으로 승리한 적 없는 나라들에서는 관리들과 지식인들도 그러한 필요성을 점점 더 고려하게 되었다.
어쨌든 자유시장의 메커니즘에 대한 어떠한 공공적인 간섭까지 일종의 파괴공작으로 간주해오던 사람들도 이제는 노동자의 조직과 활동을 순하게 길들이려면 그것들을 우선 승인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노조의 법률상 위치는 매우 불확실한 상태에있었다. 영국만은 예외적으로 1875년에 이르면 노조의 거의 완전한 법적 승인을 얻어낼 정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조치들의 목적은 오로지 L.C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를 막아보자는데 있었다. 이는 비정치적 노동운동이 견고했던 영국이나 오스트리아에서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유럽 대다수의 국가에서 노조운동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운동 특히 맑스주의 운동과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인터내셔널은 L.M을 반란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인터내셔널은 당장의 혁명을 계획하지는 않았다. 1860년대에 맑스는 장기적 전망을 위해 일하면서 단기적 전망에 관해서는 조심스럽게 대처하였다. 그는 조직적 노조운동이 안착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또한 이시기 정치적 L.M이 맑스주의적이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본주의가 곧 무너진다고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튼튼한 방위선에 싸여있는 적에 대해 장기전을 수행해낼 수 있는 부대를 조직하는 게 첫 걸음을 내딛는 일을 해낼 수 있기를 바랬다. 1870년대 초 L.M은 이런 작은 목표마저도 달성하지 못했던 것처럼 보였다. 1873~75년 사이에 노동쟁의의 큰 물결이 있었지만 1866~68년의 경우보다 강력하지는 않았다. 인터내셔널 또한 케케묵은 좌파의 영향을 제거하지 못해 무너지고 말았다. 맑스의 말년은 후회와 실망의 분위기에 차 있었다.
지금에 와서 보면 1860년대에 이룩한 두 가지 성취를 항구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1) 이후 성립된 독립적이고 정치적인 대중적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조직. 2) 前맑스주의적인 사회주의좌파의 퇴진, 그리고 그 결과로서 정치운동의 구조는 항구적으로 변혁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대부분은 인터내셔널이 주로 맑스주의적인 대중정당들의 공동전선으로 부활하는 1880년대 말 이전에는 명백히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독일에서만은 사회주의자들의 진출이 뚜렷해졌다.(투표율의 상승)
누구도 이런 현상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했다. 대중들은 수동적이지도 않았고 B.G의 분부를 따르려 하지도 않았다. 비스마르크조차 법으로서 사회주의 활동을 금지하는 것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7장 패배자들

1.

B.G세계의 사상-생존경쟁-은 최적자만이 살아남고 지배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온 세계의 주민들은 이들의 희생양이 되었다. 세계의 절반이상의 나라들은 그들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었다. 대체적으로 희생물이 된 이들 세계는 4가지 주요부분으로 되어있었다. 1) 아시아와 이슬람 세계에 존재하는 비유럽인의 제국 또는 독립된 대왕국. 2)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에스파냐와 포르투칼의 前 식민지. 3)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 4) 주로 아시아에서 이미 곡식적으로 식민지가 되어있거나 또는 점령당해 있던 지역들.
이들 모든 나라는 서유럽에 의한 공공연한 정복 또는 비공식적인 사실상의 정복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에 직면했다. 비자본주의 세계에서 정치적으로 조직화된 많은 민족들의 경우 문제는 백인문명을 피할 수 있는가에 있던 것이 아니다. 백인문명의 충격에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의 문제였던 것이다. 백인문명을 모방함으로서 이에 대응할 것인가. 백인문명의 영향에 저항할 것인가. 혹은 이 두 가지를 결합하여 대응할 것인가. 이것이 문제였다.
종속적 지위에 놓여있던 세계 여러 곳에서는 두 종류의 지역들이 유럽의 지배아래서 강제된 서유럽화를 겪었거나 서유럽화 되어가는 途上에 있었다. 두 종류의 지역이란 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여러 舊식민지와 세계 도처에 있는 現식민지들이었다.
라틴 아메리카는 형식상으로는 주권국가의 집합체로 대두하였다. 거기에는 구식민모국(스페인, 포르투칼)적인 옛 제도의 유산으로서 대토지 소유자들의 부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었다. 이들 대토지소유자의 입장은 그들에 대해 약간의 제어를 유지하려 했던 식민지 지배가 폐기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라틴아메리카의 나라들은 기본적으로 거의 모두가 과두정치아래 있었다. 이는 국민적 권력과 국가가 매우 허약했다는 것이다. 이들 정부의 운명은 외국무역에서 읻어지는 이익을 획득하는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달려있었다. 새 체제에 의하여 단행된 자유주의 개혁들은 아직 실천적으로는 별 효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의 3 사분기에 전세계에 걸쳐 이루어진 자본주의의 놀라운 팽창이 이러한 사태에 변혁을 일으키게 된다.
1) 파나마지협에 대한 선진국의 직접 개입, 2) 유럽이 수입해갈 새 상품의 발견(담배, 커피, 면화, 초염산, 구아노)해외로부터 자본투자는 대륙의 사회감접자본을 발전시켰다. 이런 발전은 이 대륙의 근대화에 헌신하고 있는 소수의 라틴아메리카인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현재는 가난하지만, 잠재성과 자원은 부자였다. 외국세력의 존재는 국내문제에 비해 대단찮은 구멍인 것으로 보였다. 다시 말해 근대화에 의해서만이 외국에 대항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진보의 이데올로기는 교육받은 라틴 아메리카인들의 마음을 사로 잡았다. 유토피아적 사회주의와 콩트의 실증주의가 파고 들었지만 고전적 자유주의가 여전히 우세했다. 이 두가지는 서로 연결되어있었다. 이로 인해 기혁이 단행되었다. 1) 사적 소유권과 매매에 의한 것 이외의 모든 토지점유에 대한 체계적 청산·정리. 2) 맹렬한 반교권주의
정치권력의 힘으로 제도적 근대화를 강행하는 사회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경제적 자주성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1870년대까지 라틴아메리카 내륙부에서는 지주들의 힘이 강하고 소작농의 힘이 약화된 것 이외에 변화라고는 거의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케나다를 제외하면 유럽 열강의 식민지는 두가지 지역으로 구성되어있었다. 1) 백인 입식자들이 다수파 또는 소수파로서 토착민과 공존하고 있는 지역. 2) 유럽인 상주인구가 전혀없는 보다 많은 지역들. 어쨌든 원주민들이 부딛히게 된 과제는 백인 입식자들의 진출에 어떻게 대항하냐는 것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저항보다는 훨씬 복잡한 ‘서유럽화’라는 과제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2.

인도는 이런 상황의 복잡성과 역설을 나타내는 실례다. 인도는 그 전에도 여러차례 이민족에 의해 정복당해왔다. 서유럽화 정책과 동화정책은 그 의도와 상관없이 기존의 사회구조를 붕괴시켰다.
그 결과 소수의 영국화된 엘리트가 생겨났다. 다른한편으로는 영국은 인도의 서유럽화를 바라지 않았고 또 실패하기도 했다. 인도를 영국자본주의와 경쟁시킬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서유럽화는 마침내 인도 해방투쟁의 지도자들과 그 이데올로기와 강령을 낳게 된다. 이들은 영국을 서유럽화의 모범으로 보았다. 이들은 영국이 보여주는 규율바름에 놀라워 했던 것이다.
1857~58년 북인도의 봉기는 하나의 예외였다. 반란은 전통적인 북부인도가 영국의 직접지배에 대해 행한 마지막 반격이었는데, 이것은 영국의 인도통치의 전환점이 되어 식민주의적 사기업의 잔존물인 동인도 회사는 마침내 국가기관에 의해 완전히 대체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양식이 외국사회에 의하여 급격하게, 그리고 무자비하게 파괴당하고 있다고 믿고서 이에 항거하여 들고 일어났던 것이다. 반란은 피바다를 이루고 진압되었지만 이로인해 영국은 신중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실제 병합정책은 중단되고 토후(土侯)들과 결탁하게 된다. 보다 보수적인 교소에 기반한 분할 통치가 시작되는데 이는 새로운 중산 계급 엘리트의 저항을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
식민지인도에 대한 정책과 상관없이 현실은 전통을 무너뜨려갔고 혁신적 힘을 강화시켜 영국인들과의 강들을 격화시켰다. 20세기에 접어들면 인도의 대중들도 새로운 내셔널리즘의 사상적 지도를 따르게 된다.

