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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의 파벌

posted Mar 20,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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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의 파벌


일본사회당의파벌.hwp 일본사회당의파벌v1.0.pdf


일러두기


- 이 문서는 니시카와 토모카즈西川知一, 카와다 준이치河田潤一등이 쓴  『정당파벌-비교정치학적연구政党派閥―比較政治学的研究』(1996, 미네르바서방ミネルヴァ書房)중 후쿠나가 후미오福永文夫가 쓴 6장 ‘일본사회당의 파벌’을 번역한 것입니다.

- 기본적으로 인명, 지명, 고유명사는 최영애-김용옥표기법에 따라 표기했습니다.(반드시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을 겁니다.)

- 이해를 위해 원어를 붙일 경우 아래첨자로 붙였습니다.

- 오탈자는 물론 고유명사 표기에 대해서 지적해주시면 시간이 나는 대로 적용하여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 의역이 많습니다. 이 점에 유념하시길 바랍니다.

- 원문에 실려있던 주석은 각주로 처리하였습니다. 

- 역자주로서 간단한 설명은 본문에 []로 넣었습니다.

- 인물과 고유명사등에 대한 설명은 글의 뒷부분 ‘찾아보기’에 우겨넣었습니다. 

- 문서에 표기된 사진과 그에 대한 설명은 모두 역자가 여기저기 갈무리해와 첨부한 것이며 원문에는 없는 것임을 밝힙니다. 주된 출처는 위키피디아, 브리테니커, 이시카와 마스미 『전후일본정치사』(2006, 후마니타스)등입니다.(하도 검색을 많이 해서 자잘한 건 기억이 안납니다.)

- 문서에 등장하는 표와 그림은 모두 본문에 있던 것을 번역하여 첨부한 것임을 밝힙니다.

- 오타 및 오역에 대한 지적은 환영합니다. 제 홈페이지 solid.or.kr 혹은 메일 rnjsqudejr@hanmail.net 로 해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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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일본사회당의 파벌


제1절 사회당과 파벌


‘파벌연합정당’으로서의 사회당


1991 년 6월 21일, 토이 타카코土井たか子 사회당 위원장은, 통일 지방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을 표명했다. 이렇게 수많은 유산을 남기고 4년 9개월에 이르는 토이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잘 알려진 대로 토이는 일본의 정당사상 처음의 여성당수로서 ‘오타카상’붐おたかさんブーム을 불러일으켜, 사회당의 의석 약진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한편, ‘신선언’이후 당자체의 구체적 전환은 지지부진해져, 안보·자위대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당의 낡고도 새로운 테마는 쌓여만갔다. 그런 의미로, 이후 7월에 치뤄진 제9회 위원장 선거는 상징적이었다. 위원장으로는, 당중앙 레벨에서 거의 전당적인 지지를 얻었던 정권구상연구회(우파)에 속한 타나베 마코토田辺誠가 우에다 테츠上田哲를 이기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선거결과가 보여주듯이, 타나베 자신이 정리한 ‘당개혁안’에 대한 ‘중앙’(국회의원)과 지역(당원)간 의식의 단차는 컸고, 그 앞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오랜기간 파벌을 움직여온 좌우대립이 아직도 해소되고 있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세기에 이르는 사회당의 역사도, 개관해보면 좌우의 이데올로기 대립으로 안팎을 이루는 파벌항쟁의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파벌 계보에 대해서는 그림6-1을 참조할 것).사회당은 전전戦前내내 사분오열이었던 무산정당의 ‘대동단결’을 슬로건으로, 비공산 사회주의자들의 느슨한 ‘공동전선당’으로서 출발했다. 그런 까닭에 한편으로 사회당은 자민당과 같이 ‘파벌연합정당’으로 불려왔다. 이를테면, J.A.A.스토퀸J.A.A.Stockwin은 노작 『일본사회당과 중립외교』(후쿠무라출판福村出版, 1969년, 226쪽)에서 사회당의 중립정책의 변천의 궤적을 추적한 뒤, 그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으로 ‘당내 파벌간의 일시적 잠정적 합종연횡의 상태’를 지적하고 있다.


파벌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도대체 파벌은 어떻게 정의내릴 수 있을까. 파벌은 일반적으로 ‘실력자’ 혹은 ‘영수’라 불리는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그 성원의 당내에 있어서 세력의 유지와 확대를 추구하여 활동하는 집단을 말한다. 공식적인 집단의 규모가 커지면, 거기서는 자주 사적인 관계에 기반한 비공식적 집단이 형성된다. 그런 까닭에 파벌을 인간집단 일반에서 보이는 보편적 현상으로 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실제, 외국의 정당에서도 파벌에 의지하는 인적 결합이 존재한다. 그러나 현재의 유럽의 정당에서 보이는 것은 무언가의 공통의 이해 혹은 입장에 기반한 분파로, 무원칙적으로 세력의 유지와 확대를 꾀하는 당중앙적 존재로서의 파벌은 아니다. 한편, 일본의 기업 혹은 학계등에서 존재하는 ‘파벌’혹은 ‘학파’가 있다는 것에 주목, 즉 이런 것들을 일본사회 특유의 결합으로 보는 것 같다. 이 점에서 보자면 파벌은 계파閨閥나 학벌과 같이 일본 공적집단에 특유의 ‘벌閥’ 현상이 정당에서 보이는 것이라고도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의 정당 모두가 동일한 파벌현상이 나타나지는 않으며, 그것이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자민당과 사회당이다. 따라서 파벌을 집단일반, 혹은 정당일반에 보편적인 현상으로 보는 것, 혹은 일본 집단 특유의 현상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이 점에서 정당파벌은 일본의 사회적 조건들로 규정되어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것으로 생각된다.


본장의 과제


그동안 파벌은 - 특히 저널리즘과 지식인층에서 - 일본 정당의 비근대성, 미숙함을 보이는 것으로 비난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러나 G.사르토리Giovanni Sartori가 상세하게 설명한 것처럼, 정당 또한 지속적으로 파벌처럼 부정적으로 존재했던 역사를 가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는 정당은 정치학적 분석에는 불가결한 요소가 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파벌도 정당시스템에 서 그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벌연구의 현황은 아직 개별적이고 실증적 연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지금까지 별로 다뤄지지 않았던 사회당의 파벌에 대해서 볼 것이다.1) 사회당 파벌의 역사를 밝힌 뒤 그 구조와 행동을 파악하여 파벌의 실태를 보고자 한다. 여기서 당연히 자민당과의 비교 - 무엇이 공통이고, 어던 점에서 다른가를 밝혀내는 것 - 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회당의 파벌의 역사적인 변화도 봐야할 것이다. 특히 지금까지 수년간, 파벌은 질적으로도 파벌의 안팎 - 파벌간 관계, 파벌과 당의 관계 등 - 에 있어서, 큰 변모를 겪어왔다. 왜 이러한 변화가 생겨났을까. 이어서 ‘축소판 정치 시스템小型版政治システム’(사르토리)이라 할 수 있는 정당의 차원에서 사회당의 파벌이 어떤 위치를 점하고,  어떠한 역할을 맡아왔는가도 봐야 할 것이다.

6_1.gif



그림 6-1 일본사회당의 계보



제2절 파벌의 형성요인


사회당의 파벌 형성을 촉진시켜 온 것으로 보통 3가지 요인이 지적된다. 첫째로 역사적 배경으로 전전 사회주의 운동의 계보, 두 번째로 그것과 안팎을 이루는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입장 =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세 번째로 선거·당내 지도자를 포함하는 현실적인 이해다.2) 전후 사회당의 파벌의 합종연횡의 궤적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볼 것이다. 본 절에서는 이하, 역사적 배경(전전 사회주의 운동의 계보, 사상적 차이), 당내 시스템의 문제, 그리고 사회당의 파벌과 압력단체(특히 노조=총평)와의 관계에 대해서 볼 것이다. 물론, 이것이 무언가 하나가 결정적 요인으로 되는 것이 아닌 것은 적절하지 않고, 그것들은 상호 관련되어, 사회당의 파벌의 본질을 규정하고 있다.


파벌의 배경 (1) - 사회주의 운동의 계보


전후 사회당 파벌의 각각의 원류는 전전 무산정당의 이합집산의 역사와, 그에 기반한 인적·조직적 계보에서 찾을 수 있다. 전전의 무산정당 각파의 원형이 생겨난 것은,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에 걸친 것이었다. 1926년에는 공산당의 합법부분을 담당했던 노농당, 이것과 정면으로 대립하고 계급투쟁주의를 배격하는 사회민중당, 마르크스적 사상을 가진 채 중간적인 길을 추구한 일본노농당의 3정당이 출현했다. 뒤이어, 공산당과 일선을 그었던 사상집단 ‘노농파’와 밀접한 관계를 가진 무산대중당(후의 일본무산당)과 일본농민당이 여기에 추가되어 5정당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들 무산정당은 주지와 같이,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날실로하여 복잡하게 뒤엉킨 인적·조직적 결합을 거치는 와중에,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이것은 동시에, 지지기반에 있는 노동조합·농민조합의 이합집산을 동반했다.


1945년 사회당의 결성은, 이들 무산정당 각파를 ‘대동단결’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게다가 사회당에게는 공직추방에 의한 영향이 현저히 적었기 때문에 전전 무산정당의 이데올로기와 인적·조직적 연결이 그대로 유지되게 되었다. 전전의 무산정당에 기원을 가지는 대립이 당내에 크게 투영되었던 것이다. 결성 당초의 사회당은, 크게 우파(구 사회민중당계, 이하 사민계), 중간파(구 일본노농당계 이하 일노계), 좌파(구 일본무산당계 이하 일무계)의 3파로 나뉘어졌다. 1946·47년의 두 번의 총선거에서 당선되었던 의원의 다수도 중앙에서 정치 이력은 없지만, 전전에 어떤 형태로든 사회운동·무산운동에 관여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3) 카타야마·아시다의 중도내각기에서 히라노 리키조오平野力三등의 최우파, 뒤이어 쿠로다 히사오黒田寿男등 최좌파(노농당)의 이탈도 이 연장선상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 배경 (2) - 노선논쟁


e6_2.gif


그림6-2 일본사회당의 조직기구도



사회당은 전전의 무산정당의 인적·조직적 연결을 그대로 계승하면서 결성되었다. 이 결과, 사회당은 좌파의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와, 우파의 사회민주주의를 양극으로, 다양한 사상적 입장을 포괄하고 있었다. 파벌간의 싸움은 인사를 둘러싼 항쟁과 동시에, 이론투쟁을 동반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일본사회당 30년사』의 서술을 바탕으로, 1949년 제4회 당대회에서 보여진, ‘모리토森戸·이네무라稲村논쟁’을 실마리로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좌파의)이네무라는 과학적 사회주의 위에 서서, 노선과 주체성을 확립하고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로부터 “사회주의 혁명”으로, 노동자계급의 권리획득으로의 노선을 조속히 할 것을 주장했다. (우파의) 모리토는 사회주의를 거의 경제민주주의와 동일의 의미로 이해하고, 민주주의의 전진이 그대로 사회주의에 접속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논쟁은 일단, 조정을 맡은 카츠마다 세이이치勝間田清一의 ‘계급적 국민정당’의 선에서 해결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 기조를 이루는 ‘국민정당’인가, ‘계급정당’인가,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인가, ‘서구형 사회민주주의’인가의 문제, 게다가 그에 입각한 노선의 대립은, 사회당에 있어서 낡고도 새로운 테마로 그 후에도 거듭 논의되어왔다. 이론투쟁을 배경으로하는 노선대립은 복잡한 국제정세와 국내문제로의 대처를 둘러싸고, 사회당의 여러 가지의 대립을 재생산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회당의 파벌은, 전전의 계보를 끌어온 채, 예전부터 정당분열의 형태로 나타나게 된 것을 대체하는 것이었다. 사회당은 극히 최근에 이르기까지, 이 쇼와 초년의 계보를 이어갔다. 물론, 역사적 배경으로서 전전의 계보는, 국내외의 정제인식 밑 “정치적 세대”의 변화와 더불어, 당연히 엷어져갔고, 사회당의 파벌 자체의 형성요인으로서의 의미도 희박해져갔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당에게 파벌이 여전히 엄연히 존재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회당의 파벌을 지속시키고 생성시키는 다른 이유를 찾아야 한다.


당직선거등의 당내시스템


자민당의 파벌형성에 있어서, 총재공선제의 채용이 중요한 요인의 하나로 거론되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사회당도 이 같은 당내 시스템 - 먼저 위원장·서기장을 시작으로하는 당직선출방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전전의 계보에서 이어진 대립을 맹아로하는 파벌이 당내에 정착 된 것은, 이 당내 시스템의 형태에서 찾을 수 있다.


사회당 조직기구도는 그림 6-2에 있지만, 운동방침, 정책등의 당 노선의 결정 외에, 위원장, 서기장, 중앙집행위원등의 선출은 대회에서 이루어진다. 중앙집행위원회는 당을 대표하는 최고집행기관으로, 사실상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이다. 이 위원장을 포함한 중앙집행위원의 선출방법이 각파에 의해 당내주도권 획득을 노리는 대회 대의원에 대한 다수파 공작을 활성화시켜, 파벌의 형성을 촉진하는 결과가 되었다.


당대회는, 대회대의원 및 본부 임원으로 구성되어있다. 대회를 구성하는 것은, 도도부현 본부대표, 도도부현 본부 선출 의원, 국회의원, 당원지사党員知事, 시장, 지지단체(都市交, 動労, 私鉄総連, 非鉄金属, 全電通, 全逓, 炭労, 社青同등의 8개단체)대표로, 매년 1회개최되었다. 대회의원은 당원수에 비례하여(당원 100명당 1명)중앙집행위원회가 할당하여 도도부현 본부에서 선출했지만, 그 선출방법은 각 도도부현에 의해 서로 다른 방법들이 취해졌기에, 똑같은 것이 없었다.4) 특히 사회당의 경우, 1958년 제14회 당대회에서 규약개정에서, 국회의원이 특히 우대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자동적으로 대회대의원에서 제외되었다. 이것은 ‘의원정당’적 본질을 극복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였다. 이에 따라, 자민당의 파벌이 국회의원만으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 사회당의 파벌이 지방의원과 지방활동가 레벨에까지 이르게 되는, 다른 구조상의 특질을 가지게 되었다. 사회당의 활동가가 국회의원을 거치지 않고서, 평등한 입장에서 파벌의 장에 등장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또한, 지방의 말단에 이르는 파벌의 계열화를 촉진시키는 것과 함께, 사회당에서 ‘중앙’(국회의원)과 ‘지방’(당원)의 네지레[뒤틀림, 꼬임] 현상을 만들어냈다(대의원의 임기는 1966년 12월 제28회 당대회까지는 1년이었지만, 이후는 2년으로 되었다. 또한 그 선출 세칙에 대해서는, 명확한 규정이 없이 좌우의 항쟁요인의 하나가 되었지만, 1958년 규약개정 이후 지위별 單記 투표가 되었다. 결국 아스카타 위원장의 취임과 함께, 국회의원의 대의원 자격 부여가 총대의원수의 1/3을 한도로 부활했다.). 


