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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으면 생각이 바뀌는가

posted May 19,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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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6일 페이스북에 쓴 글

책을 읽으면 생각이 바뀌는가

 

1. 두가지 질문

공부하는 사람들 중에는 “한국이 이 모양인건 00를 읽지 않아서야.”를 입에 달고 사는 분이 많다. 또 학창시절에는 “한국 운동이 이 모양인거는 맑스를 제대로 읽지 않아서야”라는 선배들도 많이 보았다. 나는 이를 텍스트 의존증이라고 부르고 싶다.

논의를 하다보면, 일단 00부터 읽어보세요. 라는 언급도 자주 본다.

즉.
읽은 나는 똑똑하여 혜안을 가지고 세상을 통찰하고,
읽지 않은 너는 멍청하여 뻘소리를 날리며 세상을 해치고 있으며, 
읽었는데도 저러는 건 잘못 읽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도출된다. 사람들이 책을 읽으면 세상은 바뀌는가. 책을 제대로 읽는 것은 무엇인가.

 

2. 읽으면 바뀌는가

그렇지 않다.

인간이 책을 읽는 다는 것은 교인이 성경을 읽는 것과 다르다. 행동 지침을 위해 읽을 수도 있고, 그저 재미를 위해 읽을 수도 있으며 비판하기 위해 읽을 수도 있다. 그것이 어떤 책이라도 독서의 다양성은 막을 수 없다.

정신분석학자인 아들러의 사상을 소개한 『미움받을 용기』는 한국에서만 150만부나 팔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150만명이 ‘미움받을 용기’라는 모듈을 탑재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인터넷을 보면 여전히 사람들은 미움받기 싫어하고 상처받기 두려워 한다.

누군가는 한국의 진보가 지나치게 권위적이고 엄숙하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주장은 90년대 말 00년대 초반에 매우 힘을 가졌다. 이러한 입장에 선 논자들은 68의 정신이 한국에 수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탈권위적 혁명이었던 68혁명의 사상서를 읽으면 우리의 마음속에 탈권위주의 모듈이 탑재될까.

이미 70년대 한국의 운동권들은 마르쿠제를 읽었다. 마르쿠제를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마르쿠제의 산업자본주의 비판과 탈귄위지향은 도저히 70년대 운동권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똑같이 마르쿠제를 읽고 지구 반대편 누군가는 후리섹스를 부르짖었지만 누군가는 지하 골방에서 엄격한 수도승처럼 지하운동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70년대 한국 대학생들이 마르쿠제를 읽은 이유는 그냥 읽을 수 있는게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도 될 것 같다. 그렇다면 유럽의 대학생들은 마르쿠제를 제대로 읽은 것이고 한국 대학생들은 마르쿠제를 잘못 읽은 것일까.

 

3. 제대로 읽는 것이란 무엇인가

그런거 없다.

저자의 생각과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렇지 않게 해석하고 받아들였다고 해서 이를 잘못된 독서고 지양해야 할 행위라고 비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70년대 한국 대학생들은 사회비판의 무기가 필요했을 뿐이고, 마르쿠제가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집중해야할 분야가 아니었다.

70년대 한국 대학생들은 야학에 뛰어들며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를 읽었다. 이 책의 내용은 주입식교육이라 할 수 있는 은행예금식 교육말고 창의력을 길러주는 문제제기식 교육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패더고지를 읽고 야학에 뛰어든 대학생들은 프레이리가 비판한 은행예금식 교육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우선 학생들의 눈앞에 닥친 검정고시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페다고지는 야학을 준비하는 대학생들의 사기 충전용이었을 것이다.

나는 어릴적에 조영래가 쓴 전태일 평전을 읽고 감화받았다. 어머니에게도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했는데, 다 읽은 어머니는 시큰둥하게 “그냥 조용히 살았으면 좋은 세상 만났을 텐데 안됐다.”라고 말할 뿐이었다. 이 책에 대한 내 어머니의 해석은 잘못된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편하게 살아 온 내가 70년대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인천의 공단에서 미싱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던 여성 노동자에게 이 책을 잘못 읽었다고 다그칠 용기는 없었다.

조금 진지하게 말해보자.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의 텍스트를 들여온 과정을 설명한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오 슈이치의 연구가 있다. 이들의 연구를 거칠게 요약하자면 무슨 책을 읽었는지보다 어떤 필요에 의해 책을 읽었느냐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역사학자 긴즈부르그는 <치즈와 구더기> 같은 저작을 통해 민중은 텍스트를 전유하는 힘이 있다고 했다. 무슨 책을 읽었느냐보다 어떻게 전유했는가가 때론 더 중요하다. 필요하다면 깊고 아름다운 은백양의 숲에서는 흩날리는 나뭇잎조차 무기가 된다.

 

4. 김정일과 이진경의 영향력

내가 스물 한살 때 포스트모더니즘에 호의적이었던 것은 리오타르 때문이 아니라 엔엘의 비난에서 날 구해준 선배가 포스트모더니스트였기 때문이다. 내가 탈근대론에 회의적으로 바뀐 것은 보드리야르 때문이 아니라 탈근대를 부르짓는 전직운동권들이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를 내뿜으며 임금을 1년 넘게 체불하는 것을 목도했기 때문이다. 대학에 입학한 누군가는 엔엘을 하고 누군가는 피디를 했다. 그것은 김정일을 읽어서도 아니었고, 이진경을 읽어서도 아니었다. 대게는 누구를 만났으며 누구에게 감화받았냐의 문제였다.

나는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 적게 읽은 사람보다 과연 무엇이 더 나은지에 대한 체험적 판단이 되지 않는다. 객관적 경험이 아닌 주관적 체험의 범위에서 맞닥뜨리게되는 사람의 수는 적다. 대게는 다독을 과시하는 사람들은 일과 활동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사람들이었다. 안그런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내가 많이 보지 못했을 뿐.

텍스트가 인간을 바꾸지 않는다. 인간을 바꾸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삶. 인생일 뿐이다. 책은 세상을 바꾸지 않는다. 그러나 너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

 

5. 결론

인간은 다양하고 인간이 하는 텍스트의 해석도 다양하다. 너만 똑똑하고 잘난거 아니니 깝치지 말자.

답이 없는 사람은 어떤 책을 가져다 읽혀도 답이 없다. 포기하자.

Who's 건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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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성장해 2000년대를 살고 있다. 사회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스스로를 역사학도라 생각한다. 면식과 만화, 수다와 어린이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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