3.

서유럽 자본주의의 희생물이 된 곳중 대부분은 정복당한 식민지가 아니다. 명목상 독립국이면서 약체화 되어가고 분열되었던 국가들이다. 이중 구체적 사례로 이집트와 중국을 살펴보자.
형식적으로 오스만제국에 속했지만 사실상 독립된 나라였던 이집트는 농업적 자원과 전략적 위치 때문에 희생물이 되게끔 운명지어 있었다. 1) 농업자원 때문에 이집트에 경제는 소맥과 면화를 자본주의 세계에 공급하는 농업적 수출경제가 되어있었다. 이는 이집트의 통상을 국제적(영국) 시스템속으로 단단히 편입시켰다.
2) 수에즈 운하의 건설과 더불어 전략적 위치도 서유럽 열강과 자본가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집트는 이렇게 하여 농산물 공급국으로서 유럽경제에 편입되었다. 은행가들은 파샤(군사령관)들을 통해 부채를 구실로 나라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마침내 영국이 1880년대에 이나라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서구화의 과정속에 이집트는 지주, 지식인, 관리 그리고 육군 장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엘리트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집트 지식인들은 단순히 서유럽에 부정적으로 반응할 것을 주장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슬람 세계가 근대과학을 흡수하여 서유럽과 경쟁 할 수 있기를 바랬다. 이집트의 반제국주의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집트의 파샤들이 제2제정의 매혹적인 파리를 모방하는 동안 19세기 최대의 혁명이 비유럽세계 최대의 제국에서 일어났다. 태평천국의 난(1850~66)이 그것이다. 이는 여러 중요한 측면에서 서유럽이 중국에 미친 충격의 직접적인 산물이었다.
전통적 대제국 중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민중적인 혁명의 전통을 가진 나라는 중국 뿐이었다. 이러한 중국에 새로이 들이닥친 극적인 요소란 다름아닌 서유럽에 의한 정복이었다. 1차 아편전쟁(1839~42)에서 청국은 전면적 패배를 맛보았다. 제국의 허약성을 백일하에 드러낸 것이었다. 이후 중앙에 반기를 든 갖가지 반대세력의 활동이 당장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청조는 영국에 대항하기 위해 민병대를 조직했는데, 그것은 결국 민간인들에게 무기를 나눠주는 결과가 되었다. 불꽃만 튀겨도 당장 폭발이 날 상황이었다.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홍수전은 이에 반만족적(反滿族的), 이교도적, 사회혁면적 사상을 혼합시킨다. 반한은 1850년 광시성에서 일어나 급속도로 파급되어 홍수전을 천자로 만드는 ‘태평천국’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회혁명 체제였다. 주로 대중들에게 지배력을 가졌고 도·불교·기독교들의 평등사상을 끌어왔으며 사유재산을 철폐했다. 남녀평등을 외치고 담배, 아편, 술을 금하고  새금을 내렸다. 그러나 태평천국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급진적 개혁이 모든 사람들을 소외시켰지만, 지도자들 스스로도 청교도적 규범은 지키지 못해 지지가 약화되고 이윽고 지도부의 내분이 일어났다. 태평천국의 난은 서유럽이 중국에 미친 충격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가를 실례로서 보여주었다.
중국의 지배층은 서유럽적인 개혁을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다. 그러나 힘없는 청조는 결국 서유럽에 대하여 정도의 차이가 있는 여러 양보조치 가운데서 어느 것을 택하는 것 이외의 방도가 없었다. 청조는 발등의 불, 태평천국의 진압을 위해 외국의 자우너을 요청했고 이를 계기로 외국에 대한 의존상태로 굴러 떨어졌다. 사태가 막다른 시점에 이르자 서유럽열강들은 청조가 전복되는 것보다 두둔하는 쪽을 택하였다. 재래적 학자관료들은 지방군대를 모병창건하여 제국을 구해내는데 이것이 후일 군벌의 모태가 되었다.
이들 나라들의 지배자와 엘리트들은 서구 열강의 양식을 거부하기만 하는게 실제로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것이 가능해도 자신들의 열약(劣弱)함을 영속화 시키게 되는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식민지의 사람들에게 선택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중국과 이집트의 지배층은 국민적 저항의 길을 물리치고 서유럽에 종속·의존하는 길을 택했다. 이들 나라에서 민족적 재생을 통해 서양세력에 저항하기를 원한 사람들중 똑바로 서유럽화의 길로 직행하는 편에 서는 사람은 드물었다. 대다수는 서유럽을 강하게 만든 그 무엇을 자신들의 문화체계속에 체현시킬수 있게 해줄 일종의 의식개혁의 길을 택했다.

4.

그런 정책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서유럽 열강들의 마음대로 운명이 좌우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고 식민지의 근대화 주의자들을 후세의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반역자, 제국주의의 앞잡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외세는 그 나라를 목 조르고 있는 전통주의의 올가미를 부술 수 있는 존재로 보였던 것이다. 이는 서유럽의 혁명가들도 공감하는 바였다. 부르주아지가 온 세계의 민족들을 피와 진흙, 비참과 타락의 구렁텅이 속에 넣었음에도 맑스는 B.G에 의한 정복을 적극적·진보적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얻는 것은 거의 없었다.
긍정적인 면으로는, 증기선, 철로, 전신, 서구적 교육을 받은 소수의 지식인들, 무역중개로 이득을 본 소수의 사람들, 물질적·문화적 커뮤니케이션의 형성등이다. 공공질서와 치안이 잡혀갔지만 이 점들이 다른 부정적인 측면들을 상쇄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가장 명백한 것은 빈곤의 문제다. 간단히 말해 제3세계의 여러 민족들 중 태반은 서구문명의 진보로부터 별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들이 서구문명에 대해 전통을 파괴하는 것 외에 다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현실성이 아닌 가능성일 뿐이었다. 문명은 제3세계사람들에게 속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진보의 무기를 손에 들고 이 문명에서 저항한 사람들의 시대는 아직 오지 않았다.


8장 승리자들

1.