1978년 사회당은 아스카다 위원당의 아래, 전당원에 의한 위원장 공선을 도입했다. 그러나 현재(1991년 7월 말)까지, 도합 9회의 선거가 치러졌지만, 그 중 6회는 무투표당선이었다. 그것은 자민당의 총재예비선이 형해화 되어있는 사정과 비슷하다.


파벌과 압력단체


사회당은 당원수가 고작 5만명(1991년 현재 12만)정도임에도 불구하고, 선거에서는 1000~2000만표 가량을 획득해왔다. 사회당은 여러번 대중정당으로의 탈피를 시도했지만,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말 할 것도 없이, 이러한 취약한 당조직을 보완해준 것이, 노동조합, 특히 총평을 중심으로하는 지지조직이었다. 사회당은 선거·자금뿐만 아니라, 의원의 모금에 있어서도, 노동조합(총평)에 크게 의존했다.


이러한 사회당과 노조의 결합은, 2·1총파업후[1947년 2월 1일 관공서 노조를 중심으로 일어난 파업, GHQ가 중지명령을 내리면서 끝났다.] 산별내에 생긴 민주화동맹(민동)좌파가 1949년 총선거후 대량 입당했던 것에서 시작되었다. 패전후 사회당은 도시에서는 노동조합, 농촌에서는 농민조합을 기반으로한 조직화에 노력했다. 그 결과는, 말하자면, 사회당과 총동맹과의 결속이 ‘쌍방 간부사이의 개인적 결속’과 같은 것이 되어버였고, 비교적 완만한 것이었다. 그리고 농민조합이 농지개혁의 종료와 함께 지속적으로 그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사회당의 지역기반으로 노동조합의 중요성은 높아져갔다. 1949년 1월 총선거에서 참패했던 사회당에서 민동은 새로운 재건의 기반을 제공해주었다. 그중 민동 좌파의 사람들이 [사회당]좌파에 속했기 때문에, 좌파는 계속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었다. 알려진대로 민동은 1950년 7월 GHQ의 관여로 총평을 결성했다. 이 결과 사회당은 한편으로 ‘의원 정당’으로서 머무르면서, 지방 민동좌파의 지도자를 매개로하여, 노동조합이 당을 ‘먹여살리’[원문은 丸抱え, 포주가 접대부의 생활비를 전담]는 형태로 결합을 강화했다.


사회당과 노조와의 결합은 확실히 총평내의 좌파=‘노동자동지회’와 우파=‘민주노동연구회’의 대립을 거쳐, 좌파사회당=총평, 우파사회당=전국회의에서, 나아가서, “사회당=총평”블록의 형성으로 나아갔다. 사회당은 노동전선에 있어서 대립의 영향을 받으면서, 당내의 좌우대립을 드러내게 되었다. 총평은, 사회당내의 얼마간의 파벌간의 ‘연횡’을 통해 영향력을 미치게 되면서, 그 파벌의 형성을 측면에서 촉진시켰다.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조합의 총평주류와 사회당 각파의 연합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당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자금과 표를 영향력의 원천으로 하면서, 당의 노선 뿐만 아니라, 인사에 영향을 미칠 정도였다. 이런 점에서는 총평을 하나의 파벌로 파악해도 될 것이다.5)


또한, 당 밖의 사상집단도, 사회당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좌우 양사회당 시대, 우파사회당이 ‘민주사회주의연맹’을, 좌파사회당이 구 ‘노농파’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아옴으로서, 대립을 심화시킨 것은 주지와 같다. 특히 구 ‘노농파’(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사키사카 이츠로오向坂逸郎)는 1951년 6월 사회주의협회를 발족시켜, 좌사·총평의 ‘이론집단’으로서, 좌사강령 작성의 중심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전반에 걸친 관공노를 중심으로 그 지지층을 넓혀가고, 조직적으로도 당내에 세력을 신장시켜, 뒤에 서술하듯 사회당 파벌재편의 한 주역을 맡았다.


이 총평·협회등 당외 지지집단의 존재가 사회당의 파벌형성과 변용에 큰 영향을 주고, 사회당 파벌연합의 바리에이션을 만들어 냈다.6)


제3절 사회당 파벌의 합종연횡


본 절에서는, 앞절에서 본 파벌의 형성원인에 유의하면서, 전후 사회당 파벌의 형성과 전개, 그리고 합종연횡의 궤적을 보고자 한다. 사회당 파벌은 본래의 이데올로기·정책연구 그룹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을 특색으로 한다. ‘사회주의연구회’(사사키 파), ‘사회주의운동연구회’(에다 파), 정책연구회(와다-카츠마다파), ‘일본사회주의연구회’(구  카와카미 파)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한 것은 이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대립에서 이데올로기·정책 등 노선을 둘러싼 대립의 비중은 자민당에 비해 높다. 물론 파벌은 종종 그 목적을 이데올로기로 위장하지만, 사회당의 경우 그것을 경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회당은 파벌투쟁의 역사 속에서, 왼쪽을 쳐내고, 오른쪽을 쳐내왔지만, ‘킨타로오 엿’ 마냥 달라도 달라도 좌파와 우파, 양쪽의 중간파를 만들어 냈다. 그 의미에서 좌파-우파라는 표현은 편의적·경험적인 것으로서 사용한다는 것을 여기서 밝혀둔다.7)


사회당 파벌의 형성 - 1950년대


① 좌우대립과 제1차분열


설립당초의 사회당은 전전의 무산정당의 계보를 이어가면서, 크게 우파·중간파·좌파로 나뉘어있었다. 1949년의 제4회 당대회는 좌우양파에 의해 노선과 인사를 둘러싼 당내주도권 싸움이 현저화되는 것을 보여준다. ‘모리토-이네무라 논쟁’에 대해서는 이미 보았지만, 이 대회에서는 좌파의 주도로 ‘당의 정치적 목표는, 정치혁명을 일으켜야한다. 사회개량주의와의 구별을 명확히 해 둬야한다.’등 4항목의 기이한 추가 결의가 붙게되었다. 인사에서도 위원장으로는 카타야마 테츠가 무경선으로 선출되었던 것에 반해, 서기장은 선거 결과 좌파의 스즈키 모사부로오가 우파의 아사누마 이네지로오를 390대 261의 큰차이로 눌렀다.


좌파의 승리는 노동운동에 있어서 공산당과 주도권을 다투었던 타카노 미노루高野実, 오오타 카오루太田薫, 이와이 아라키岩井章등 민동 좌파가 사회당좌파와 결합한 결과였다. 또한, 노조 밖에서도 1948년 말 당 청년부에서 ‘사회주의청년동맹’(사청동)이 결성되어, 아마카와 히토시, 사키사카 이츠로오向坂逸郎등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당내외에서 영향력을 강화한 것처럼, 사회당의 좌파에 힘을 실어주었다.


당내의 좌우대립은, 국철 민동과 총동맹 우파가 사청동에 대항하여 만든 ‘독립청년동맹’문제를 계기로 에스컬레이트하여, 1950년 1월의 제5회 당대회에서 결국 분열을 초래했다. 그러나 이 분열은 선거를 이유로 7월 5일에 수습되었다.


② 강화조약을 둘러싼 좌우분열


좌우 대립이 심화되던 사회당은, 결국 ‘강화문제’를 둘러싼 두 흐름으로 분열하기에 이르렀다. 사회당은 연합국과의 강화문제에 대해서는, 조속한 전면강화론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즉, 1949년 12월 사회당은 ‘전면강화, 영세중립, 군사기지반대’를, 뒤이어 1951년 1월 당대회에서 ‘재군비반대’ 조항을 추가하여, 이른바 ‘평화 4원칙’을 당의 기본방침으로 했다. 그러나 같은해 9월 센프란시스코에서 실제로 ‘단독강화’로 조인되자, 당내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강화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때마침 조선전쟁의 여파를 받아, 좌우대립을 격화시켰다. 양파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 할 수 있다. 우파는 국제문제를 권력정치의 시각에서 파악하고, 미소의 대립이라는 현실 속에서, 단독강화는 어쩔 수 없으며, 또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한 중립의 한계를 설명함으로서, 지역적 집단안전보장=일미안보조약을 긍정하고, 재군비도 인정했다. 이에 대해, 좌파는, 단독강화는 일본을 전쟁에 휘말리게 할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졌기 때문에 전면강화를 견지함으로서, 평화조약에 중립불가침을 규정함과 동시에 일본을 가상적국으로 하는 중소동맹의 파기를 요구했다. 게다가, 인도등의 제3세력과의 제휴를 통해 중립을 지키고, 아시아의 평화에 공헌 할 것을 외쳤다.(이것은 훗날 ‘제3세력론’으로서 구체화 되었다.) 좌우양파는 ‘평화 4원칙’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게 되었다.


좌우의 격론 와중에, 중간파의 미즈타니 쵸오사부로와 아사누마 이네지로오 들은 분열을 회피하기 위해, 강화찬성, 안보반대의 중재안으로 수습을 시도했다. 중앙집행위원회에서는, 우파·중간파의 타협이 성립되고, 강화찬성, 안보반대(백·청)가 가결되었다. 그러나, 당대회에서는, 대의원수에서 이기는 좌파가 하부조직과 총평의 지원 아래, 중앙집행위안을 뒤엎어, 양안반대(청·청)으로 결정되었다[백표는 찬성, 청표는 반대표를 가리킨다]. 결국, 강화·안보조약을 둘러싼 대립을 계기로 하여, 1951년 10월 사회당은 본격적으로 분열했다.


강화문제를 둘러싸고, 사회당이 좌우로 분열되었던 때, 좌파의 백그라운드에 총평의 지지가 있던 것은 주지와 같다. 1950년 4월, 오오타, 이와이, 타카라키 후미히코宝樹文彦등 민동좌파는, ‘제1차 노동자동지회’를 결성, 국철, 전체全逓, 일교조를 중심으로, 사회당 좌파지지 체제를 만들었다. 그리고 총평은 1951년 3월 제2회 당대회에서, ‘평화 4원칙’을 결정하는 것과 더불어, 국제자유노련 일괄가맹반대를 결의했다. ‘노동자동지회’는 대회가 강화조약 찬성을 결정하게 된다면, 사회당을 근로자정당으로 인정하지 않고, 뒤이어 새로운 노동자정당의 결성을 고려하겠다는 압력을 사회당 좌파에게 넣었다.8) 다른 한 편, 총동맹·총평내의 민동우파는, 국철, 전섬全繊, 전광등의 단위산별노조를 규합하고, ‘반공주의’를 전면으로 1951년 9월 ‘민주노동운동연구회’(이하 민노협)를 조직하고, 사회당 우파와의 결속을 심화했다. 1953년 7월 총평 제4회 당대회에서, 해원海員조합, 전영연全映演, 전섬동맹등이 잇달아 탈퇴하여 우파는 1954년 4월 전일본노동조합협의회(전노)를 결성했다. 그 뒤, 총평은 좌파사회당에 대해 조직과 자금의 양쪽에서 지원하게 되었다. 시미즈 신조오清水慎三에 의하면 이때 이른바 ‘좌익 용수철’의 기초가 형성되었다고 한다.9)


그리고, 자민당이 일미안보조약을 일본의 안전보장의 기축으로, 동시에 자위력 증강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전환함에 따라, 사회당은 반대로, 비무장 중립론에 집착하게 되었다. 그것은, 당내에 사회주의 노선의 문제 이외에, 외교노선으로서의 중립주의 - 특히, 평화주의라는 본래 사회주의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아닌 -를 둘러싼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


③ 좌우사회당시대와 파벌의 형성


분열후, 대략 우파·중간파·좌파로 나뉘었던 사회당의 파벌도, 이데올로기적·인맥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전선의 재편의 따라, 계속 변화해 나갔다. 양파 사회당내에 각각 파벌이 형성되어, 이후의 파벌 ‘원형’이 만들어졌다. 분열직후 의원수는 좌파사회당(이하 ‘좌사’)가 중의원 16명, 참의원 31명, 합계 47명, 우파사회당(이하 ‘우사’)이 중의원 29명, 참의원 30명의 합계 59명이었다 이 시점에서, 당대회 대의원수는 좌파가 우세했지만, 국회의원 수는 아직 우파가 많았다.


분열의 시점에서, 좌사 안에서는, ‘파벌’이라고 불할만한 것이 없었다. 의원수의 급증 - ‘규모’의 문제 -, 이른바 ‘좌사논쟁’, 그리고 총평내부의 대립이 좌사부분에서 파벌의 형성을 촉진시켰다. 좌사강령은, 이네무라 준조오稲村順三, 사키사카 이츠로오들이 중심이 되어 작성했기 때문에 노농파 이론의 영향을 강하게 띄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영국노동당 좌파에 친근감을 가진 와다和田博雄는 ‘초안의 입장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영구정권으로, 사회민주주의 정당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주장, 제3세력론의 입장을 취했다. 또한 시미즈 신조오는 [일본]공산당의 52년 테제와 비슷한 ‘민족해방사회주의혁명론’을 발표하고, 좌사 내에서 논쟁의 불을 당겼다. 결국, 논쟁은 1954년 1월 당대회에서, ‘시미즈 개인안’을 부결하고, 이른바 ‘좌사강령’을 가결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좌사 안에서, 파벌의 형성이 촉진되었다. 구 일무계 스즈키 모사부로오를 리더로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에 친근감을 가지는 스즈키파가 형성되는 것과 함께, 그 戰前적인 체질에 불만을 가진 와다 히로오의 밑으로 모인 와다파, 전일농全日農을 거점으로하는 농촌파의원은 노미조 마사루野溝勝을 리더로 노미조파(농민동지회)를, 시미즈 안을 지지하는 그룹은 마츠모토 지이치로오을 리더로 마츠모토파(평화동지회)를 형성했다.


좌사안의 파벌의 형성은 또한, 총평내부의 대립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당시 총평에 대해서는, 타카노를 중심으로 하는 ‘평화세력론’과 오오타·이와이岩井章의 ‘제3세력론’이 격하게 대립했다. 이 대립은, 1955년 제6회 대회에서, 이와이가 타카노를 물리치고 사무국장에, 1958년 오오타가 의장에 취임하여, 오오타-이와이 라인이 확립되는 것(‘제2차 노동자동지회’)으로 결착되었다.