미국은 세계문제에 대하여 이때만해도 아직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에 별다른 정치적 욕심이 없었고, 따라서 미국의 영토확장은 유럽열강들 사이에서 큰 정치적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넘어갔다. 미국의 영토적 야심도 북미를 넘어서서 진행되지는 않았다.
제국주의가 국제적으로 공공연하게 유행하게 되는 19세기 말에 가서야 미국은 이와 같은 정통(소극적 간접지배)를 잠깐 중단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나라들도 이 세계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존재가 워싱턴이라는 것을 점점 더 깊이 인식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대부분, 특히 유럽은 이 기간(1848~75)에 수백만의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이민해갔고 미국이 엄청난 광대함과 진보를 통해 세계적인 기적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미국을 날카롭에 의식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대국이자 아직도 신세계였다. 미국인들은 18709년까지는 세계에서 어느만큼 규모와 중요성을 갖춘 유일한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의 공화국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공화국은 평등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부정부적 특색이 남아있고 무제한의 기회가 있는 나라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 같은 유토피아적 요소를 인식하지 않고는 19세기 미합중국 또는 이에 대한 20세기 미국을 이해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유토피아적 요소도 경제와 기술의 자기만족적 다이너미즘 아래서 빛을 일어가게 된다. 원래 이 유토피아는 자유로운 땅위에서 독립 자영농의 유토피아였다. 그것은 대도시나 공업세계와는 보조를 맞출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19세기 후반만 해도 아직 대도시나 대공업의 지배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아직도 시골에 살고 있었다. 이 자영농의 유토피아는 1862년 ‘자영농농지조성법’의 제정에서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유토피아는 실패했다. 자유로운 토지의 은혜를 진짜로 받은 자는 투기꾼들, 금융업자, 자본주의적 기업가들이었다. 미국역사의 가장 뿌리 깊은 테마인 남북전쟁과 서부개척은 이 시기의 일이었다. 이 두 사건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남부와 북부의 대립은 서부 개척으로 가소고하 되었기 때문이다. 중서부 지방에 노예제를 도입하는 문제를 에워싼 분쟁이 공화당의 성립을 촉진 시켰다.
서부지역에 입식자들의 정착이 확대된 것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철도와 켈리포니아의 발전이 이 시대에 그것을 가속시켰다는 것뿐이다. 1849년 以後 서부는 끝모를 변경은 아니었다. 그 대사니 동부와 발전하는 태평양 연안 사이에 텅빈 광대한 공간이 있게 되었다. 미시시피 강 서쪽의 대초원시대에 대한 농민들의 입식은 천천히 진행되었다. 이로인해 인디언들이 절면되기에 이르렀다. 산악지대는 농경정주지역이 되지 못하고 탐광자와 광부의 신천지에 머물렀다. 남서부는 질적으로 가축의 고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wild west’란 강렬한 신화였다. 그것은 아주 잠깐 동안, 남북전쟁과 1880년대 채광붐과 출산붐 쇠퇴의 중간시기에 해당된다. 서부가 미개·무법천지였던 것은 인디언 탓이 아니라 미국정부와 그 법률상의 여러 제도 탓이었다. 그보다는 효과적인 제도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을 참작하더라도 그 자유의 꿈을 이상화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명백히 백인들에게만 주어지는 꿈이었다. 자유의 꿈이란 B.G적 사회의 사기업 대신 도박과 황금, nrjschd이 판을 치는 세상을 바란 가난한 백인의 꿈이었던 것이다.
서부개척에 대해서는 크게 애매한 점은 없다고 해도 남북전쟁(1861~65)의 성격과 원인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서 끝없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남부의 노예들은 소규모였고 농가나 가정에서 일한 정도라서 노예제라고 명확히 규정하기는 어렵다.
노예제가 남부사회의 중심적 제도였지만 문제는 남북이 상호공존이 아닌 분리와 내선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이미 노예제는 B.G의 도덕적 혐오와 상관 없이 경제적 이유로 세계적으로 사라지는 추세였다. 경제적인 관점에서 북부는 농업지역인 남부에 대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문제는 정치적인 것이었다. 남부의 면화무역이 자유무역을 추구한 반면 북부의 공업은 보호관세의 편에 있었다.
북부의 경제적 우위는 남부에게 정치적 힘을 고집하게끔 하였다. 남부는 북부의 경제발전과 서부진출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북부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남부가 선택할수 있는 것은 투쟁을 포기하고 연방에서 이탈하는 것이었다. 전쟁은 치열하였다. 북부는 군사적으로 열세였지만 생산력과 기술의 우위로 승리하였다. 북부의 승리는 미국 자본주의의 승리였으며 근대 미국의 승리였다.
남북전쟁 이후 미국 자본주의는 극적인 속도로 인상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와 동시에 ‘도적귀족’의 별명이 붙은 해적같은 대사업가에게는 상당한 기회를 제공했다. 미국의 도적귀족들은 다른 나라의 자본주의 백만장자들과 다음과 같은 세가지 점에서 구별된다. 1) 엄청난 부패에 대해 아무런 통제가 없었다는 점. 2) 구세계의 기업가들이 기술을 요하는 건설에 넋을 빼앗겨 매달려있었던 것과 달리 미국의 도적귀적들은 치부(致富)를 위해서는 특정수단에 매달리는 일이 없었다는 점. 3) 대다수가 자수성가한 사람이며 그 부나 사회적 지위에 있어 어떠한 경쟁상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들은 누구보다도 미국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2.

비유럽국가들 중에서 서양의 수법을 써서 그들을 무찌르는데 성공한 나라는 일본뿐이었다. 19세기중반만 해도 서구인의 눈에 일본은 동양의 다른 다라들과 하등 다를바가 없었다. 일본이 강대국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은 그대로 두었어도 독자적으로 자본주의화 되었으리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확실한 것은 일본이 다른 비유럽 국가들에 비해 서양을 모방하는데 보다 적극적이었고 또 모방을 할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서구세력의 힘입에 대해 어떤 형태로 반응해야 할 것인지 지식인들 사이에서 열띤 논댕이 불붙었으나 봉건권력은 무력했을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1868년에 철저한 위로부터의 혁명인 메이지 유신의 실현을 보게 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단지 보수적 배외주의적 반동을 그 내용으로 했다면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반 막부 세력들의 주장이 강령이 되지는 않았으며 권력을 장악한 젊은 무사들이 사회혁명세력들을 대표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이들 모두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변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일본과 프로이센 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는 것으로 종종 거론되어 왔다. 자본주의가 B.G.R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로부터의 개혁에 의해 추진된 점, 전시에 나라를 가공스러운 강국으로 만든 집요한 군국주의적 색체, 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다. 프로이센은 자유주의적 B.G가 강력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위로부터의 개혁의 주도권과 방향을 이끈 것은 봉건주의자들의 일부계층에서 나왔다. 메이지 유신은 진정한 의미의 B.G.R이라고 볼 수는 없고 다만 기능적으로 부르주아혁명의 한 측면과 동등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사정들이 메이지 유신의 급진적 특성을 더욱 부각시켜준다. 새정부는 봉건적 행정지배를 일소하고 중앙집권적 통치기구를 구축했다. 재정개혁으로 정부세입이 확충되었는데 이로 인해 귀족과 무사계급은 경제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또한 병역의무제를 도입하여 무사계급의 마지막 보루마저 폐지시켰다. 이들 새 조치에 의해 농민들과 무사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큰 어려움 없이 진압되었다.
새정부는 계급적 차별을 철폐하려 한 것이 아니다. 계급구분을 단순화 - 현대화 시켰을 뿐이었다. 출생이 아닌 부와 교육수준이 신분상의 지위를 결정짓게 했다. 이런 변혁은 서구의 B.G사회와는 다르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국가재건이라는 목적에 따른 수단일 뿐이었다. 때문에 반발은 소수의 소외된 농민과 무사계급에 국한되었다.
서유럽화의 노력은 놀라운 것이었다. 그것은 희생을 각오한 것이었고, 서양화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과도한 성열을 가지고 그 일에 헌신하였다. 그러나 서양화란 기독교를 포함하여 서구의 진보적인 이데올로기 또한 내포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일본의 서구화는 당초의 목표와 달리 중대한 딜레마에 봉착하게 된다. 서양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서로 대항하는 여러제도와 사상의 복합체였기 때문이다. 실제적인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정치·이념적 선택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불과 2~0년이 지나기 전에 서구적 자유주의에 대한 반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일부 서구의 반자유주의적 전통에 의해 조장되었다. 그리하여 신전통주의와 선택적인 근대화의 결합이 대세를 잡게 되었다.
일본은 혁명 없이도 무서운 강국으로 발전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아직 대단치 못했다. 한반도에 대한 전쟁은 내부적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회피되었다. 이 때문에 서양은 일본의 변화를 과소평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말기에 일본은 주로 B.G 서구문명의 승리와 우월성을 다른 모든 문명들에게 보여주는 생생한 증언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당시 교양있는 일본인들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9장 변화하는 사회

1.

자본주의의 빛나는 승리에도 불구하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운동은 계속되어왔다. 여기서는 이 시기의 사회적, 정치적 변혁을 위한 운동을 있는 그대로 살펴본다.
맑스는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 곧 유럽혁명이 재현되기를 바랬다. 그러나 1857년의 불황에도 혁명이 일어나지 않자 그들은 가까운 미래에 혁명을 기대하지도 바라지도 않았다. 맑스는 평화적 권력장악과 구질서의 폭력적 파괴의 두 가지 가능성을 모두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맑스는 이에 중심부가 아닌 주변부의 혁명전략을 예견한다. 1) 식민지 R, 2) 러시아 R, 3) 미국 R. 식민지 혁명은 그 자체보다 식민모국의 혁명을 촉진하는 것으로 구상되었다. 러시아 혁명은 단지 가능성이 아닌 확실성을 띄었다. 미국의 역할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맑스는 농업불황으로 미국농업사회가 붕괴하고, B.G의 정치권력장악과 성장하는 미국 대중 P.T운동을 강조했다.
당시로서는 맑스의 견해가 영향력 있는 정치세력을 대표했던 것은 아니었다. 맑tm가 인터내셔널의 막후 실력자이긴 했지만 인터내셔널은 결코 맑스주의 운동은 아니었다. 인터내셔널은 온갖 좌익집단의 잡동사니로 구성되어있었다.
당시의 혁명들은 모두 1848년의 체험을 소화·절충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이시기 이미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는 존재를 감추게 된다. 이들은 자본주의적 모험으로 변형, 대체되거나 협동조합등 운건한 방향으로 틀어졌다.
이에비해 프랑스 혁명의 후예들은 살아남았다. 이들은 급진적 민주주의자에서 블랑키즘까지 다양한 조유를 포함하고 있었다. 블랑키즘은 파리코뮌때 반짝하다 사라졌지만 급진적 민족주의는 잘 버텨냈다. 이들의 강령은 소시민의 열망과 표를 바라는 자유주의 정치가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적 슬로건은 더 이상 아니었다.
무정부주의는 1860년대라는 시대의 산물이었다. 그 시조는 프루동과 바쿠닌이다. 프루동은 1) 비인간화된 공장제 생산대신 서로 돕는 생산자 집단에 의한 생산. 2) 정부에 대한 증오, 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무정부주의에 사상적으로 공헌했다. 바쿠닌은 사상이 아닌 운동으로서 아나키즘에 공헌했다. 아나키즘은 공업ㅗ하이전 과거가 현재에 반항하는 것인 동시에 또 그 현재의 산물이었다.
무정부주의는 정치적으로 별 중요성이 없었다. 그것은 시대를 비뚤게 비춰주는 거울일 뿐이다.
이시대 가장 흥미있는 운동은 러시아의 인민주의 운동이었다. 인민주의는 당시 강력한 정치적 힘은 없었지만 10세기의 볼세비즘과 후진국 사회운동의 시조였다. 또한 19세기 유럽 혁명들과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의 직접적인 연결고리였다.
러시아에서 혁명은 필연적으로 보였다. 권력을 받치는 중산계급이 허약했고 농민지재세력 역시 불안정했다. 1848년만해도 혁명의 물결에 끄떡없었던 이 체제는 대외적으로 생각했던 것 보다는 약하다는 것을 드러냈다.
러시아의 약점은 정치·경제적인 것이었다. 챠르독재체제는 약점을 드러냈다. B.G와 P.T는 다 같이 미약했다. 정치적으로 의미있는 집단이라면 수적으로는 극히적었지만 그 존대가 명확한 인텔리겐챠였다. 러시아 인텔리들의 특징은 그들이 자본, 관료세계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이 다른 지식인층과 구별되는 점은 두가지다. 1) 특수한 사회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 2) 민족지향적이기 보다는 사회지향적인 정치적 급진주의를 지향한 점 이 그것이다.
러시아는 명백히 시민사회가 아니었으며 온건한 자유주의마저 혁명적으로 보았다. 1)과 같이 러시아의 지식인들은 자본가, 관료로 진출하는 길로 나아가지 못했다. 2) 번 역시 러이사에서는 불가능이었다. 러시아는 이미 독립국가였고 민족주의적 슬로건은 황제, 교황들 반동세력의 소유물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지식인들은 후진국 백성으로서 근대화주의자, 서유럽화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지만 단순한 서구화주의가자 되지는 않았다. 당시 유럽자본주의는 러시아가 실현할 수 있는 모델로서 가능성이 멀어보였고,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혁명적인 잠재력을 가진 대중은 농민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인민주의는 20세기 제3세계 혁명운동에 관해서도 많은 것을 조명해준다.
인민주의자들은 근대화주의자였지만 그들의 근대는 사회주의적 근대였다.
인민주의 운동은 학생집단에게 새로운 중핵부대를 찾아냈다. 더 이상 학생은 귀족의 자재가 아니라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되어져 있었다. 그들은 블랑키·자코벵주의적 규율아래 중앙집권화된 비밀조직을 결성하고 테러활동을 했다. 이론적 입장과 상관없이 실천면에서는 볼세비키를 예고해주는 것이었다.
인민주의의 업적과 인원동원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인민주의가 중요한 것은 요지부동의 거인, 러시아를 혁명의 힘으로 무너뜨릴 수 있다는 가능성의 징후를 드러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인민주의자들은 그것에 그친 것이 아니다. 그들은 19세기의 주요혁명사상을 시험하고 결합하여 20세기의 혁명사상으로 발전시켰다. 다른 후진국들이 비독창적이거나 무분별하게 서구의 사살을 받아들인 반면에 러시아의 좌익은 최신의 지적성과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이후에는 유럽의 사회학, 인류학, 역사방법론을 변형시키게 된다.
사회혁명가에 이어 사회혁명 그 자체에 대해 알아보자. 이 시기 가장 규모가 큰 혁면인 태평천국의 난은 사실 서양의 관찰자에게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유럽의 혁명사상과도 별 관련이 없었다. 빈번했던 라틴아메리카의 군부쿠데타는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유럽의 혁명은 온건한 자유주의에 흡수되거나 에스파냐혁명과 같이 순수히 국민적인 것으로 되어버렸다. 새로운 1848년은 일어나지 않았다. 겨우 1871년의 파리코뮌이 있었을 뿐이다.
파리코뮌은 경이적인 것, 영웅적, 극적인 것이었으며 비극적인 것이었다. 사실로서 파리코뮌의 성취는 그것이 실제로 하나의 정부였다는 것이다. 설령 파리코뮌이 B.G적 질서에 심각한 위협이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단지 그것이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B.G적 질서를 혼비백산케 했다. B.G의 반응은 공포에 휩싸인 히스테리적 반응이었다. 각국의 정부가 두려워 한 것은 ‘사회혁명 일반’이 아니다. 'P.T.R', 바로 그것이었다.
파리코뮌은 정녕 노동자의 반란이었다. 또 그것은 S.R로 부를 수 있다. 비록 그 사회주의가 협동조합을 위시한 1848년 이전의 꿈이었지만 그것은 코뮌 자체의 탓은 아니다. 코뮌은 포위속 권력이었고 보불전쟁 항복에 대한 반응이었으니 말이다. 포위당하는 정부와 B.G에게 버림받은 파리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길은 대중의 혁명적 동원과 새로운 자코벵파 체계, 그리고 사회공화주의 국가의 형성이었다.
코뮌파들이 전투중에 얼마나 죽었는지는 모른다. 전투가 끝난 후에도 수천명의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점잖은 어르신의 복수였다. 그 후로 파리의 노동자들과 ‘점잖은 어르신’ 사이에는 강물이 흐르게 되었다. 또 그 후로 사회혁명가들은 권력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에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제3부 결과