한편, 우사는 1952년 1월의 당대회에서, 민주사회주의연맹을 백업으로하여 ‘민주사회주의’의 노선을 명확하게 내걸었다. 그러나, 인적으로는 구 사민계, 구 일노계-카토오 칸쥬우加藤勘十계와, 전전부터의 계보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이 점에서, 추방해제에 의해 카와카미 죠오타로河上丈太郎, 코오노 미츠河野密, 미와 쥰조오三輪寿壮등 구 일노계 간부가 복귀하여, 카와카미가 위원장에 취임한 것, 1952년 8월에 니시오 스에히로가 복당했던 것은, 우사안에서도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것은 보수정당이 하토야마 이치로오의 추방해제에 의해 재편, 통합되었던 과정과 유사했다. 니시오의 ‘개헌·재군비’를 불문율言外로 담았던 당론은, '안보·재군비반대'의 카와카미를 결과적으로는 좌사 쪽으로 쫓아보내게 했다. 또한 니시오파의 배경에 민노연 - 전노회의(동맹의 전신)가 있었던 것은, 노조에 기반을 두지 않은 카와카미파를 좌사에 접근시키게 되었다.10) 우사안에서는 ‘재군비’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구 사민계와 구 일노계가 복잡하게 뒤얽혀, 파벌의 재편이 촉진되었다.


④ ‘6개사단’의 탄생과 니시오파의 이탈


이와 같이, 양파 사회당내에서 파벌의 재편이 진행되는 중에, 좌사의 스즈키파와 우사의 카와노파의 주도권 아래, 좌우의 합동이 이루어졌다. 통일의 과정에 대해서 여기서 서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1955년 통일의 단계에서, 사회당의 파벌은, 최우파의 니시오파에서, 카와카미파, 스즈키파, 와다파, 노미조파, 그리고 최좌파의 마츠모토파 까지의 ‘6개사단’(<아사히신문>1963년 12월 17일)이 있었다. 특징적으로는 와다파를 제외하고 사회당의 파벌이 모두 전전에 계보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통일은 분열의 원인을 해소하여 성립된 것이 아니라, 문제를 남겨둔 채로 이루어졌다. 1959년 6월의 참의원 선거에서 지난 선거보다 당선자가 11명 감소하자, 사회당 안에서 다시 재군비논쟁이 시작되었다. 니시오는 ‘국민정당’론을 전개하는 것과 함께, 안보반대투쟁에 대해, ‘단순히 반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현행조약을 대채할 새로운 일미안보체제를 어떻게 만들까라는 대안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전노全労도 안보에 대한 ‘조건투쟁’을 주장했다. 이에 대해, 좌파는 맹렬히 반대하고, 1959년 9월 제16회 대회에서 니시오의 통제위원회 부의가 채택되었다. 주지와 같이, 1960년 니시오파는 사회당을 탈당하고, 카와카미파의 일부를 더해 민사당을 결성했다. 이 때, 좌파를 자극시켜, 니시오 탄핵의 급선봉에 섰던 것이, 총평을 선두로하는 이른바 ‘좌익 용수철’이었다. 배후에서는, 훗날의 “민사당·동맹”, “사회당·총평”이라는 노동전선에 있어서 헤게모니 싸움이 반영된 것이다.


‘구조개혁’논쟁과 파벌재편 - 1960년대


① ‘구조개혁’논쟁을 둘러싸고


1960년 3월 제17회 임시당대회에서는 “아사누마 위원장 - 에다 사부로오 서기장”이 실현되었다. 니시오파의 탈당후, 사회당은 호헌과 평화주의의 당으로 성격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것은 당내 항쟁을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보수합동, 양사통일에 의해 고정적인 정당세력의 구조가 형성되고, 한편으로 자민당정권의 장기화에 의해 정당간 경쟁이 감소되었던 것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테마로 하는 사회당내의 논쟁을 격화시켜, 파벌항쟁은 격하게 증가되었다. 그 시점에서 벌어진 것이, ‘구조개혁’논쟁이었다.


구조개혁론은 안보투쟁후, 좌파의 서기국원들을 중심으로 ‘호헌, 민주, 중립’의 정권구장으로서 시작되어, 1960년 10월의 임시당대회에서 ‘총선거의 승리와 당의 전진을 위해’라는 방침서로 성립된것으로부터 구체화되었다. 구조개혁론은 ‘보수당·독점자본의 지배의 속에서도, 국민 제계층의 생활향상을 위해 민주주의를 촉진시켜, 권력의 지배를 제한하고, 정책전환을 시도한다는 사회주의로의 길을 만들어 내자’라는 주장이었다. 거기서는 사키사카 이츠로오등의 사회주의 협회의 혁명론을, 공황과 생활곤궁을 기다렸다가 일으키는 것이다,라며 비판했다. 그것을 대표하는 것이, 당시 당의 조직위원장이었던 에다 사부로오, 정책심의회장이었던 나리타 토모미 였다. 그 뒤, 당내항쟁의 축이되었던 ‘구조개혁론’이 좌파의 스즈키부터 제출되어 에다에 의해 제시되었던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당연하게도, 구조개혁론은, 그 비판의 대상이었던 사키사카 등의 사회주의협회, 게다가 총평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다. 논쟁이 본격화된 것은 이듬해인 61년에 들어가면서 부터였다. 동년 3월의 제20회 대회에서는, 총평·사청동·노미조파로부터 빠르게 수정의견이 나왔다. 이듬해인 62년 1월의 당대회에서는, 서기장을 둘러싸고 에다와 스즈키파가 지지하는 사사키 코오조오가 대결했다. 이 때, 구조개혁론은 ‘전후노선으로서 곧 당의 기본방침이 되어서는 안된다’라는 스즈키파의 수정안이 가결된 것으로 봉합되는 것과 동시에, 그 시비는 사회주의이론위원회의 검토에 넘기게 되었다. 같은해 7월 ‘에다비전’(미국의 높은 생활수준, 소련의 철저한 사회보장,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일본의 평화헌법)을 발표했지만, 사사키파등으로부터 ‘자본주의 체제의 승인이다’라고 공격받아, 동년 11월 제22회 당대회에서 ‘비판결의’가 가결됨에 따라, 서기장을 사임했다. 이후 스즈키파는 사사키파와 에다파로 나뉘는 동시에, 에다는 당내에 아웃사이더적 존재가 되어버렸다.


구조개혁론은 한편으로 총평내의 헤게모니 투쟁에서도 연돌되었다. 당시의 총평의 주류파(오오타-이와이 라인)에 의해, ‘구조개혁’은 외적으로는, 노동전선에서 치열한 헤게모니 경쟁을 벌여온 동맹의 입장에 - 노동조건의 개선에 힘을 싣고, 정치투쟁을 경시하는 - 서있는 것으로, 배제되어야 할 것이었다. 또한 내적으로는 타카라키 전체全逓위원장 처럼 ‘구조개혁지지’를 주장하는 총평내 반주류를 억제하는 의미를 가졌다.


② “제2세대”의 등장과 파벌연합의 변화


구조개혁논쟁과 동시에 파벌리더의 세대교체도 일어났다. 파벌의 영수는, 스즈키, 카와카미, 와다등의 “제1세대”에서, 사사키, 에다, 카츠마다 세이이치 같은 “제2세대”로 잇달아 교체되어갔다. 파벌 리더 세대교체의 진행은, 전전 무산정당의 계보에서 이어지는 색채를 희석시키는 동시에 각파벌을 이데올로기적 입장에 기반한 파벌로 변화시켰다.11) 그것은 또한, 사회당의 파벌역학을 교란시켜, 파벌연합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에다파는, 니시오파 외의 유일한 비마르크스주의 그룹으로 남아있던 카와카미파, 이전에는 좌파에 속했던 와다파와 함께 이른바 구조개혁파=‘우파연합’으로서 주류파를 형성했다. 스즈키-사사키파는 협회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과 함께, 마츠모토, 노미조의 양파와 반구조개혁파=‘좌파연합’으로서 반주류파를 형성했다. 그렇게 각각 대항하는 것과 함께, 당대회에 있어서 인사를 둘러싼 항쟁이 치열화되었다. 1964년 제23회 대회에서는, 좌파가 당내 야당선언을 하고, 당직선거에 후보자를 내지 않음에 따라, 카와카미 위원장, 나리타 서기장을 시작으로 전 당직을 우파가 독점하는 우파편향片肺 집행부가 되었다. 그러나, 같은해 12월의 제24회 당대회에서는, 사사키가 와다와 함께 신설된 부위원장에 취임하는 것과 함께 선거가 있던 당직 8인 지도부에서 전승하는 등, 좌파가 압승했다. 그 동안 노선에서 우세했던 좌파가 인사에서도 우파를 능가했다. 


구조개혁론을 계기로 시작된 항쟁은, 리더간 개인적 대립도 뒤섞인 자민당의 파벌과 다르지 않게 지도부를 둘러싼 항쟁의 성격이 강한, 사회당 파벌의 ‘인사파벌’화를 촉진시켰다. 사회당의 파벌을 좌우의 차원에서 분류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게 되어, 저널리즘에서는 ‘주류파’ ‘반주류파’라는 호칭이 정착되었다. 또한 파벌은 ‘연합’의 형태만이 아니라, 존재양식에 있어서도 변화를 수반하게 되었다. 사사키파는 당내주도권을 획득하기 위해, 노골적인 지방의 다수파 공작을 전개했다.12) 이것을 수용하여, 주류3파[에다, 카와카미, 와다]도 각각 단독으로 당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지방조직에서 활발한 다수파 공작에 편승했다. 여기서 리더쉽의 장악을 위해, 지방의 말단에 이르는 파벌의 계열화가 촉진되었다.


③ 사사키·에다의 대립


1965년 5월, 카와카미 위원장이 병으로 사의를 표명한 후, 사사키가 단선으로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66년 1월 제27회와 동년 12월 제28회 대회에서, 에다는 위원장에 도전했지만 깨지고, “사사키-나리타”체제가 계속되었다. 또한 제28회 대회에서는, 사사키파가 선거가 있던 13명의 지도부를 모두 독점했다.


사사키 위원장의 탄생은, 사회당을 보다 좌경화시켜, 전벌적戰閥的인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우선 외교방침에 있어서 현저히 나타났다. 사회당은 ‘적극중립’을 표방하면서, 베트남전쟁의 수렁화와 함께, 끊임없이 왼쪽으로 왼쪽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1965년 임시당대회에서, 사사키는 ‘미제국주의의 침략정책이 제3차 세계대전의 위기를 초래하게되었다’고 비판하고, 곧 ‘미제국주의는 세계공동의 적이다’라고 주장했다(『아사히』1965년 5월 7일). 그것은 ‘미제국주의는 일중공동의 적’이라는 아사누마의 발언을 보다 에스컬레이트 시킨 것이었다.


사회당은 또한, 마침 ‘중소대립’에 자극을 받아, 국제사회주의운동의 격류속에서 혼미를 거듭해갔다. 사사키파는, 반구조개혁론의 입장에서, 계속하여 평화동지회와의 결합을 강화하면서, ‘적극 중립주의’에서 사회주의 ‘평화세력론’의 입장을 강화했다. 사사키파는 중국·소련은 본래 평화세력으로, 세계의 긴장을 격화시켰던 것은, 미국의 제국주의정책에 의한 것으로서, 그리고 공산당이 자주독립노선을 취해 중국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계속하여 친중·반미경향을 강화해갔다. 하지만  사사키파는, 중소대립에 있어서 소련을 지지하고, 공산당과의 공투에 반대하는 협회계 그룹을 끌어안음으로서, 명확한 대응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한편, 에다·카와카미·와다의 3파로 구성되었던 이른바 ‘구조개혁파’는 ‘적극중립’노선을 견지하면서, 중국의 ‘폭력혁명’노선을 부정했다. 그러나 구 카와카미파는 사회주의 인터에 친근감을 가지고, 에다파·카츠마다파등은 친소노선을 취하는 등 우파에서도 미묘한 차이가 보였다.


무엇보다도 사회당은 전체로서는, 미국의 아시아 정책(오키나와통치, 조선·중국과 국교정상화)에 일관된 반대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아시아에 있어서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전략은 일본의 군국주의부활에 박차를 걸어 주는 것이었고, 베트남전쟁이 격렬화 되어감에 따라, 당내에 있어서 ‘반미’적 경향은 강해져만 갔다. 그리고 가장 긴급한 기본적인 목표로서, 일미안보조약의 폐기를 내걸었다는 전에 관해서도, 모든 파벌이 일치했다.


그런데, 중소대립에, 총평이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이데올로기 대립을 포함한 사회주의 국가들간의 싸움에는, 노조의 토의로는 익숙하지 않은 내용일 것이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의 격과 속에서, 안보반대, 반기지투쟁으로도 얽힌, 미국의 아시아 전략을 비판하고, 대결하는 자세를 가졌던 것은 확실하다.


④ ‘길’의 채택과 사회당


1966년 제27회 당대회는, 사사키 위원장 하의 사회주의 이론위원회에서 제출된 “일본 사회주의의 길日本における社会主義への道”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그것은 ‘구조개혁’논쟁에 종지부를 찍는 것으로서, 당내에서 그 후 오랫동안 강령적 문서로서 중요시 되어왔던 것이다. 거기서는, 사회주의의 경로는 자본주의가 파탄내버린, 생활이 궁핍한 노동자계급을 중심으로 혁명정권을 만들어 내어, 사회주의로 이행한다는 혁명待望論이 남아있었다. 게다가, 당대회에서 다수를 점한 좌파에 의해 얼마간의 중요한 수정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길”에서는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이 확인되는 한편, ‘어떤 종류의 계급지배’가 긍정되는 등,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급격히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러나, “길”의 채택 전후로부터, 국내외의 정세는 크게 변동하면서, 현실정치로의 대처법에 대해서는 그것은 멍에가 될 지언정, 스프링 보드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마스미 쥰노스케가 적절하게 지적하는 것처럼, 국내에서는, 고도공업화와 대중사회가 사회당의 기반 - 총평을 침식하고 있었다. 민사·공명·공산의 신장은 다당화시대를 도래시켜, 사회당의 지위의 저하를 초래했다. 노동운동의 분야에서도, 1964년 5월 IMF·JC[국제금속노조연맹 일본협의회]가 발족하여, 1967년에는 민간노조에서 동맹이 총평을 능가했다. 고도공업화이 진전 속에서 생산합리화에 의한 직장집단의 재편은, 노사협조를 내걸은 노조운동의 세력을 증가시키고, 노동전선의 재편성이 시작되었다.13) 공산당이 노동운동·대중운동에 있어서 잇달아 세력을 증가시키는 와중에, 총평의 이와이 사무국장·오오타등의 주류파는 ‘계급정당’의 견지를 주장하고, 좌파(사사키파·협회등)을 지원했지만, 타카라키등 반주류파는, 철강노련·전기노련등 총평내 민간노조를 발판으로 ‘반공’적 노동전선통일과 사회당의 ‘국민정당’으로의 탈피를 주장했다.14)


외적으로도, 중국문화대혁명, 체코사건등, 사회주의에 대해 환멸을 일으키는 사건이 계속되었다. 물론, 사회당은 이것들에 대해 전면적으로 찬성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적절히 대응하지 못함으로서, 1969년 총선거의 참패로 이어지게 되었다.