10장 토지

1. 1848년 당시만 해도 세계의 인구는 유럽에서 여전히 농촌인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1870년대 중·후반까지 큰 변화가 왔지만 거의 예외없이 농촌인구는 여전히 도시 인구를 앞지르고 있었다. 따라서 대다수 인류에게 삶의 운명은 토지, 그리고 토지에서 일어나는 일에 의하여 좌우되었다.
물론 각 지역들은 (주로 온대의 곡물대량생산 지역들) 제도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성장일로에 있던 세계 모든 농업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었던 점은 이들 농업이 공업을 기반으로 하는 세계경제에 종속되어있다는 사실이다. 농업의 자본주의적 이행에 따른 사회적 변동은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에 묶여 살아온 사람과 토지 사이의 전통적인 결박관계를 풀어놓았다. 이 시기에는 농산물 거래의 엄청난 동시적 성장과 농지의 현저한 확장 그리고 대규모의 토지로부터의 인구유출을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두 가지 이유로 19세기의 3사분기 중에 특히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1) 세계경제의 유래 없는 광범화와 2) 유래없 는 깊이가 그것이다. 기술은 상품을 수출하기에 먼 지역을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해외의 특정 지역들을 선진세계로 수출할 특정 산물을 지배하는 특화생산지로서 발전시키는 첫 시도가 시작되기도 했다. 세계시장지향의 농업형태는 1870~1930년대에 이르는 제국주의적 세계경제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영속적인 것이 되었다.
철로를 통해 생산물의 대량유통이 가능해졌고 가축의 처리가공법도 개발되었다. 이런 농업의 발달을 가져온 동인은 수요였다. 도시와 공업지역에서 점증하는 식량수요, 노동수요, 이 두 가지를 결합해 대중의 소비수준을 향상시켜 1인당 수요를 향상시킨 호경기가 그것이다.
그리하여 세계농업은 점차 두 부분으로 분할되어갔다. 1) 국내적 또는 국제적 자본주의시장에 의해 지배되는 농업이었고, 2) 그런 시장으로부터 독립되어있는 농업, 2)번의 경우에도 매매가 없거나 전적으로 자급자족적인 것은 아니었다. 이 차이의 본질은 자연에 의한 흉작에 시달리는 농업경제냐, 생산과잉이나 경재의 격화 그에 따른 가격폭락의 괴롭힘을 당하는 농업경제냐에 있었다. 1870년대에 이르면 세계의 농업은 후자의 상황에 놓여 농어불황을 세계적 규모의 것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폭발적인 성질의 것으로 만들었다.
전통적 농업은 시장의 영향을 받지 않거나 잘 견디어 했다. 이들 지역 바깥의 근대적세계한 이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시장부문은 그 운명이 시장의 성격, 어떤 경우는 분배 매커니즘의 성격이나 생산자의 특화정도가 농업의 사회적 구조에 의해 좌우되었기 때문에 더욱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그 한 쪽 극단에는 새로운 농업시대에서 사실상 모노컬쳐가 형성되어있었다. 이런 경우에는 이해관계의 일치로 인해 대규모 생산자와 대 무역상, 수출입항구의 매매중개인의 이해와 유럽시장이나 공급국을 대표하는 국가정책 사이에 밀접한 생산관계가 이루어졌다. 농산물 수출의 보상으로 비농업적 생산물을 받아들이는데 정신을 팔게 되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도시지역의 성장·확대가 갖가지 식료품에 대한 수요를 급증시켰다. 원거리 수송이 불가능한 상하기 쉬운 일상작물을 재배하는 판매하는 사람들은 세계 시장경쟁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1870~80년대의 대농업 불황은 주곡생산의 국내-국제적 불황이지만 혼합농업, 소농업, 특히 부유한 소농에 의한 상업적 농업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소농층이 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공업화가 발전된 일부 국가에서는 적중될 것 같아 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보유지가 작가 가족을 부양 할수 없는 사람들의 P.T化, 상대적 과잉인구의 유출로 농민층이 붕괴되어 갔다.
자본주의 결제성장은 대량수요에 의해 농업형태를 변혁시켰다. 농지확대 규모가 무척 컸는데, 신대륙처럼 유럽역시 놀랄만한 것이었다. 농업의 생산력과 생산성이 증대되었지만 더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변화가 얼마만큼 공업화에 힘입은 것인가, 공업화와 같은 방법과 기술이 어느 정도 농업에 이용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총체적이고 대규모의 변화라고 보기는 어렵다. 수확기술만이 예외적으로 혁신된 분야였다.
그러나 공업생산이 농업자본에 미친 공헌은 컸다. 근대과학은 유기화학 - 비료생산으로 농업자본에 큭 공헌했다. 그러나 비료사용은 크지 않았고 오히려 천연비료의 대규모 무역이 성행했다.(칠레의 구아노)

2.

근대 경제에서 농업의 기능은 식량, 원자재만이 아니라 노동력 공급원의 구실도 해야 한다. 그러나 농업국가에서 이 기능이 효과적으로 수행되지는 않았다. 그 장애요인은 1) 농민들 자신, 2) 농민들을 지배하고 있던 사회적, 정치적 지배자들, 3) 전통사회의 重壓. 이 세 가지 현상은 모두 자본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자본주의와 충돌할 운명이었다.
자본주의 경제법칙은 농민들의 견해와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물론 농민층의 존재는 노동력의 공급, 완고한 보수성으로 국가를 지탱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그 정치적 안정을 떠받쳐주고 농업적 기반을 허물어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선진적 서구의 변경지역과 종속적 주변주에서 그러했다.
몇 가지 이유로 노예제 플랜테이션, 농노제농장, 전통적 비자본주의적 농민경제 방식이 특별한 압력을 받고 있었다. 이유는 매우 복잡하다. 어떤 경우는 정치적 요인-혁명의 위협등-이 결정적이었다.
노예제는 빠르게 쇠퇴하고 있었는데, 이는 어느 정도는 경제적 이유였다. 노예제 플렌테이션은 기계화와 노예노동자 쌍방에 대해 투자를 지속할 수 없었고, 때문에 노예노동은 자유노동이 아닌 도제살이 계약노동으로 대체 되어갔다.
농노제는 그 자체로 자유노동을 필요로 하는 공업의 발전을 저해했다. 농노제는 시장에 대해 적정하고 합리적으로 대응할 수가 없었는데 농업시장무역의 발달이 농노제를 붕괴시켜갔다. 그러나 이러한 비자유노동의 폐지는 단순히 경제적으로만 분석될 수는 없다. 부르주아사회의 여러 세력들은 이러한 제도가 개인적 이익의 자유로운 추구에 입각한 시장사회와 양립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반대했던 것이다. 역으로 노예소유자나 봉건지주들은 그것이 그들의 사회나 계급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라 생각하여 완강히 저항한 것이다.
노예경제의 폐지가 과연 어떤 경제적 이익을 가져왔는지 그것이 얼마나 되는 것인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러시아 역시 농노해방이 왜 향신층과 농민들을 위해, 그리고 자본주의적 농업발전을 낳지 못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이에 대한 답은 자본주의적 조건게서 농업의 가장 바람직한 형태, 특히 대규모 농업에서 최선의 형태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
자본주의적 농업에는 두 가지 변형이 있다. 1) 프로이센形: 자본가적 지주·기업가가 돈을 주고 노동력을 고용하여 대규모 농장을 운영 2) 아메리카形: 갖가지 규모의 독립적인 상업적 영농가들이 주축이 되어 작은 규모나마 필요에 따라 노동력을 돈으로 고용하기도 하는 경우, 이 두 가지 모두 시장경쟁을 전제로 하고 있다. 대규모 농장은 자본주의의 승리 이전에도 생산물의 대부분을 판매했지만 대부분의 농토는 본래 자급적인 역할에 국한되었다. 그러므로 대규모 농토나 플랜테이션의 이점은 시장용 농업잉여물을 발생시킬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농민층이 前상품경제적 상태에 머물고 있는 지역(러시아, 미국)에서는 대농지경영은 이점을 유지했지만 노예제나 농노제 없는 노동력을 요구할 수 없는 곳이 많아졌다. 그래서 지주들은 소작제 영농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프로이센형이 체계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듯이 아메리카형 역시 그러했다. 아메리카형은 본질적으로 현금작물을 재배하는 다수의 기업적 농가의 창출에 의존했다. 이는 최소규모이상의 토지가 필요했다. 농민층의 대다수는 토지가 충분하면 생계형 영농에 머물렀고 그렇지 못하면 겸업노동에 기대서 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노예제, 농노제의 폐지가 농업의 만족스러운 자본주의적 해결을 가져오지는 못했다. 농노제가 오래 존속한 경제 외적 강제가 강했던 지역(러시아, 루마니아)에서 농민층은 동질적 집단으로 남아있었고, 1870년대의 대불황은 농촌에서 불안과 농민혁명 시대의 박을 올렸다. 그러나 농노해방이 보다 합리적 형태로 이루어졌다고 해도 이러한 사태를 피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자유주의화의 중요한 결과는 농민층의 불만을 한층 강화시킨 것이다. 이것이 새로운 점은 이제 그것이 정치적 좌파에 의해 동원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직은 유럽에서도 좌파가 농민들에게 영향을 주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원래 좌파들은 세속적, 반교권적이라 농촌과의 친화성이 적었다.
농촌의 생활양식에도 변화는 있었다. 철로가 생기고 국어를 가르치는 초등학교가 늘어났다. 무엇보다 문자해독자와 문맹자의 구분이 생김으로서 그것이 변화의 강력한 요인이 되었다. 문자해독여부가 사회적 불평등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교육에 대한 열정은 남성보다 여성들(어머니)이었던 것 같다. 아마도 이런 근대화를 가장 강력하게 진행시킨 사람은 도시로 식모살이를 나간 농촌의 젊은 소녀들이었을 것이다.