⑤ “전후파”의 등장과 사회당의 저락


1967년, 좌파의 실력자 사사키 위원장은, ‘건보국회’의 책임을 물어 퇴진했다. 후임으로는 “길”의 작성에 중심역할을 맡았던 구 와다파의 카츠마다 세이이치가, 서기장에는 사사키파의 야마모토 코오이치가 취임했다. 카츠마다는 전전에 운동경력을 가지지 않은 사회당 최초의 위원장이었다. 그 이후, 카츠마다파는 당내에 있어서 ‘半’주류파가 되어, 뒤이어 사사키 위원장과의 제휴를 강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카츠마다도 이듬해 68년 7월의 참의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불과 1년도 채 안되어 사임하는 것 말고는 도리가 없었다.


1968년 10월 ‘역자인사[사카고인사逆子人事. 아이를 거꾸로 출산하는 것]’라고 불렸던 “나리타 위원장-에다서기장”체제가 탄생했지만, 이듬해 69년 말의 총선거에서 사회당은 90의석으로 전락했다. 1970년 12월의 제34회 당대회에서, 에다는 에다파·구 카와카미파·사사키파에서 이탈한 야마모토 코오이치 그룹의 지원을 받아, 위원장에 입후보했지만 졌다. 대회에서는, 사사키·카츠마다 양파를 축으로, 총평주류파·협회의 지원을 받은 나리타 위원장 · 이시바시 마사시 서기장이 탄생했다. 이 후, 7년간에 이르는 “나리타-이시바시”체제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회당에게, 명실상부한 전전의 운동경력을 가지지 않은 집행부의 탄생이었다. 나리타는 무파벌, 이시바시는 중간파인 카츠마다와, 함께 당내기반이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2인이 선출되었지만 동시에 그들이 당의 운영에 해당하는 ‘기관중심주의’를 강조했다는 것은, 파벌간의 경쟁원리를 꺽는 한편, 협회(사키사카파)의 대두를 초래하게 되었다. 한편, 에다는 다당화시대의 속에서, 1970년 6월 니시무라 에이이치 민사당위원장 으로부터 제창되었던 ‘사공민’노선에 호응하여, 나리타 등의 ‘(사회당-공산당 공동투쟁를 주축으로하는)전야당공투’노선과의 대립이 깊어갔다.


77년 항쟁과 파벌재편 - 1970년대


① “나리타·이시바시”체제와 협회의 대두


1970 년대는 크게 보면, 협회의 대두와, 그것에 의해 발생된 당내항쟁에 의해 특질지워진다. 1973년 2월의 당대회에서는, 나리타 위원장·이시바시 서기장이 유임하고, 신 중집위원에서 에다파는 완전히 배척당했다. 이 대회에서는 협회파(사키사카파)대의원이 2할 전후를 점해 중집에 진출하고, 본부서기국에서도 세력을 넓혀, ‘파벌’로서 그 발군을 보여주었다. 다른 한편, 동년 2월 초에는, 우파와 중간파의 젊은 의원을 중심으로, 노동의존을 탈피한 폭넓은 시민의 당으로 사회당을 육성시킬 것을 목표로 한 ‘새로운 흐름의 모임’이 결성되었다. 멤버는 20명 정도, 에다파로 연결된 사람들이 많았다. 새로운 ‘의원파벌’의 결성이 있던 동시에, 그것은 자립화가 시작된 협회를 축으로하는 또 하나의 사회당의 얼굴(활동가)과의 항쟁이 시작된 것을 알리는 것이었다.


협회는 공산당, 게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의 신좌익 정파들과의 경합상태 속에서, 그 일관된 이론에 의해 당의 활동가를 매료시켜왔다. 이 과정에서, 협회는 이론집단에서 실천집단으로의 변모를 거듭하여, 총평의 이와이 사무국장과 나리타-이시바시 집행부의 사회당·총평 블록의 주류파와 결속을 맺음으로서, 당의 縣본부, 총지부 레벨에서 세력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의 사회당 주류파(사사키파와 카츠마다파)에 있어서도, 협회의 ‘기층강화足腰强化론’과 反‘구조개혁론’은 장기저락으로 동요되던 하부의 조직 결속과, 에다파 등의 구조개혁파와의 대항에 이용가능한 것이었다. 협회는 全逓·자치노등의 관공노에서 세력을 강화시키면서, 계속하여 자립화를 시작했다. 그리고, “길”은 뒤이어 하부조직에 뿌리를 뻗치고있던 협회의 결집축이 되어, 그 상징이 되었다. ‘사회주의로의 길은 하나가 아니다’라고 설명했던 야마카와 히토시의 구 ‘노농파’의 계보를 이은 협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결합한 집단으로서, 당내에서 세력을 쥐기에 이르렀다.15)


협회는 한편, 일중국교회복이 되어가는 가운데, 중소대립과 관련하여, 잠재적이었던 사사키파와의 골이 깊어있었다. ‘초대국’ ‘패권’조항등을 둘러싸고, 중국보다도 사사키파와 협회와의 사이에 대립이 깊어지자, 사사키파는 분열되었다. 사사키는 협회의 혁명노선과 그 당중당[당내당]적행동에 애를 먹게 되면서, 1974년 가을에는 ‘사회주의적·적정권’이라는 말로 유연노선으로의 전환을 보였다.(『일본노동연감』제74집, 1977년판)


② 77년 항쟁과 파벌의 변용


1970년대 후반부터, 사회당의 파벌은 질적으로 변화를 거듭해갔다. 이 점에서, 1976년 총선거는 큰 의미를 가진다. 에다, 사사키, 카츠마다라는 파벌 “제2세대”의 리더 및 각파의 유력자들이 줄줄이 낙선하고, 의원의 세대교체가 진행되었다. 그것은, 사회당내의 파벌의 변화를 가져오는 동시에, 그 유동화를 초래했다. 종래의 파벌재편은 주로 국외의원레벨에서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당의 재건과정에서 급속하게 하부당원의 사이에서 그 영향력을 늘렸던 협회의 대두에 의해, ‘재편’이 일어나게 되었다. 협회는 기존의 파벌과 달리, 소속된 국회의원수는 적지만, 당대회 대의원수로는 다른 파를 압도했다. 협회는 반협회파 특히 사사키파의 자원을 침식하고, 대회대의원의 거의 반수를 점하기에 이르렀다. 하부조직이 약한 카츠마다파는 나리타-이시바시라인과 함께 협회에 접근하고, 역으로 사사키파는 에다파와 ‘새로운 흐름의 모임’에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듬해 76년 2월 에다가 야노矢野絢也 공명당 서기장, 사사키 민사당 부위원장들과의 ‘새로운 일본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한 것에 대하여, 이듬해 77년 1월 협회계의 국회의원집단 ‘3월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었다.(『일본노동연감』제74집)


1977년 2월에 열린 제40회당대회에서, 협회를 둘러싼 항쟁은 절정에 달했다. 그것은 마치 에다재판을 보는 것 같았고, 결국 에다는 3월에 탈당, 사회시민연합을 결성했다. 에다의 탈당은, 사회당에게 동요를 불러왔다. 당재건을 위해 중앙집행위원의 전원의 ‘당개혁위원회’가 결성되었다. 논점은, 협회가 ‘정치집단인가 이론집단인가’라는 점에서였다. 협회파와 반협회파의 반목은 깊어져만갔다.


③ ‘신선언’의 채택과 파벌의 유동화


협회-반협회의 공방은 1977년의 참의원 패배를 받은 나리타에서 아스카다위원장으로의 교대극등으로 이어지며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총평의 중개도 있어, 협회가 결국 당개혁안등의 요구를 거의 수용하게 되고, 1978년 2월 협회전국대회에서 ‘연구집단’으로되는 것으로 자숙방침을 결정하는 것으로 일단 결착되었다.16) 이 결과, 사회당내에서 적어도 의원레벨에 있어서는 우파세력이 우위가 되었다.


아스카다는 백만당원의 당을 만들어, 중기경제정책, 위원장 공선등을 제출하는 한 편, 1980년에는 공명당과 ‘연합정권’에 합의 ‘사공민’노선으로의 전환을 시도했다. 또한 강령적 문서로서 채택했던 “길”을 버리고, 새로운 당의 기본노선을 만들기 위해, ‘사회주의이론위원회’를 개조, ‘사회주의이론센터’를 설치했다. 그것은 1980년 12월의 제45회 대회에서 ‘80년대의 내외정세의 전망과 사회당의 노선’을 제출하고, 동년 12월 제46회 대회는 ‘우리들이 바라는 사회주의의 구상’을 채택하고, ‘서구사민형’에 한층 근접했다. 뒤이어, 파벌항쟁의 격화하는 중에 아스카다는 파벌해소를 호소했다. 이 때 부터, 사회당의 파벌은 일찍이 영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호칭에서 정책연구단체의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게 되었다.


1983년 아스카다에서 이시바시 마사시로 위원장이 바뀐 후, 1986년 1월 일본사회당은 ‘신선언’을 채택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사회당은 서구보다 늦은 4반세기만에 겨우 ‘서구사민주의’노선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전후세계로의 정책상의 적을을 하게 된 것이다. ‘신선언’은 당의 성격을 ‘국민정당’으로, 사회당의 목표로하는 사회주의상을 ‘사회개력의 과정’으로했다. 혁명에 의한 권력 탈취, 독립성을 부정하고, 정치·경제·사회의 전반에 걸친 개혁의 과정이야 말로, 사회당이 목표로 하는 사회주의다라고 한다. 그리고, 정권을 목표로하기 위해, 연합정권 그 자체를 ‘보통의 것’으로 보고, 사회당 단독정권으로의 이행의 입장을 취하지 않을 것을 밝혔다. 1986년 9월에는, 같은 날 선거의 패배의 책임을 지고 이시바시 마사시가 사임한 뒤에, 무파벌의 토이 타카코를 위원장으로 하여 새로운 체제를 스타트시켰다.


1977년 항쟁이후, 사회당에 있어서는 표면화된 파벌간의 항쟁은 모습을 감췄다. 그러나 이것은 파벌의 체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리더를 잃은 것으로 오히려 당내파벌의 구도를 복잡하게 해, 그 유동화, 분극화를 초래했다. 그것은 사회당의 ‘현실노선’으로의 탈피에 따르는 삐걱거림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1980년에는 사회주의연구회(구 사사키파), 정책연구회(구 카츠마다파)에 더해, 무파벌의 젊은 의원을 중심으로 ‘신생연구회’와 구 에다파계, 구 카와카미파, 구 새로운 흐름의 모임, 카츠마다파에서 떨어져나간 호리 마사오堀昌雄 그룹을 토대로 우파·중간파의 연합체로하여 ‘정권구상연구회’가 결성되었다. 또한 1968년에는, 구 에다파의 오오하라 토오루大原亨를 대표로하여, 무파벌 의원과 협회에서 이탈한 야마모토 마사히로山本正弘그룹을 중심으로 하여 ‘새로운 사회당을 만드는 모임’, 우에다 테츠, 카와노 타다시河野正들을 중심으로 하여, 화요회, 그리고 안보, 자위대등의 사회당의 기본노선 개정에 반대하는 지방의원·활동가를 중심으로 당건설연구전국연락협의회(당건협)이 결성되었다. 1991년에는 신생연구회, 사회주의연구회, 정책연구회, 화요회는 새로운 중간파의 결집체로서 ‘사회민주주의 포럼’을 결성했다.


제4절 파벌의 구조와 행동


앞 절에서는, 사회당의 파벌의 합종연횡의 역사를 보아왔다. 다음으로 본절에서는, 사회당의 파벌이 어떠한 구조를 가지고 어떠한 기능을 맡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몇 개의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파벌의 구조와 기능


① 파벌의 구성


파벌이라는 집단의 구성은 어떻게 이루어져있는가. 파벌에 있어서 인적관계는 보통, ‘영수-부하’하는 수직적인 상하관계를 주축으로, 파벌멤버간의 동지적·수평적 결합의 두 가지로 성립되어있다. 파벌은 그 정점에있는 영수=리더의 개성을 축으로 하여 처음 성립된다. 그럼에도, 파벌은 위원장 혹은 위원장 후보(자민당의 경우, 총재 혹은 총재후보)를 가질 때, 가장 활력을 띄고, 동력도 풍부하다. 이 축에서 벗어난 때, 파벌은 그 리더의 후계자를 정점으로 하는 새로운 후계자를 정점으로하는 새로운 재편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그 파벌은 분해되거나, 쇠퇴되는 것 말고는 방법 없다. 예를 들면 카와카미 파는 그 리더인 카와카미 죠오타로오가 위원장을 사임한 뒤, 급속하게 그 세력이 약해졌다. 카와카미 이후 카와카미파를 가리켜, 혹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통과 역사만이 아닌 사양斜陽파벌로, ...... 소수의 오래된 활동가를 제외하면 스타가 될 만한 싹은 아직 나올 것 같지도 않다.’(『월간노동문제』1969년 3월) 이것은 와다파가 카츠마다 세이이치·이시바시 마사시라는 후계자를 배출한 함으로서 오랜 명맥을 보존했던 사정과 비교해보면 명료해진다(그러나, 이마저도 이시바시 위원장 사임 후, 다른 파벌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스즈키-사사키파의 운명도 거의 같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경우는 후에 서술하겠지만, 그 라이프 사이클과 다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또한, 파벌은 조직으로서 계속되기 위해, 공유되는 가치 - ‘가치의 제도화’ -를 가지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된다. 각 파벌은 정기적, 혹은 수시로 회합을 가지고, 독자의 기관지를 발행 - 각각 『사회주의 이론과 현실』(사사키파), 『정책연구』(카츠마다파), 『사회주의운동』(에다파), 『운동과 정책』(카와카미파)를 발행했다. - 하고, 연구회를 열어 상호의 연찬을 하는 것에 힘을 쏟는다. 사회당내에서는, ‘정책파벌’에 대한 평가가 높다. 사회당의 파벌이 정책 공부의 장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17) 그것이 당대회, 중요정책의 작성에 큰 결정요인으로 된다는 것은 주지와 같다. 대회 때 마다 대회장 주변에 파벌의 사무소를 두고, 우체통을 돌며 전령이 날아다니는 풍경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파벌의 구성에 대해서, 약간 보충 해야 할 것이다. 즉, 파벌은 보통, “영수 - 부하”의 수직적 관계에 있어서, 그것을 보좌하고 지원하는 서브 리더 = “보좌역[원문은 世說役]”은 운동방침·정책등의 수정 외에, 대회에서 중집 지도부의 배분에 큰 역할을 맡는다. 사회당의 경우, 중집 지도부는 당칙 상으로는, 대회에서 선거에 의한 것이 아니었지만, 실제는 각파를 대표하는 “보좌역”에 의한 사전 절충으로 결정되는 것이 많았다.18) 그리고, 그들 “보좌역”은 동시에, 영수의 예비군을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② 파벌의 리더


그러면, 파벌의 리더로서의 자격요건은 무엇일까? 와타나베 츠네오渡辺恒雄는 『파벌 - 보수당의 해부』(홍문당弘文堂, 1958)에서 그 요건으로서 (1) 자금력, (2) 정권을 잡기에 충분한 인간적 매력, (3) 정치가로서의 경력, (4) 부하의 엽관獵官을 알선하는 정치력, (5) 사람 마음을 쥐는 정치기술등을 열거하고 있다. 이 자격요건은, 다분히 자민당 실태에서 도출되었던 것으로, 반드시 사회당의 경우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 많다. 특히 자금력 등은, 자민당과 비교하면 더욱 뚜렷하게 떨어진다.19)


여기서, 사회당의 파벌의 리더에 대해서 보자. 이른바 ‘6개사단’의 리더들은, 어느쪽이든 전전파의 투사로, 전전의 무산정당시대, 이미 이름을 세우고, 개인적 명망을 가진 운동의 심볼로서 역할을 맡아왔다. 그것은 적절하게 와다 히로오가 ‘당내에서 존경을 받는 척도는, 외부와는 다르다. “당경력”, “운동경력”, “투쟁경력”, “수감경력”과 같은 것들이다. 내가 가진 훈장은 “수감경력” 뿐이었다.’20)라고 술회한 것처럼, 무산정당으로 출발한 사회당의 전전적 체질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리하여, 사회당의 리더는, 전전부터의 투쟁경력으로 상징되는, 인간적 매력, 정치적 경력, 정치기술을 축으로, 정신적 지주가 되는 것, 또 일정한 정치노선의 창도자라는 것이 강하게 요구된다. “제2세대”에 속하는 사사키도 에다도 전전에 이미 운동경력을 가지고 있던 점에서는 동등했다.


그러나, 이러한 ‘창시자 세대’(카와카미 타미오) 후의 위원장은 - 나리타, 아스카다, 이시바시, 토이 등 “전후세대” - 반드시 파벌의 리더는 아니었다. 그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만, 여기서 하나 지적해야 할 것이 있다. 즉, 사회당의 파벌의 리더가 당의 노조의존성에 비해 상당히 노조출신자가 적었다는 것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사회당 위원장도, 이시바시 마사시와 신 위원장 타나베 마코토를 제외하면, 노조출신자는 눈에 띄지 않는다.(1991년 7월 말 현재)


③ 파벌의 기능


파벌의 리더가 되면, 당내에서 자신의 영향력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 되고, 위원장 자리를 획득하기 위한 발판[스프링 보드]이 된다. 그렇지만, 자파의 세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지 아닌지가, 그 리더의 정치적 운명을 크게 좌우하게 된다. 한편, 파벌은 그에 참가하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파벌이 리더의 당내에 있어서 영향력의 원천이 된다면, 그것에 참가하는 멤버에게도 무언가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파벌이 그 멤버에 대하여,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면, 그 멤버는 그 파벌을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사회당의 경우, 첫 번째로 ‘공인[公認->공천]과 포스트’일 것이다. 사회당이 선거전술로서 조직과 지역할당을 채용하고 있는 이상, 당의 공인이 후보자(파벌의 구성원 - 부하)에게 있어 당선에 큰 통과점이 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인’은 후보자에게 있어서는, 정치가로서의 제1보로, 정치가로서의 인지도를 의미한다. 게다가, 공인이 자주 파벌간의 역학관계로 좌우되는 사례는 적지 않다.21) 또한 ‘포스트’배분은, 당대회의 선거 혹은 [사전]교섭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의원이 당선되어 당내와 국회에서 역직을 얻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파벌에 속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면서, 파벌의 응집력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22) 두 번째로, 파벌은 인간관계 =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동지적인 연대감을 가지게 한다. 그것에 이데올로기적인 충성 더해지는 경우, 그것은 개인에게 있어서는 ‘자기확인’의 의미도 가지게 된다. 자민당에서, 자신의 파벌을 ‘무라村’라고 칭하는 것과 비교해, 사회당내에서 그것이 ‘부락部落’혹은 ‘호적戶籍’으로 불린다는 것은, 그 의미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이 나니와부시浪花節[여기서는 부절符節을 뜻한다]적인 동료의식에의 결합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데올로기적인 충성심으로의 결합을 보여주게 되는 것으로, 어느쪽이든 정서적인 안정감을 가져다 주는 것은 확실하다. 이에 관련하여, 세 번째로 장기노선에 관하여 전망을 함께한다는 것등을 들 수 있다.


여기서, 파벌의 리더가 가지는 개성이 중요해진다. 거기서는, 정점에 있는 리더라는 개성이 중요한 요소로 된다면 역시, 그의 인격으로의 전면적인 경도가 필요로 하게 된다. 다만, 자민당이 ‘돈과 포스트’에 의해 파벌을 시스템화하여, 구속력을 강화했던 것에 비해, 이데올로기적·개인적 충성이 강조되는 경우, 그 구속력은 대체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약해지게 된다. 우선 사회당의원의 많은 수가, 자금면에서 리더보다도 노조에 의존해왔다는 것은, 리더로부터 상대적 독립성을 가지게 되고, 비교적 자유로이 파벌을 갈아탈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④ 파벌의 또 하나의 얼굴 - 중앙과 지방


사회당의 경우 자민당과 달리, 지방의 말단까지 파벌에 의한 계열화가 진행되었다는 것은 앞서 말했다. 사회당에게 있어서는, 당본부 서기국의 서기는 물론, 도도부현 본부의 조직까지 파벌색이 명확했다. 따라서 사회당의 파벌은 자민당과 달리 위에서부터 아래에 이르기까지 질서 정연하게 정비되어있었다. 이른바 의원파벌은, 당대회에서 나타나는 그 파벌세력들의 정점에 선다. 물론 자민당도 근년[책의 간행년은 1996년]지방의원 레벨에서의 파벌에 의한 계열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지만, 그 많은 수는, 개별 국회의원을 통한 느슨한 결합이다. 사회당의 경우, 당내의 의사결정 방식在り方으로 규정되어 있기에, 지방의원에게 부과된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지방의 말단에 이르는 ‘파벌화’의 경향이 현저하게 나타난 것은, 1960년대 에다·사사키 대립의 시대에, 당대회에서 다수파 공작이 활발화된 이후의 일이다. 그 이전은,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당내의 파벌의 어느쪽에도 속하지 않은 대회 대의원이 많았고, 그들은 위로부터의 규정력이 발휘되지 않는 ‘부동표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아사히 신문』 1968년, 12월 12일) 그런데 대회 대의원의 다수는, 지방의원과 지방활동가가 선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국회의원은 선거구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제약되어있고, 지역의 당 조직의 운영이 언제라도 지역에 있는 현의회와 시의회, 게다가 견실한 “풀뿌리”의 활동을 계속하는 평당원들에게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당 파벌의 실세는, 자민당처럼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보는 것은 어렵기에, 대회 대의원 수와 ‘의원파벌’의 실세와는 똑바로 비례하지는 않는다. 각파는 국회의원 레벨과 지방활동가 레벨의 성격을 겸비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것은 당내 의사결정의 방식에 영향을 끼쳐, 자주 ‘하극상’이라 불리는 풍조를 초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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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6-1 사회당 국회의원의 파벌분포(1958~79년)

(출처) 마스미 쥰노스케 『현대정치(下)』토오쿄오대학출판회, 1985년, 563쪽을 기반으로 작성, 1980년 이후는 『노동연감』에 따름



표6-1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960년대 중반이후, 사회당은 ‘의원파벌’레벨에서 보자면 ‘3파정립三派鼎立’(카와카미, 사사키, 와다 시대에서, 사사키, 에다, 카츠마다의 시대로)의 시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내 파벌역학상에서, 사사키파의 우월함이 가능했던 것은, 지방활동가 레벨의 영향력 때문이었다.(훗날 협회의 성장에 의해 사사키파가 자원을 침식당해 약체화 된 것은 그 힘의 원천이 무엇이었는가를 증명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에다파는 여러번 그것에 도전했지만, 그것을 뒤엎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것에 비해, 전형적인 ‘의원파벌’이었던 카츠마다파는, 활동가 레벨에서 거의 기반을 가지지 못했다. 이것이 카츠마다파를 당내파벌의 영향권磁場에서, 사사키파와의 제휴를 강화시킨 이유라 할 수 있다.


이를테면 국회의원의 비율이 1할이 조금 넘는 정도라 할 수 있는 1970년대의 당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상황이었다. ‘중의원에서 91명중 22명을 가진 당내 최대 파벌이라 할수 있는 카츠마다파는, 대의원 수에서는 385명중 20여명의 약소파벌이었다. 반대로 15명의 구카와카미파, 14명의 사사키파는, 각각 대의원 60여명에 달하는 ‘대파벌’ 중의원 12명의 에다파는 중간파등으로 섞여들어가 대의원 수는 얼마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회의 파벌”로 최대  조직은, 국회의원으로 만들어지는 파벌이 아닌 “협회파”라고 불리는 “사회주의협회” 그룹이다. 70명을 넘는 이 집단은 사사키파와는 당내 노선상의 의견에 미요한 차이를 보였지만, 대회에서는 사사키파와 거의 같은 행동을 취했다. 이 협회-사사키파의 연합노선이 이른바 “좌파”의 쪽수 상의 우위로 이어지는 것이다.’(『아사히신문』 1970년 1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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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6-2 대회대의원수 (주) 숫자는 모두 추산이다.

(출처) 『일본노동연감』제54집, 1984년판.



1983년 현재, 각파의 대의원 수는 표6-2에 보이는 것과 같다. 우파의 정권구상연구회와 최좌파의 협회가 국회의원 레벨에서는 압도적인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의원 수에서 맞서는 모양새가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에 대해 의원파벌로서, 당내 제2위의 카츠마다파는, 대의원 수에서는 하위에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각파의 지방에서 어느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있는가를 상세하게 보이는 자료는 지금 어디에도 없다. 다만, 『아사히신문』이 1977년과 1983년에 조사한 대의원 레벨에서의, 현별 색분류가 있기 때문에, 참고 정도로 여기에 개재해 둔다(표6-3). 덧붙여서, 1983년은 아스카다 위원장을 둘러싸고, 좌우가 대립했던 해다.


마지막으로, 서기국에 대해서 약간 다뤄야 할 것 같다. 사회당의 정책형성』결정은, 정책심의회에서 이루어지지만, 정책심의회에서는 기본정책위원회, 특별위원회 및 국회 상임위원회에 대응하는 각부회 등이 있고, 정책입안의 수속을 정한 ‘운영요강’에 기반하여 이루어진다. 중요정책에 대해선, 사실상의 최고의사결정기관인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일어나고, 당의 운동방침등과의 조정을 꾀하여, 당의 정책으로서 결정한다. 그런데, 사실당, 사회당에서는, 서기국이 정책의 추진역할로서와 동시에 각파의 ‘기동부대實動部隊’로서의 역할을 맡아왔다. 말하자면, 스즈키-사사키파는 서기국내에서 ‘주홍색 모임’으로 불리는 그룹을 와다파는 ‘정책그룹’을 가지고 있다.


더욱이, 나리타-이시바시체제의 발족과 함께, 그 ‘기관중심주의’에 기반하여, 서기국의 파벌색도 흐려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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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6-3 도도부현별 대회대의원수 

(주) 『아사히신문』1977년 9월 25일, 1983년 2월 3일, 1977년의 토오쿄오에 대해서는 조사시점 당시에는 불명확했지만, 반수이상을 협회·3월회가 점하고 있었던 것으로 예측을 되고 있다. 1983년의 카나가와는 대의원 전원이 아스카타 지지를 확인, 군마는 ‘중앙의 동정을 지켜본다’는 것으로 통일했지만, 지지관계가 불명확하여 표에서 제외했다.(역자주. 全鑛: 전일본금속광산노동조합연합회)

〔1977년 9월 25일 현재〕 〔1982년 2월 3일 현재〕


파벌의 행동


① 역직배분과 파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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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6-4 당대회에서 경쟁이 났던 당직의 수



파벌의 기능의 하나로, ‘포스트 배분’이 있다는 것은 이미 지적했다. 자민당이, 정권당으로서, 그 배분을 할 수 있는 역직 포스트에 관해, 관료, 국회상임위윈회의 공적 포스트 외에, 정무조사회, 부회등 정당으로서의 포스트등 다양한 역직을 가지는 것에 비해, 사회당의 경우, 위원장·서기장외에 당중집포스트를 둘러싼 싸움이 그에 비한다 할 수 있다. 3분의 1의 벽에 가로막힌 만년야당화가 되면서, 당내에서 역직을 취하는 것이 ‘출세’로 생각하는 풍조가 나오게 되었다.(『아사히신문』1968년 12월 30일) 그리고, 타협을 꾀하는 포스트의 적지 않은 수는, 당의 노선투쟁과도 연결되어 파벌간의 경쟁의 대상이 되고, 자주 치열한 투쟁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중집 포스트를 둘러싼 어떤 특색이 있던 것일까.