11장 인간의 이동

1.

인구이동과 공업화는 함께 진행되었다. 세계적인 근대경제의 발전이 인구의 대규모 이동을 요구했고 새로 개선된 교통기관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당시의 인구 대이동은 충분히 예상되었다. 그러나 이전에는 점점 활발해져가는 흐름이던 것이 갑자기 쏜살같은 급류로 변했다는 느낌을 주었다.
이민의 경우(미국) 대규모 이주라고는 해도 후대의 기준에서는 그다지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이민에서 가장 큰 한계는 지리적 요인이었다. 국제적 이민의 대부분은 유럽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대부분의 유럽인들이 농촌에 살았으므로 이주자들도 대부분 농촌출신이었다. 19세기 이주민들은 많은 노력을 했으나 경제적으로 성공한 예는 드물었다. 이주민의 유입과 도시화를 동일화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농촌에서 농촌으로의 인구 재배분이 무시될 수는 없다고 해도 농업으로부터의 인구유출만큼 현저한 것이 아니었다. 이민과 도시화는 동시에 진행되었다.
국내에 머무른 이동은 새로운 문제를 야기 시키지는 않았다. 국내 여성 이주자들은 중간에 농민과 결혼하거나 다른 도시에서 직업을 가지기 전까지는 가정부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남자들도 그의 출신지에서 가졌던 전통적인 직업에 종사했다. 설령 기술이 없고 기회가 없어도 그 도시 출신의 가장 가난한 계층보다는 나았다.
국외 이주의 경우는 문제가 복잡했다. 언어의 문제를 차치하더라도 이민에는 이주민들이 어느 나라에 속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뒤따랐다. 물론 시민권의 변경이 출신국과의 인연을 절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정반대였다. 미지의 환경에서 이주민들은 같은 처지의 사람들과 모여살았다. 이주민 1세대는 신생활의 기술을 배우려 해도 이제까지의 관습과 향수에 끌려 결국 그들 스스로 게토 속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민은 가장 기본적인 문제인 물질적 곤란을 야기 시켰다. 그 당시 이민에 송y되는 비용은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는 교통수단의 개선과 질 낮은 설비에 힘입은 것이다.
미국이나 호주에서 높은 임금 덕분에 이주에 사용한 비용을 쉽게 갚을 수 있었다.
19세기 중반 B.G는 유럽대륙이 빈민으로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있었고, 이들이 외국으로 보내지는 것을 좋게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입장에서 볼 때 이는 오판이었다. 그들을 고용하여 일을 시켰으면 경제적으로 더 큰 이익을 얻을 것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역으로 신세계의 경제는 구세계의 인구유출로 큰 이익을 얻었다.
이민의 사유는 압도적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정치·종교상의 이민은 이 시기에 많지 않았다. 생활기반의 파괴가 그런 두려운 모험을 강행하게 해주었다. 이민은 대중에게 흔한 경험으로 다가왔다. 또한 이미 정착한 이주민들에 대한 소식들도 이민을 증가시켰다.
그러나 이민이 반드시 영구적이지는 않았다. 많은 이주민들은 금의환향의 꿈을 꾸었다. 물론 대부분은 그곳에서 기반을 잡지 못해 되돌아갔다. 이민이 대량증가한 이유는 상당수 영주를 목적으로 하지 않은 일시적 이동이 혼합되었기 때문이다. 철도의 급격한 확장은 새로운 뜨내기 일꾼을 필요로 했다.
이런 일꾼들의 그룹화는 구세계보다 신세계에서 두드러진다. 그만큼 구세계의 사회가 더 구조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2.

가난한 사람들의 여행이 이민이라면, 중산계급과 부유층의 여행은 점점 더 관황적인 여행으로 변해갔다. 관광여행은 기본적으로 철도와 증기선, 우편제도의 산물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오락이 아닌 필요에 의해 여행할 뿐이었다. 귀족들의 여행은 현대 관광여행과는 다르게 하인과 짐마차들의 행렬을 이끌고 철마다 도회의 저택과 시골의 저택사이를 옮겨 다녔다.
산업자본주의는 새로운 형태의 오락적 여행을 만들어낸다. 1) B.G에 의한 관광여행, 여름  휴가 여행. 2) 대중에 의한 기계화된 당일치기 여행. 이 두 가지는 모두 증기기관 발달의 직접적 산물이었다. 증기관에 의한 수송은 많은 인원과 화물은 규칙적이고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당일치기 여행은 1851년의 대박람회에 의해 생겨난 것이었다. 수도의 재개발은 지방 사람들에게 새로운 구경거리를 제공해주었다. 그러나 중류계급사람들은 가족의 여름휴가나 온천으로 치료차 떠나는 여행이 많았다. 바닷가에서 여름을 보내는 문화는 아직 없었다. 더운 나라의 부자들은 산악지대에서 여름을 보냈다.
여기서 여름과 겨울을 이용한 장기체류와 관광여행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이시기 등산이 앵글로 섹슨계 지식인, 자유주의적 전문직 종사자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여행안내서에 의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이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안내책자나 철도회사, 호텔업자들이 염두에 둔 것이 이들이다. 이 시기 여행비용의 폭등에도 이들은 그만큼을 지불할 여유는 있었다.
1870년대의 세계가 여행과 인구유출이 지배한 시대는 아니었다. 당시 지구상의 사람들 대다수는 태어난 곳에서 죽어갔다. 그러나 사람들은 서서히 그들의 본거지를 이탈하여 새로운 환경에 둘러싸여 사는데 익숙해져갔다.


12장 도시, 산업, 노동자계급

1.

철도를 별도로 친다면 도시는 공업화된 세계의 가장 두드러진 외면적 상징이었다. 도시화는 1850년 이후에 급격히 진행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당시의 도시 인구집중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의 전형적인 공업도시는 당시 기준으로 보더라도 중간 규모의 도시에 불과 했다. 공업화 이전부터 유명했던 도시들은 실상 새로운 종류의 생산업을 거의 끌어들이지 못했다. 따라서 전형적인 신흥 공업지대란, 따로 떨어져있는 마을들이 커가면서 하나로 합쳐 소도시가 되고 또 그것들이 발전하여 대도시로 형성되는 것이 그 일반적인 형태였다.
이러한 공업지대는 건물들이 끝없이 늘어선 20세기의 工業地帶와는 달랐다. 인접한 전원과의 대조적 풍경이 공업화의 충격적 이미지였다. 이런 사정으로 새로운 공업화 지역에서는 노동자들이 半農業的인 상태로 남아있을 수 있었다.
이 당시에 인구 20만 이상의 대도시는 공업도시라기 보다는 상업, 교통, 행정과 기타 각종 서비스의 중심지였다. 인구집중과 서비스업은 상호작용하며 성장했다. 도시 거주자들의 대다수는 노동자였다.
이런 도시들은 놀라운 속도로 증가했다. 그러나 도시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도시빈민의 존재는 필요악으로 용인되었지만 결코 환영받지도 않았다. 당시 도시계획담당자들에게 貧民은 公共에 해로운 존재로 폭동의 잠재요인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빈민의 집중을 막고 이들을 분열시켜야만 했다. 빈민 밀집지역의 해체는 철도 부설비용과 그 반발이 적다는 이유로 철도의 幹線, 支線帶가 이 지역을 지나며 건설되었다.
19세기 중반의 도시문제를 언급하자면 누구나 ‘과밀’과 ‘슬럼’을 언급 안할 수 없다. 도시의 급속한 발전이 계속 될수록 과밀상태는 심해졌다. 위생등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도시 과밀문제는 더 심화되었다.
19세기의 3사분기에 세계적 규모의 도시 부동산 붐, 건축 붐이 일어났다. 땅값이 비싼지역의 건물들은 고층화되어 승강기를 낳았다. 역설적으로 중간계급이 발전할수록 자금은 그들 자신의 주택, 사무소, 백화점 또는 그 시대의 위세를 과시하는 건축물로 돌려졌고, 그럴수록 L.C에게 돌아가는 몫은 공공시설과 같은 일반적인 사회적 지출을 제외하고는 상대적으로 그 만큼 더 줄어들었다.
사람들이 도시화 되어감에 따라 시골이나 산업화 이전의 小邑에서 버릇들인 생활양식이나 관습은 부적합한 것이 되었거나, 지킬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2.

공업적인 대기업은 그 당시만 해도 그토록 중요한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기 중공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훨씬 대규모적이었고, 그것이 자본집중을 가속화시켜 지배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철도회사는 특히 거대한 기업이었다. 탄광은 대부분 개인 소유였고 어떤 경우는 매우 소규모적이었다. 그러나 수직적, 수평적 기업합병으로 수천 명의 생활을 좌우하는 대기업 집단이 생겨나는 일이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특히 중공업은 기업주의 성공과 호의에 주민전체의 운명이 달린 기업도시를 출현시켰다. 기업주의 배후에는 법과 國家權力이 버티고 있었으며, 국가도 기업주의 권위를 필요하면서도 유익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크건 작건 기업주가 기업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자본의 조달과 운용에 관한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런 식으로는 대규모 사업에 재투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저축을 동원하여 자본을 필요로 하는 기업으로 돈이 더 들어가게 함으로서 자가금융을 대신케하는 - 주식회사 제도가 고안되었다. 19세기의 3사분기는 이 같이 자본동원을 위해 갖가지 실험이 도입되었다. (산업금융회자, 투자은행, 증권거래소...)
후진적 경제일수록 저축을 동원하여 투자하는 대규모의 방법에 의존하였다. 사금융과 자본시장이 넉넉하지 못한 非 서유럽에서는 은행이나 그와 유사한 기관이 개척자로서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활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금융은 기업의 정착에는 영향을 미쳤지만, 조직에는 영향을 주지 못했다. 기업의 가부장적 지배의 모델은 19세기 후반의 산업분야에서 점점 더 부적합한 것이 되어갔다.
사기업들은 가장 무제약적이고 무정부적이던 이 시기에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규모 경영모델, 즉 군대식, 행정관료식의 모델을 좇아 후퇴하는 경향으로 흘러갔다. 군대식 위계질서제는 조직면에서는 분명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자에게 충성심을 갖게하고 부지런하고 얌전하게 일을 시켜야 하는 전반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B.G는 충성심, 규율, 분수에 맞는 만족 따위를 역설했지만 노동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노동자들은 되도록 빨리 노동자에서 벗어나길 바랬다. B.G들은 노동자들은 마땅히 가난해야 한다고 믿었다.
19세기 노동자들의 생활을 지배한 단일한 요인은 ‘불안정성’이었다. 자유주의 세계의 불안정이란 富는 물론, 진보와 자유에 대한 값으로 지불해야 하는 희생이었다. 경제적 확장이 부단히 존재하는 불안정성을 경감시켰다. 그 진상은 경제적 붐이 국내나 해외로 이민간 사람들에게 전대미문의 규모로 취업의 기회를 열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산계급과는 달리 L.C의 처지는 窮民과 종이 한 장 차이도 있을까 말까 헸으므로 끊임없이 불안정 상태에 놓여있었다. 그들은 저축한 여력도 별로 없었다. 노동자와 그의 가족들은 그들 앞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 즉 출산과 노령과 퇴직의 위험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이고 불가피한 인행행로였다. 억압받는 사람들(L.C남녀, 그리고 모든 계급의 여성)의 경우 인생에서 꿈이 활짝 피는 시기는 젊을 때에 한했다. 따라서 경제적 자극이나 불안정성들은 작업장에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열심히 일하게 할수 있는 정말 효과적인 ‘전반적’ 매커니즘이 될 수 없었다.
중산계급은 가장 높은 임금과 지극히 정규적인 고용의 혜택을 받는 가장 훌륭하고, 진실하고, 유능한 노동자들이 바로 노조를 결성하려하는 장본인들인 경우가 허다하다는 사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B.G들은 이들은 어리석은 오합지졸이라는 신화를 만들어냈지만, 실은 노조는 그런 진실하고 유능한 사람들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이는 당연한 것이다. 고용주에 대항하는 노동자란 조합설립을 가능하게 할 힘, 고용주와 맞서 교섭할 수 있는 힘을 필요로 했다. 그들은 시장기능의 힘만으로는 스스로의 삶의 안정성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는 자들이었다.
노동자가 조직되지 못한 경우네는 노동자들 자신이 고용주에게 노무관리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스스로 제공해주었다. 그들은 일을 하고 싶어했고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작고 하찮은 것들이었다. 한편 숙련노동자들은 기능에 대한 지식과 자부심이라는 非資本主義的 동기에 의해 행동했다. 그래서 그들은 능률을 높이기 위해 고안된 방법들에 대해 종종 분노를 터트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필요이상으로 더 일하지도 않았고 느리고 적게 일하지도 않았다. 이 같은 태도가 사실은 노동자에게 유리하기 보다는 고용주에게 유리했다. 고용주는 싸게 사고 비싸게 판다는 원리에 의해 행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경제적 거래보다 인간다운 삶에 우선했다.

3.

노동자들은 실상, 환경, 사회적 출신 성분, 경제적 조건, 언어와 생활관습면에서 다양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육체노동과 착취에 대한 공통된 의식으로 실상 단결되어있었다. 이 단결은 임금소득자라는 공동운명에 의해 점점 더 강화되어갔다. B.G들의 富가 증대되어가면서 L.C와 B.G는 점점 더 멀어졌고, B.G의 처지는 점점 더 자기 폐쇄적으로 되어갔다.
노동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양극화와 어울러 적어도 도시에서는 어느 정도 공통적인 생활스타일, 그리고 공통적인 사고의 스타일에 의해 그 자신들의 공통성을 자각해 나갔다. 의심할 바 없이 ‘노동빈민’이라는 서로 이질적인 집단들은 도시와 공업지대에서 P.T라는 단일계급으로 되어가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점점 더 'L.C'로 형성되어가고 있던 자들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게 되었다. 즉 ‘노동자’와 ‘빈민’이 갈라졌다.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중산계급 급진파가 완강히 배척해 온, 위험하고 누더기 같은 대중들과는 분명히 구별된 것이다.
19세기 중반의 노동계급에게서 ‘체면(respectability)’만큼 분석하기 어려운 용어는 없다. 이 말에는 중산계급의 가치관과 L.C의 자존심이 동시에 표현되어 있다. 만일 노동운동이 명백히 혁명적이거나 적어도 중산계급의 세계와 확실히 격리되어 있었다면 노동운동의 특성을 보다 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3사분기에는 개인적 상승과 집단적(계급적)행상 사이에, 또 중산계급을 패배시키는 것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어 구분한 다는 것이 불가능 해졌다.
이시대의 유능하고 지적인 勞動者라면 특히 숙련공의 경우는 중산계급의 사회지배와 산업규늉을 떠받쳐주는 큰 기둥 역할을 하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그들은 노동자들의 집단적 자기방위의 가장 활동적인 핵심이 되기도 했다. 안정과 번영을 우리고 있던 당시의 Cap은 그들을 필요로 했고, 그들에게 어느정도 처우개선의 전망을 보여주었다. 또 그들은 어차피 피할수 없을 것 같았기에 중산계급의 사회지배와 산업규율을 떠받쳐주는 기둥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는 영속적으로 보였으나 大革命은 흘러가는 시대의 마지막 물결로 여겨졌다.
‘노동귀족’은 화이트 칼라 노동자와 하층관료등의 중산계급하층에 속하는 사회계층이었다. 이 계층은 영국에서 자유당을 진정한 대중정당으로 변모케했고, 강력한 노조운동의 中央이었다. 독일에서는 가장 체통 있는 노동자들도 P.T의 지위로 밀려났다. 이런 노동자들은 이 시기가 지나면 새로운 사회민주주의 운동의 核心이 될 것이다. 그 체통의 장단점을 모두 라살이나 맑스의 정당안으로 끌어들였던 것이다. 프랑스처럼 반란과 혁명적 사회공화국의 전통이 노동자들에게 지배적인 전통이 되어있는 곳에서는 ‘체면’이란 그다지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존경받는 노동자’외의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실제로 이들이 빈곤과 불결속에서 생활했다는 사실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이들은 조직화의 손길을 거의 받지 못했고,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1840년대 차티즘 같은 대규모 정치운동은 그런 노동자들까지도 대열에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大革命은 가장 억눌려있던 비정치적인 사람들에게까지 잠깐 이나마 생기를 불어넣었다. 이 시기는 결코 혁명의 시대도 대중적 정치운동의 시대도 아니었지만 잠재적 반란의 열기는 있었다.
노동빈민을 노동운동의 잠재적 鬪士와 그 외의 분자로 가르는 선은 뚜렷하지 않지만 존재했다. ‘연합(association)’이 그것이다. 이는 자유주의 시대 마법의 방정식으로서 이를 폐기시키기 위한 노동운동조차도 자유주의를 기초로 발전했다. 각종 클럽, 공제회, 우애적 조직, 합창단, 클럽들이 생겨났다. 이 범위는 사회적 정치적 세력으로 인정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범위와 일치한다. 그러나 아직 대부분은 조직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고, 이들은 자유주의의 주체가 아닌 객체였다.
대다수 노동자들을 둘러싸고 있는 불결한 물질적 환경과 도덕부재 상태,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1840년개 以後로 勞動者들의 상태와 전망이 개선되었다는 두 가지는 모두 사실일 것이다. B.G들은 개선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두 가지 지점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이었다. 1) 런던 노동자의 40%를 점하고 있는 빈민 노동자들도 당시 하층계급에게 적용된 ‘생존상 최저의 체면’을 차리기도 매우 힘들었다는 점. 2) ‘최소한 어느 정도의 안락과 상대적 안정상태’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는 점. 노동자들을 B.G의 세계로부터 갈라놓고 있는 간격은 매우 넓었으며 매워 질수 없는 것이었다.