사회당의 중집은, 당규상[원문은 당칙]으로는 당대회에서 선거에 의해 뽑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수는 대회전의 각파의 “세설역”의 인사절충에 의해 할당되게 되었다. 그럼에도, 파벌같의 역관계에 크게 좌우되었다. 이 절충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경우에 선거가 실시되었다. 포스트가 선거에서 싸웠던 수는 표6-4에서 보이는 것과 같다. 구조개혁론을 계기로하여, 특히 사사키파·에다파가 위원장·서기장을 둘러싸고 싸웠던 시대에 많은 것이 밝혀져있다. 이 시기, 사사키파는 대회대의원수를 배경으로 중집 포스트의 다수를 점해왔다(포스트의 파벌배분에 대해서는, 표6-5를 참조). 1964년 제 24회 당대회와 1966년 제28회 당대회에서는, 사사키파는 투표가 행해셨던 모든 포스트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일찍이 ‘6개사단’을 구성했던 노미조 파벌은 1960년 전반에, 구 카와카미파, 평화동지회는 1970년대에 들어, 그 파벌의 쇠퇴와 함게, 중집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1968년 사사키파가 취임하고, 카츠마다체제가 출현했던 것에 따라, 당3역의 배분에 있어서 3파간의 균형이 통제불능 상태가 되거, ‘올’주류파=거당擧黨체제의 전과 같은 파벌균형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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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6-5 파벌별 당직 배분표

주: S-스즈키·사사키파, ◎-와다·카츠마다파, 新-신생연구회, 構-정권구상연구회, 創-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모임, 無-무파벌·중간파, 協-사회주의협회·3월회, 流-새로운 흐름의 모임, K-카와카미파, E-에다파, ○-주류파


그리고, 1977년의 제40회 당대회를 계기로, 파벌균형이 현저하게 눈에 띄는 것과 함께, ‘무파벌’의원과 젊은 의원이 중집에 진출해갔다. 그것은 고참의원의 은퇴와 함께, 구 파벌의 해체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파벌의 역직배분에 있어서 기능이 저하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국회의원이 중집 포스트를 택하는 이익이 엷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 크다. 정책이 복잡화·전문화함으로서, 의원의 겸임이 곤란하게 된 것이다. 또한 그것이 자민당에게 ‘족의원’을 만들어낸 것처럼, 사회당에게 있어서도 - 소수로는 있지만 - ‘족의원’을 만들어 내서, 파벌에 의존하지 않는 새로운 ‘이익’의 분야를 개발하고자 했다는 점이 크다.24)


이 점과 관련하여, 사회당 중집의 또 하나의 특징인 비의원 전종專從[오로지 그 일에만 종사함] 중집의 증가를 들 수 있다. 비의원 전종중집은, 1966년 제27회 대회에서 3명이 선출된 이래, 해마다 그 수가 늘어나, 나리타-이시바시 집행부의 ‘기관 중심주의’가 진행되어감에 따라 3분의 1을 점하기에 이르러, 아스카다 체제의 발족 방시에는 과반에 가까운 수를 점하고 있었다. 서기국이 정책형성에 차지하는 비율이 증대했다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것이 서기국의 고정솨, 고령화를 초래, 결국에는 ‘셀러리맨화’되었다는 비판을 받고, 사회당의 활력이 떨어지는 원인으로 지적되기도 했다.25)


다음으로, 각 포스트와 파벌과의 관계를 보자. 각파가 포스트를 중시해왔는가, 어떤 포스트를 점해왔는가는, 그 파벌의 특성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표6-6). 총무국장은 집행부를 보좌하는 후방역裏方役으로, 그 의미에서 카와카미 체제하에서는 카와카미파가 독점해왔지만, 사사키파가 집행부를 장악하게 되어, 동파가 점하게 되었다. 사사키파는 국회대책·노동국·농어민국 포스트를 오랫동안 독점해왔다. 특히 노동국장의 경우, 총평의 지지를 필요로해왔기에, 사사키파와 총평과의 밀월이 짐작된다. 게다가 기곽국장을 사사키 - 협회의 좌파계가 장악했다는 것은, 이론면의 지도에 있어서 좌파가 리드해온 사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국제국·정심[政務審査의 약어?]은 정책연구회(와다-카츠마다파)가 우위에 서있어, 정책형의 인사를 배출해온 것은 동파의 특색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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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6-6 각파 당직 현황

주: K-카와카미파, S-스즈키·사사키파, ◎-와다·카츠마다파, E-에다파, 構-정권구상연구회, 新-신생연구회, 創-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모임, 協-사회주의협회, 民-사회민주주의포럼, 無-무소속



그러나, 80년대에 들어 정권구상연구회가 중집포스트를 적극적으로 확보하기 시작하는 것이 두드러진다. 노동국장을 정권구상연구회가 독점했다는 것은, 노동전선의 재편과 관련하여 생각할 수 있다. 또한 국대[國會對策委員會]·교육선전국도 같은 식이었지만, 동시에 이 3대의 서기장(히라바야시 타케시, 타나베 마코토, 야마구치 츠루오)이 국대위원장출신들에 의해 점해져왔다는 것은 다당화 시대 속에서, 국회내의 타당과의 절충 그중에서도 공명·민사 양당과의 관계의 긴밀화, 혹은 소위 ‘국대정치’의 진정에 보조를 맞추는 것을 중시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② 파벌역학과 중간파의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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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6-7 사회당의 위원장·서기장 선거 기록



파벌은 당내 헤게모니(주류파)의 획득,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다. 그렇지만 이른바 대파벌이라고 할지라도 당내에서 과반수를 지배하는 것은 드물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당의 주도권을 노리고, 파벌간의 ‘합종연횡’이 생겨난다. 이런 의미로, 파벌은 ‘이치에 맞지 않은 부분을 현실로 해결해가는’(우에다 테츠) 역할을 맡고 있다.


사회당의 파벌의 ‘합종연횡’은, 당초에는 이데올로기적 뉘앙스의 근친성을 기초로했었다. 1940년대 후반의 좌우대립은, 이미 보았듯이, 전전의 계보를 계승한채로, ‘사회민주주의’와 ‘노농파 마르크스주의’의 두 개의 이데올로기간의 싸움이었지만 “우파·중간파” 연합과 “좌파”의 서기장인사를 둘러싼 싸움에 의해 나타났다. 원래 정치신조의 완전한 일치를 전제로 하지 않았기에, 당의 사상원리의 순수성을 재검토한다는 점에서 분열을 내포한 항쟁도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사회당의 파벌도 계속하여 인사에서 ‘타협’을 축으로, 인사항쟁의 색채가 강해져,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일어나는 것이 많게 되었다. 그 경우, 합종의 결과가 각각의 파벌, 또는 일부 파벌의 이데올로기적 방향에 영향을 주는 것은 충분히 생각 할 수 있다. 에다와 사사키파의 사이에서 격하게 헤게모니 쟁탈전이 전개되면서, 좌우는 뒤섞이고, 파벌연합에도 변화가 보이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서는 어떠한 특색이 보였는가. 그것을 위원장·서기장 포스트의 쟁탈오 살펴보자. 위원장·서기장을 둘러싼 싸움의 궤적은 표6-7에 보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당의 노선 및 헤게모니를 둘러싼 항쟁의 역사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앞에서 본 표6-1은 1958년 총선거 이후의 사회당의 파벌의 각각의 소속 의원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위원장은 결당에서 연해(1991년 7월 말)까지 10명을 해아리지만, 여기서는 1955년 이후를 보고자한다(1955년 이후 자민당은 12명, 사회당은 9명이다.). 스즈키 모사부로오, 사사키 코오조오를 제외하고는 꼭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스즈키의 경우, 좌파사회당 시대를 포함하여 9년 가까이 재임기간이 있지만, 사사키는 불과 2년정도로, 이상할 정도로 짧다. 이하, 카와카미는 취임시기 제3파에 속하고, 재임기간은 4년정도, 카츠마다는 제2파벌로, 재임기간은 1년정도다. 그 뒤 이시바시를 제외하고 나리타, 아스카다, 토이는 모두 무파벌이다.


그러면, 서기장은 어떨까. 서기장은 현재까지 15명이지만, 여기서는 1960년대 이후로 제한한다. 2개의 특징이 보인다. 하나는, 위원장과 서기장의 분리가 보인다는 것이다. 즉, 위원장이 우파라면, 서기장은 좌파, 역으로 위원장이 좌파라면, 서기장은 우파가 되는 식으로 되어왔다. 또 하나는, 위원장과 달리, 서기장은 당내 제1·제2파벌에서 선출되었던 것이 많다.  전자를 ‘외향’으로 하고, 후자는 당무를 맡는 ‘내향’의 얼굴이다. 파벌의 관심이 ‘안’으로 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벌은 ‘당무’의 요를 쥐는 것으로, 당내를 노리는 것을 잘 살리는 것이 가능했다. 왜 이런식의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하나는 당내 의사결정에 관한 위원장의 리더쉽의 문제다. 사회당에서는 전통적으로 기관결정중심이라는 사고방식이 강했다. 당으로서 중요한 정책결정과 문제제기는, 우선 각각의 관계하는 당내 합의기관에 자문하고, 거기서 토의되지 않는다면, 그 절차를 근거로 누구도 그 견해를 발표할 수 없다. 위원장도 예외는 아니다. 위원장이 반대로, 자신의 생각하는 방향에 끌어넣으려고 한다면, 우선 중집이나 각종 위원회들에 자문하여 승인을 얻어야만 한다. 그 결과 위원장은 스스로의 리더쉽을 펼치기 위해서는, 각기관에 대표를 보내어 각파의 논쟁과 타협하여 일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된다. 리더쉽을 발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각파의 대립에 휘말려들어, 그것을 격화시키는 결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26)


또 하나는, 오랜 당내최대파벌로서 군림해왔던, 스즈키-사사키파가 당내파벌역학의 자장에 있어서 점해왔던 지위로 맡아온 역할의 문제가 있다. 스즈키파는, 사사키로 대체되기에 이르기까지, ‘후계자’가 없어, 카와카미파에서 아사누마를 빼돌려 대용했다. 이와 같이 사사키파도 위원장을 추대한 것은 물론, 위원장 후보조차 양성하지 못해온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즈키-사사키파는, 대회 대의원수에 있어서 우위를 배경으로, ‘킹 메이커’로서 역할을 맡아왔다. 카츠마다·이시바시를 추대한 카츠마다파가, 지방에 기반을 가지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당수후보를 가지지 않은 사사키파의 지원을 받은 것이다.


여기서 사회당에 있어서 중간파의 위치와 역할이 문제가 된다. J.커티스J.カー千ス는, 사회당의 ‘편의주의적 중간파에 권력이 모이는 경향이 보여, 그 중간파는, 당대회에 있어서 좌파활동가의 우위와, 국정레벨의 전통적인 좌파적 자세 때문에, 좌파와 연휴를 맺는 경향이 강하다’고, 그 체질을 지적한다. 그것은 일본사회당의 독특한 패턴은 아니지만, 이것으로 규정되는 사회당은 ‘당대회에서는 왼쪽으로 가고, 선거에서는 오른쪽으로 가고’ 또 ‘중앙좌파, 지역우파’로도 불리는 행동패턴을 보인다. 일찍이 사사키파의 어느 간부는 당시의 나리타 위원장을 가리키며, ‘영문의 타이프라이터와 같이, 치라면 치는대로 왼쪽으로 간다’고 평했다. 그러나 사사키파도 앞에서 서술한 것처럼 압도적인 세력비에도 불구하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걸핏하면 평화동지회에 붙어, 좌경화되었던 것을 보면, 그것은 같은 패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체질과 같은 것이면서도, 당내파벌 사이의 역학의 자장에 보다 크게 관계되어있다고 생각된다.


다만, 두 개의 포스트를 둘러싼 싸움도 1970년대에 들어서, 표면적으로는 현저하게 감소했다. 그것은, 하나로 당세의 쇠퇴가 인사항쟁의 침체화를 가져왔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하나는 각파의 위원장에 어울릴만한 인물을 잃어버린 것(후계자難)이, 수면아래의 교섭을 더욱 진행시키게 된 것이다. 자연히, 인재는 파벌 밖에서 찾게 되었다.


제5절 파벌의 현황과 미래


파벌의 현황


1991년 6월 현재, 사회당의 파벌은 크게 보아, 우파의 ‘정권구상연구회’(약 90명), 중간파의 ‘사회민주주의 포럼’(약50명), 중도좌파의 ‘새로운 사회당을 만드는 모임’(약30명), 좌파의 사회주의협회, 당건설연구전국연락협의회등이 있다.27)


앞서 서술했듯이, 1980년대 이후, 사회당의 파벌의 유동화·파편화는 심해지고, 파벌은 그 응집력이 약해졌다. 거기서 사회당의 파벌도 많은 점에서 종래의 파벌과 달라졌다. 첫 번째로, 파벌이 기본적으로 “영수-부하”의 수직적관계에서 성립되어왔다면, 현재의 파벌은 리더를 가지지 않는다. 리더의 부재는 수평적인 결합만으로 파벌의 집단지도체제를 가져옴과 동시에, 그 응집력을 약화시켜, 파벌의 유동화를 촉진시켰다. 바꿔말하면, 파벌의 힘의 원천이었던 지도자공급기능·인재육성기능의 쇠퇴가 보인다. 그것은, 1당우위체제 속에서 자민당에게 있어서 총리총재선출이 사활의 문제였던 것에 비해, 만년야당화된 사회당의 활역이 쇠퇴로도 보인다. 두 번째로, 일찍이 사회당의 파벌을 특징지웠던 이데올로기적 분계선이 선명하지 않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적지 않게 ‘의원파벌’레벨에서, ‘신선언’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전무에 가까운 것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신선언’은 그 외곽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고, 각론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각파는 ‘신선언’에 대응하는 풍부하고 매력적인 제시하지 못했다. 세 번째로 ‘신선언’의 구체화를 둘러싸고, ‘의원파벌’과 ‘활동가’의 꼬임[네지레ねじれ] 현상이 생겨남과 함께, 파벌과 활동가 레벨과의 연결이 끊어져, 파벌은 분권화, 파편화되어갔다. 게다가, 자민당과는 다르게, 의원이 영수와 자금적 연결에서 희박해졌다는 것은, 파벌의 구속력을 약화시켰다. 역으로, 의원은 출신노조와 지방활동가의 밑에서부터의 압력에 자주 좌우되었다. 대회 대의원의 선출방법과 더불어 의사결성 레벨에서는, 지역의 말단에 이르는 파벌화와 함께, 당내민주주의의 차원에서 자주 ‘하극상’의 풍조를 초래했다. 여전히, 사회당의 장기저락, 자민당 장기정권화의 차원, 무파벌의원의 증가로 볼 수 있듯이, 사회당의 파벌그 자체의 명시도는 엷어져갔다. 그것은 오랜 기간 계속되어온 파벌항쟁의 폐해에서 얻은 교훈, 파벌의 기능면화에 기반하는 것이지만, 다른 면에서, 파벌과 정당의 규모의 문제도 무시 할 수 없다, 자민당의 파벌의 활성화는, 일당우위제 하의 정당간 경쟁의 결여 속에서, 우위정당내부의 유동성의 증대를 가져왔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파벌은 상호 경쟁속에서 일면, 당내에 경쟁원리를 낳고, 사회당을 활성화시켰다. 또한 파벌이 보이는 ‘다원성’은 일찍이 당외에 대해서는 소수의 당원임에도 불구하고 집표에 있어서 효과를 발군시켰다. 그러나, 사회당은 좌우대립을 에스컬레이트 시켜, 격변하는 국내외의 정세로의 대응을 신속히 하지 못함과 함께, 당외에서 이미지를 다운시켰다. 다른 한편, 파벌은 이데올로기·정책파벌로서 출발하면서도, 당의 주도권을 둘러싼 사움에 그쳐, 집단의 이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사회당의 파벌도 구조개혁론쟁수, 의원레벨에서는 “영수-부하”관계를 축으로하는 인적결합을 중심으로, 당의 공인[공천]과 포스트를 둘러싼 자민당과 다르지 않은, ‘인사파벌’화 되었다. 우선, 스즈키-사사키파가, 후계자를 기르지 못하고 지도자 창출기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내 최대파벌로서 ‘쪽수’ 상에서 우위를 지키고, 당내파벌역학의 자장에서 주역을 전해왔다는 것은,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초반의 파벌항쟁을 특징지웠다, 그것은 타나카파가 자민당의 파벌역학 상에서 점했전 지위와 비슷하다.