 

Who's 건더기2

profile

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성장해 2000년대를 살고 있다. 사회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스스로를 역사학도라 생각한다. 면식과 만화, 수다와 어린이를 좋아한다.


  1. [번역] 생활급의 원류와 발전

    세줄요약 : 임금의 생활보장성은 노자간의 합의에 의한 것. 자본이 없애고 싶어도 노동운동의 저항에 따라 당분간 유지되겠으나 차츰 줄어들 전망. 일본 임금체계 쪽은 그만읽고, 앞으로는 좀 더 유행과 관련 된 것을 보겠음. 특집 : 이 논의는 어디로 가는가 임금·복리후생과 노동 일본노동연구잡지 42 No.  609 / April 20...
    Date2017.04.10 Category번역 Reply0 file
    Read More
  2. [번역]저성장과 일본적 고용관행-연공임금과 종신고용의 보완을 중심으로

    특집 저성장과 임금의 변화 일본노동연구잡지 No.611, 2011 6월 저성장과 일본적 고용관행 연공임금과 종신고용의 보완을 둘러싸고 하마아키 쥰야 [濱秋純哉] (내각부 경제사회총합연구소 연구관) 호리 마사히로 [堀雅博] (히토츠바시대학 교수) 마에다 사에코 [前田佐恵子] (내각부 경제사회총합연구소 특별연구원) 무라타 ...
    Date2017.04.10 Category번역 Reply0 file
    Read More
  3. 박경숙, 문제는 무기력이다, 와이즈베리

    예전에 한 번 보았던 서평이 기억나 사 읽게 되었다. 보다보니 2013년에 나왔고 13쇄나 찍은, 나름 잘 팔린 책인 것을 알았다. 저자가 제시하는 이론은 마틴 셀리그만의 '학습된 무기력' 연구에서 많이 따온 것 같다. 각설하고. 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소에 취직한 A. 처음에는 매우 의욕적으로 학생들과 ...
    Date2017.04.05 Category책읽기 Reply0
    Read More
  4. [레디앙] 최순실 이후 푸드트럭은 어디로?

    푸드트럭 4부. 이왕 썼던거 계속 추적해서 쓰게 될 것 같다.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최순실 이후 푸드트럭은 어디로? 푸드트럭 규제완화 3년을 돌아보며 By 권병덕/ 정의당 당원 2017년 03월 28일 02:45 오후 2014년 3월 박근혜 정부의 푸드트럭 규제완화가 실시되었다. 3년이 지났...
    Date2017.04.01 Category언론 Reply0
    Read More
  5. [번역] 연공임금이란 무엇인가

    아래의 글은 日本労働研究機構에서 펴내는 『日本労働研究雑誌』4月号 NO.525에 실린 清家篤의 「年功賃金はどうなるか」의 번역입니다. 연공임금에 대한 궁금증 때문에 번역해보았습니다. 관심있는 분이 있을지 모르니 올려봅니다. 각주등은 첨부된 피디에프파일을 참고하세요. 연공임금이란 무엇인가 『일본노동연구잡지』...
    Date2017.03.25 Category번역 Reply0 file
    Read More
  6. No Image

    [플랜B] 박근혜 이후의 시민사회를 생각하기 위한 11가지 단상

    박근혜 이후의 시민사회를 생각하기 위한 11가지 단상 건더기 2017년 1월 15일 모든 글, 조직구조/문화 Leave a comment tweet 1. 2014년, 세월호 승객들의 조속한 구조를 기원하며 정부의 무책임한 대응에 모두가 분노하고 있을 때 난 그저 일만 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느덧 나도 세상을 이 따위로 만든 공범자가 되었...
    Date2017.02.21 Category언론 Reply0
    Read More
  7. [번역] 왜 퇴직금과 상여금이 있을까?

    이 글은 大湾 秀雄 (青山学院大学教授), 須田 敏子 (青山学院大学教授) 가 쓴 <なぜ退職金や賞与制度はあるのか>의 번역입니다. 일본형 임금 체계의 전통은 한국에도 적용이 되고 있기에 재밌게 읽을 수 있는 대목이 많습니다. 떡값의 유래도 알수 있습니다. 주석등 자세한 것을 보시려면 옆의 첨부 파일 버튼을 눌러 파일을...
    Date2017.01.02 Category번역 Reply0 file
    Read More
  8. No Image

    홈스봄 <자본의 시대> 요약

    2004년경에 쓴 글임. 다른게시판에 10년전에 올렸던게 제대로 출력이 안되어서 다시 올려봄. 자본의 시대 1848~1875 에릭 홉스봄 요약 1부 혁명의 서막 1장 여러 국민들의 봄 1. 1848년 혁명은 최초의 본격적인 세계혁명이자 마지막 세계혁명이었다.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가장 실패한 혁명이었다. 혁명으로 ...
    Date2016.10.15 Category책읽기 Reply0
    Read More
  9. [플랜B] 활동가의 자세보다 노동 윤리가 필요하다

    더 플랜B에 기고 http://nowplanb.kr/2617 활동가의 자세보다 노동 윤리가 필요하다. – 노동 없는 한국의 민주주의, 노동 없는 한국의 사회운동을 보며 건더기 2016년 8월 4일 모든 글, 활동가 Leave a comment 지난 번 글, ‘활동가를 향한 정신승리의 파산을 바라보며’에 대해 이런 저런 반응을 보았다. 시간이 좀 지나갔...
    Date2016.08.04 Category언론 Reply0
    Read More
  10. No Image

    [플랜B] 활동가를 향한 정신승리의 파산을 바라보며

    더 플랜B에 실린글 http://nowplanb.kr/2565 활동가를 향한 정신승리의 파산을 바라보며 더플랜B 2016년 7월 18일 모든 글, 지속가능/재정, 활동가 1 Comment 나는 시민단체 회원 활동으로 시작하여 시민단체, 정당, 노동조합에서 일했다. 활동가에 대해서 어느 정도 말할 수 있는 알리바이는 있다. 더플랜B에 올라 온 강정...
    Date2016.07.18 Category언론 Reply0
    Read More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14 Next
/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