파벌의 장래


그러면, 왜 사회당에게 지금 아직도 파벌이 존재하는가. 그것은 사회주의의 조류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 차이는 별로 명확하지 않고, 반드시 충분하게 설명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혹은, 고정화되었던 정당분포의 테두리 안에서, 이익추구의 에네르기가, 권력의 배분을 놓고 싸우는 방향으로 나아간 결과라 할 수 있다. 게다가, 사회당의 역사가 보여주듯이, 그 조직의존체질에서도 찾을 수 있다. 사회당은 파벌항쟁의 과정에서부터, “당-노조”의 관계로 규정되어, 때때로 주류파·반주류파를 만들어냈다. 물론 노조의존은 다른 한편으로, 당내의 결성적인 대립을 막아오고, 당내 분열을 결과적으로는 저지해왔다. 이 의미에서, 1980년대말의 노동전선의 재편에 따른 ‘연합’의 탄생은, 사회당내의 파벌구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연합은, 구 동맹·총평의 이질적 결합이라는 성격이 더해져, 그 이름에서 보이듯이 ‘대연합체’로 결코 한덩어리는 아니다. 그런 한계로, 노조의 ‘특정이해’를 표현하는 당내의 집합체로서의 파벌은, 간판을 내려도 실질적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기존의 지반 속에서 나타났던 중앙과 지방의 꼬임[네지레]는, 사회당의 파벌의 분권화·파편화를 촉진하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근년의 사회당의 파벌에서 보이는 리더의 부재, 이데올로기의 불선명화 등의 특징은, 이 당의 탈 이데올로기화하는 과정에서, 환경의 변화와 그에 따른 대응을 꾀하는 당의 조직구조사이에서 생겨나는 모순을 보여주고 있다. 자민당의 파벌이 당내외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인사파벌의 측면과는 별도로, 후원회를 기반으로 이익파벌화 했던 것에 비해, 사회당은 환경에 대한 적응이 늦어짐에 따라, 노조와의 관계, 중앙과 지방과의 꼬임 속에서 혼미를 거듭한 것이다.


* 본장 탈고(1991년 7월 말) 후, 이 불과 3년 유여의 사이에, 사회당의 위원장은 타나베 마코토에서, 야마하나 사다오, 무라야마 도미이치로 정신없이 바뀌었다. 이 사이, 일어났던 정당의 유동화는 사회당도 예외 없이 휘말려들어 1993년 7월 중의원 총선거에서, 사회당은 ‘역사적 패배’를 겪었다. 그러나 안팍에서도, 사회당은 호소카와 내각의 여당으로서, 그리고 ‘자·사·사自民党·社会党·新党先駆け’연립에 의한 무라야마 내각의 탄생에 의해, 할 것 같으면서도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정권이라는 과실을 손에 넣었다. 한편, 중앙과 지방, 렌고와의 관계에 있어서, 사회당 내의 골은 깊어만가고, 해소되지 못했다. 이 사이의 사정을 상세하게 논하는 것은 지면상 곤란하지만, 여기서는 이 후의 당내 사정의 추이를 간단히 개관하여 첨부하고자 한다.


도대체 “타나베』야마하나”체제는, 주요3파(정권연, 사민포럼, 만드는 회)의 지지를 얻은 반석으로 보여졌다. 1992년 참의원 선거에 있어서도, 사회당은 선거구 10, 비례구 12의 합계 22의석을 획득하고, 1989년 선거는 예외로서, 1986선거와 비교한 경우 증감은 없이, 당초는 ‘선전’으로 보여졌다. 그러나 동경 사가와큐빈사건, PKO협력법안으로의 대응의 미숙함으로, 타나베 위원장은 지방조직으로부터의 압박에 직면, ‘당선2회, 역대최연소’의 아카마츠 히로타카가 취임했다. 1992년 말에는 사회당, 사민련, 연합 참의원의 유지의원에 의해 ‘시리우스’, 소장파의원에 의한 ‘리더쉽 21’등의 정치집단이 결성되었지만, “야마하나-아카마츠”집행부를 지원하는 그룹은 ‘사회당개혁의원연합’(1993년 4월, 중의원 76, 참의원 11)을 결성했다.


그러나, 1993년 7월에 열린 중의원 총선거는, 38년간에 이르는 자민당 1당지배에 종지부를 찍는 한편, 국민의 사회당에 대한 심판은 의외로 엄격했다. 사회당은 신당붐과 기성정당의 비판속에서 매몰되고, 의석을 136에서 70으로 거의 절반이 감소했다. 선거에 즈음하여, 우파의 현실노선을 지지하는 ‘연합’이, 좌파계의원을 배재하는 ‘선별추천’을 하게 된 것도 참패에 일조했다. 총선거 후, "야마하나 - 아카마츠" 집행부는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를 수용하여, ‘비자민’연립정권·호소카와내각에 참가했다. 그러나, 같은해 9월 야마하나위원장은 패배의 책임을 지고 사임하게 되거, 그 우 좌파·중간파에게 추천받은 무라야마 토미이치가 위원장에 취임했다.


정권을 사이에 끼어있었기에, 사회당은 크게 둘로 나뉘었다. ‘비자민 연립(호소카와)정권지지·정계재편’을 기치로, 수요회, 만드는 모임, 소장파 액션·뉴·데모크라시, 뉴웨이브의 모임등의 당내우파·중간파는 1993년 12월 ‘데모크라시’(아카마츠 히로타카 사무국장)를 발족시켰다. 다른 한편, 병립제에 반대하고, 호소카와내각에 거리를 두어 당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좌파·중간파는 ‘참된 정치개혁을 추진하는 모임真の政治改革を進める会’을 결성했다.(여전히, 일찍이 ‘새로운 흐름의 모임’에 속한 우파로 보였던, 덴 히데오들은 호헌을 기치로 ‘리버럴의 모임’을 결성했다.)


1994년 5월의 하타 내각 성립후의 이른바 ‘개신’문제를 시작으로, 사회당이 정권을 이탈했던 것은 주지와 같지만, 같은해 7월이ㅡ 무라야마 정권의 탄생은, 그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을 의미했다. 그것이 좌파·중간파 주도로 이루어졌던 것은, 우파가 호소카와 정권으로의 참여에 의해 루비콘강을 넘어선 것과 같이, 이제까지의 사회당을 규정해왔던 파벌의 이데올로기적 분수령을 같은 의미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의미로 ‘데모크라시’의 기본방침이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은 물론, ‘사회당’이라는 말조차도 포함하지 않았다는 것은 상징적이다. 그것은 당내의 노선논쟁을 넘어서, 사회당을 정당재편이라는 큰 소용돌이 속에 말려들어, 당의 존재의미 그 자체까지 예리한 비수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또한 사회당도 민사당이 여야당으로 나뉘어져 지리멸렬한 상태인 연합은, 그 내부에서도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연합은 무라야마 내각을 지지하는 자치노, 그에 반대하는 전체·전전통에 대항한 소용돌이 속에서, 후자가 지원하는 야마하나 전 위원장을 중심으로하는 ‘신민주연합’이 무라야마 정권의 기반을 흔들게 되었다. 어느쪽이라고 해도, 그것은 국민의 실망을 높이게 되는 것이었으며, 기대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쪼록, 본장이 사회당의 레퀴엠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주석


1) 사회당의 파벌 자체를 다루고 있는 것은 드물지만, 카와카미 타미오河上民雄 「파벌의 행동양식」(『현대 정치가의 조건』슌쥬우샤春秋社, 1983년), 아사히신문정치부 『정당과 파벌 - 권력의 자리를 둘러싼 인맥 - 』(아사히신문, 1968년), 요미우리신문정치부 『정당 - 그 조직과 파벌의 실태 - 』등이 있다. 본장에서는 그 외 『아사히 신문』, 오오하라사회문제연구소大原社会問題研究所편 『노동연감』각년도판을 참고했다.

2) 카와카미는 파벌의 형성요인으로, (1) 역사적배경, (2) 돈줄 (3) 선거제도, (4) 이데올로기, (5) 사회적 출신, (6) 정치적 세대, (7) 일본의 사회풍토를 들고 있다.(앞의 책, 101쪽)

3) 당선자중, 명확하게 구당파로 볼 수 있는 것은 1946년 총선거의 경우, 구 사민당계 21, 구 일노계 19, 구 일무계 11 당파불명이기는 하지만, 전전에 어떤 형태든 무산운동에 관여했던 자가 20명, 모두 71명으로, 약 70% 가량을 점하고 있다. 같은식으로 1947년의 경우는 구 사민계 20, 이하 18, 13, 18의 69명으로 50%가량이 된다. 이 비율은 해마다 저하의 경향을 띄고, 1955년에는 36%, 1960년에는 20%로 떨어졌다.

4) 도도부현 레벨의 선출방법에 대해서는, 1960년에는 이를테면 『아사히』는 ‘대부분의 곳에서 전부 또는, 일부를 “입후보-당원의 투표”로 선출한다’고 전하고 있지만, 선거세칙에 대해서 명확하게 일정의 내용을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완전연기를 채용하는 곳이 많고, 이것이 각 현본부에 있어서 다수파의 우위를 가져오게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속의 국회의원이 점하는 비율은, 1970년의 대회에서는, 대의원 380명중 불과 47명이었다고 한다.

5) 지지단체제도의 도입, 노동자동지회의 당원협의회로의 교체는, 당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조합의 지반화를 꾀하려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노조에 의한 당내부의 장악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6) 부언하자면, 현행의 중선거구제가 자민당의 파벌의 형성에 있어서 큰 요인을 만들어 낸다는 것은 누차 지적되어왔다. 사회당의 경우도 그와 같이, 파벌형성의 일단을 설명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주지와 같이, 1960년대 말 이후 사회당은 그 저락과 함게 복수당선가를 내는 선거구도, 복수의 후보자를 내는 선거구도, 그 수에 있어서 현저히 감소하게 되었다. 많은 의원은 최근, 선거구 유일의 후보자 - 당선자로서 중앙에 등장하고, 게다가 그 대부분이 파벌로의 귀속을 밝히게 된다. 그러나 사회당의 경우, 자민당과는 달리, 중선거구제가 파벌의 형성에 미치는 비중은 낮다고 할 수밖에 없다.

7) 사르토리는 파벌을 (1) 조직의 차원, (2) 동기의 차원, (3) 이데올로기의 차원 (4) 좌우의 차원으로 나누어 보지만, (4)의 척도에는 높은 신뢰성을 두지 않는다.

8) 코야마 히로타케小山弘健·시미즈 신조오 『일본사회당사』 芳賀書店, 1965년, 103-104쪽

9) 시미즈 신조오 『일본의 사회민주주의』 이와나미쇼텐, 1961년, 여기서 5월회를 자처하는 이제까지의 좌파세력, 청년부를 중심으로한 소장당원 그룹, 민동 좌파간부, 노농파 이론가 그룹의 ‘좌파블록’이 나오게 되었다.

10) 야나다 코오기梁田浩祺 『55년체제와 사회당』(아리에스쇼호오, 1981년, 118쪽)에 의하면, ‘니시오가, 해원조합과 총동맹을 중심으로하는 전노회의계의 노동조합과 맺어져있던 것에 비해, 일노계는 그런 특정의 대중단체를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좌파와 함께 움직이면서, 총평내부에 자신들의 발판을 만드는 것이 대책이라고 판단했다.’고 한다.

11) 이야스 타다시居安正 『정당파벌의 사회학』 世界思想社, 1983년, 177쪽.

12) 타카하시 마사오 <일본사회당의 혼미로 싹트는日本社会党の混迷と芽生え>(『월간 노동문제』1964년 8월호)에 따르면, 사사키파는 ‘차기 당대회에 대비하여 신좌파의 집결을 노린다’라는 슬로건 아래, 사사키, 야마모토 코오이치 등 간부 클래스를 시작으로, 지방의 오르그 활동을 전개했다.

13) 마스미 쥰노스케 『현대정치(下)』동경대학출판회, 1985년, 189-190쪽

14) 60년대의 노동전선통일의 움직임은, 전체[전국체신노조] 타카라키宝樹 위원장의 ‘노동전선통일과 사회당정권 수립을 위해’(『월간 노동문제』1967년 2월호)라고 제목붙인 논문으로 시작된다. 거기서 타카라키는 사회·민사의 통일에 의한 혁신정권의 전망과 공산당배제를 축으로, ‘반공통일전선’을 제창했다. 이 제창은, 노동전선에 의한 관공노의 정치주의를 비판하고, 훗날의 민간선행의 노동전선통일의 선구가 되었다.

15) 사회주의협회는, 1973년중집 포스트를 처음으로 획득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 때 대의원수는 80~90명 정도였지만, 이후 1974년 대회에서는, 130~140명, 같은해의 대회에서는, 180~200명에 가까운 위력을 보여주었다.

16) 협회는 이후, 1984년 후쿠다 유타카福田豊등 학자 그룹이 이탈하여, ‘현대사회연구회’를, 1987년에 야마모토 마사히로 그룹과 그에 따르는 협회부속본부 서기국원이 ‘신선언’을 지지하여 탈퇴하는 등, 그 세력이 약해졌다. (『일본노동연감』 제54집)

17) 이를테면, 훗날의 위원장 이시바시는, 와다파가 ‘파벌로서의 스즈키파’에 대항해온 공부 그룹으로 ‘파벌은 아니다’라는 것이 계속 남아왔다고 회상하고 있다. 같은 와다파에 속하고, 후에 이시바시와 결을 달리한 호리 마사오도 ‘공부하는 와다파에 들어가’서 일했다고 한다. (오오타케 케이스케大竹啓介『幻の花-和田博雄の生涯(下)』 楽遊書房, 1981)

18) 사회당 의원도 ‘정무형’과 ‘당무형’으로 나뉠 수 있지만, 우선 ‘당무형’의 “世說役”=실권자[番頭]는 중요하다. 예를 들면, 오오타케 케이스케大竹啓介는 와다가 결국 당수의 지위를 가지지 못한 이유로서 番頭의 부재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와다파는, 카츠마다와 사타 타다타카佐多忠隆등 ‘정무형’의 인재는 풍부하게 가지고 있었지만, ‘좋게 말하면 선의의, 악의 없는 정치적으로는 싱거운 집단’이었다고 한다. 겉에서도 와다파는 카츠마다에 걸맞는, 이시바시라는 ‘番頭’를 얻어, 카츠마다 위원장을 탄생시켰다. 이에 대해 스즈키파의 경우는, ‘스즈키파의 세날개 까마귀’라고 불린 사사키 모사부로오, 이네무라 준조오, 이토오 코오도오伊藤好道의 트리오가 있었다. 즉 사사키는 총괄참모로서 인사와 돈을 쥐고 정략, 파벌운영의 뒷면을 맡고 있던 것에 비해, 이네무라는 이론·이데올로기-면을, 이토오는 정책면을 담당했다. 이 점에서 좌우통일 후, 이네무라, 이토오가 잇달아 급사한 것이, 스즈키파의 ‘인사파벌’화를 촉진시켰다고 할 수 있다.

19) 사회당의 파벌의 리더와 ‘자금력’에 관한 문제를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다. 그러나 이를테면, 와다파와 니시오파가 재계와의 파이프라인을 가지고 있던 것, 카와카미파의 원로 미와 준죠오와 국책파이프의 미즈노 시게오水野成夫와의 연결등은 유명했다. 또한, 사사키파는 그 자금력의 고갈과 함께 쇠락해갔다고도 할 수 있다.

20) 오오타케, 앞의 책, 396쪽

21) 예를 들면, 1970년 제34회 대회에서 카츠마다파는, 중간파적 입장을 견지하고, 좌우에 걸쳐있었지만, 중집 포스트를 늘렸기 때문에, 거꾸로 ‘통일과 단결’로 나아가게 되었다(『아사히』1970년 12월 3일).

22) 예를 들면, 에다파는, 의원집단으로서 ‘사회주의정권획득위원회’와 활동가집단으로서 ‘사회주의운동연구회’를 가지고 있었다.

23) J.カーチス는, ‘사회당의원에게 있어, 회기변경 때마다 같은 국회 위원회[상임위] 위원으로 재임되기를 원한 것은, 일반적인 습관이 되었다.’ 거기서 관료로부터 지식의 흡수에 따른 전문지식으로의 접근, 스스로의 전문영역을 개척하고, 그것에 관한 다양한 인적 연결이 가능하여, ‘族’[여기서는 족의원의 족의 의미]으로 되는 것이 가능했다고 한다(『일본형 정치의 본질 –자민당 지배의 민주주의-』TBS브리테니커, 1987년, 141쪽)

24) 1980년 총선 후, 이시바시는 정년제의 도입, 배치전환 정례화[원문은 配転ルーティン化]를 포함한 개혁안을 제출했지만,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토이 체제의 발족과 함께, 고참 전종 서기의 쇄신과 소멸이 일어났다(『아사히』1983년 8월 18일, 1989년 9월 6일).

25) 위원장도 서기장도, 그리고 중집위원도, 대회에서는 ‘결정’의 권한은 주어지지 않았다. 또한, 중집에서도, 위원장은 단지 의장에 지나지 않았고, 그 권한은 이상하리만큼 작았다9『아사히』1970년 12월 2일). 따라서, 이시바시 위원장이 ‘신선언’등에서 보여준 리더쉽은 극히 예외적인 것이었다(타니 사토미谷聖美 편, 『일본형 정책결정의 변용』동양경제신문사, 수록)

26) 그 외, 신인 의원에 의해 만들어졌던 ‘뉴 웨이브 모임ニューウェーブの会’(약 30명)과 지방의원·노조출신자를 중심으로하는 ‘그룹·새로운 힘’(약 35명)의 정책집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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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보국회

1967년, 여야(자민당과 사회당) 지도부의 합의로 통과되기로 한 건강보험법 개정안이 사회당 중의원 모임에서 번복된 사건.



나가이 카츠지로오永井勝次郎 1901-1987

홋카이도 출신. 신문기자를 하다 29세 구의원町議員으로 당선되며 정치를 시작. 전후 사회당에 입당 홋카이도5선거구를 '사회당왕국'으로 불리게 했다. 아들은 중의원을 지낸 나가이 테츠오永井哲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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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2월 중의원 선거결과 134석에서 90석으로 참패한 순간. 나리타 위원장과 에다 서기장의 모습

나리타 토모미成田知巳 1912-1979

에다 사부로오의 구조개혁파에 함께했다. 1962년 에다가 에다비전의 비판으로 사임하자 에다를 대산하여 서기장이 되었다. 에다가 차츰 오른쪽으로 간 것에 비해 나리타는 차츰 왼쪽으로 갔다. 1967년 위원장에 취임하여 파벌 선배였던 에다를 서기장으로 지명하며 사카고 인사의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서기장 시절 '일상활동의 부족, 의원 중심주의, 노조의존'의 세가지를 사회당의 약점으로 지적한 나리타 3원칙이 유명하다. 정파적 합의에 의해 오랫동안 당의 지도자가 되었지만 역으로 그로인해 자신의 리더쉽을 발휘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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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농파労農派

전전 비 일본공산당계의 마르크스주의자 집단. 1927년 창간된 잡지 『노농』에 의해, 노농파로 불리게 되었다. 전전 일본공산당의 지식인집단 강좌파와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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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미조 마사루野溝勝 1898-1978

수의사 출신, 경찰에서 방역업무를 맡지만 좌익성향으로 상부와 충돌하여 파직당한다. 이후 농민조합운동을 이끌며 구사대와 일본도를 들고 싸우며 "싸움의 마사루勝"이라는 별명을 얻는다. 전후 일본사회당에 참가. 카타야마 내각에서 히라노 농림상이 파면되자 후임으로 하마평에 오르나 농촌내 지주기반을 가지고 있는 연립정당들의 반발로 무산된다. 사회당 분열기에는 좌파사회당의 서기장에 취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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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니시무라 신고오西村眞悟와 찍은 사진

니시무라 에이이치西村英一 1904-1971

우파사회당을 거쳐 사회당 재통일과 분열후에는 민사당 위원장을 역임. 우파 사회당 시절 중의원 예산위에서 니시무라 에이이치의 질의에 요시다 시게루 수상이 바카야로 라고 비웃는 사건이 커져 의회가 해산된 바카야로 해산 사건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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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 1891-1981

일본 사회주의운동의 우파 실력자였다. 선반공 출신으로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가 1919년 노동단체인 우애회를 시작으로 노동운동에 참가. 1926년 사회민중당 결성에 참가했다. 패전 후에는 빠른 정세판단과 행동력으로 일본사회당 결성을 이끌어냈다. 1947년초에는 가타야마 사회당 내각의 관방장관을 거쳐 이듬해 아시다 내각의 부총리가 되었으나 쇼와 전공사건에 연좌되어 실각했다. 그뒤 무죄판결을 받고 정계에 복귀하여 사회당 우파의 영수로서 활동하다가, 1960년 사회당을 떠나 민주사회당을 결성하여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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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 히데오田英夫1923-2009

언론인 출신 정치인. 전 참의원.


동맹 

전일본노동총동맹의 약칭. 1964년 결성. 총평과 달리 온건한 조합주의를 주창. 총평이 사회당과 조직적으로 연결되었듯이 동맹은 민사당과 긴밀한 조직적 연계를 가지고 있었다.




마스미 준노스케升味準之輔 1926-2010

‘55년 체제’라는 개념을 제창한 일본의 정치학자.


마츠모토 시치로오松本七郎 1911-1990 

후쿠오카 출신. 중의원 11선. 사회당 선전국장과 국제국장을 지냄. 1960년 안보국회에서 아스카다 이치오, 이시바시 마사시, 오카다 하루오岡田春夫등 과 함께 안보7인중의 한사람으로 정부 추궁의 선두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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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모토 지이치로오松本治一郎 1887-1966

부락해방동맹의 아버지로 불린다. 후쿠오카의 부락민출신으로 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 대련으로 건너가 거리의 점장이, 돌팔이 의사로 생계를 꾸리다 강제출국당한다. 그 뒤 큐슈의 건달들을 모아 토건업마츠모토구미라는 야쿠자 조직을 만든다. 그 뒤 수평사운동에 참가하여 전국 수평사 중앙위원회 의장에 오른다. 수평사운동으로 두번의 옥고를 치른다. 그 뒤 사회대중당 소속으로 중의원 의원이 된다. 전쟁에 찬성했지만, 사이토오 타카오가 반군연설로 제명되는 것에 반발하여 당에서 제명당한다. 전후 익찬의원이었기 때문에 공직추방을 당했지만, GHQ의 긴급권고로 추방에서 해재된다. 하지만 요시다 시게루의 방해로 중의원에는 입후보하지 못한다. 이후 초대 참의원 의원에 당선 초대 참의원 부의장을 지낸다. 이 때 참의원의 천황 알현을 거부하여 다시 공직추방을 당한다. 1966년 사망할 때까지 부락해방운동의 지도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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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대회 사진

모리토-이네무라 논쟁

1949년 5월 24일에 열린 일본사회당 4회 당대회에서 벌어진 모리토 타츠오와 이네무라 쥰조오 사이의 논쟁. 우파의 모리토는 사회당이 '국민정당'을 주장하고 좌파의 이네무라는 '계급정당'을주장한다. 결국 카츠마다 세이이치의 중재안으로 어물쩡하게 타협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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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대학 총장 은퇴식의 모습

모리토 타츠오森戸辰男 1888~1984

1920년 동경제대 경제학부 교수시절 <크로포토킨의 사상연구>라는 논문을 발표, 모리토 사건으로 불린 필화사건을 겪는다. 전후 헌법연구회를 주도. 일본국헌법 초안 작성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사회당 창당 참가. 카타야마 내각의 문부상 역임. "모리토-이네무라논쟁"을 주도, 사회당 우파의 이론적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1949년 교육에 전념하기 위해 정계은퇴, 히로시마대학 학장(총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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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야마 키이치村山喜一 1921-1996

가고시마현 출신. 현의회 의원을 거쳐 중의원을 역임(10선), 58대 중의원 부의장. 당내에서는 와다 히로오 – 카츠마다 세이이치 – 이시바시 마사시 파벌에 속했다. 아스카다 이치오 위원장 시절에 국대위원장, 바바 노보루 서기장을 따라 사회당 부위원장에 취임. 중의원 부의장 재임 중 의회 운영에 공정한 자세를 보여, 1992년 PKO국회에서는 제한 시간을 넘어 발언을 계속한 칸 나오토(당시 사회민주연합)에 대해 국회 경비 직원을 시켜 강제로 하단시키기도 했다.


무토오 산지武藤山治 1925-2001

당내 우파인 정권구상연구회 대표를 역임. 1991년 사회당의 새도우 캐비넷에서 통산상에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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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케 쇼이치三宅正一 1900-1982

농민운동출신 정치가, 중의원부의장.

와세대대 재학시절 학생무산운동단체‘건설자동맹’에 참가. 당시 동창이 히라노 리키조오. 1926년에 노동농민당 결성에 참가하고 중앙집행위원이 되나 좌우 분열로 당을 나와, 아소오 히사시麻生久, 미와 쥰조오三輪寿壮등과 일본노동당을 결성. 중앙집행위원 취임. 1932년 나카오카 시의회의원이 되고, 36년 사회대중당에서 중의원 의원으로 첫 당선. 이후 25선. 1942년 익찬선거에서 비추천 당선. 호국동지회에 참가하고. 전후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가하지만 공직추방 당한다. 해제후 1949년에 복귀, 우파사회당 간부로서 좌우 사회당통일에 노력했다. 1968년 당부위원장, 1976년부터1979년까지 중의원부의장. 니가타현 3구에서 타나카 가쿠에이의 호적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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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 쥰조오三輪寿壮 1894-1956

동대 법학부 재학시절 신인회 결성에 참가하는 것으로 좌익운동을 시작. 동대시절의 친구인 키시 노부스케와 평생의 친구로 지냈다. 대정익찬회에 참가했기 때문에 전후 공직 추방을 당하고 이때 동경재판에서 키시 노부스케의 변호사를 맡는다. 추방해제후 정계 복귀. 절친인 키시는 일본은 양당제로 가야한다고 생각했기에, 스스로는 보수합동에 진력하고, 미와에게는 혁신통일을 부탁한다. 사회당 통일 후 이듬해 사망. 장례식에 키시 노부스케가 참석하여 "정권을 내어줄 동지가 사라졌다"고 한탄했다.


미즈노 시게오水野成夫 1899-1972

기업가. 후지테레비젼(현 후지 미디어 홀딩스) 초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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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키와 탄광에서 현지시찰중인 마즈타니 상공상 

미즈타니 쵸오사부로오水谷長三郎 1897-1960

일본 사회당 우파. 카타야마 내각의 상공상. 


민동民同

민주화동맹의 약어, 1947년 2.1총파업후, 좌익계노조 내부에서 공산당의 조합지배를 비판하여 결성되었던 노동운동 내의 분파, 훗날 총평의 주류가 되었다.



바바 노보루馬場昇 1925年- 

중의원 7선. 전 사회당 서기장. 교사출신으로 교원조합 활동. 61년 쿠마모토현 총평부의장. 67년에 동 의장. 72년 쿠마모토에서 사회당으로 첫 중의원 당선. 80년, 3선 이하 의원들을 중심으로 53명의 중도좌파 당내파벌인 신생연구회를 결성하여 대표의원 취임. 82년 2월 처음 당원에 의한 위원장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재선된 아스카다 이치오가 바바를 당 서기장으로 추천하려 했으나, 이는 아스카다와 바바 둘 다 비슷한 당내 좌파기 때문에, 위원장과 서기장을 좌우 진영에서 나오는 기존 관례를 깨는 것이었다. 경선에서 아스카다를 추천했던 五派協議는 당내 융화를 이유로 난색을 표하나 인사를 승인하는 당대회 표결을 무기로 아스카다는 인사를 강행했다. 바바의 서기장 취임은 극히 불안정한 체제였다. 결국 반주류가 된 우파(정권구상연구회, 사회주의연구회)에 의해 바바는 동년 서기장을 사임. 카츠마다와 아스카다의 정치지도력도 이때부터 떨어졌다. 83년 7월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 참패로, 아스카다 위원장의 사임을 이어 받아 위원장에 선출된 이시바치 마사시 위원장 시기 중앙집행부위원장을 역임. 이시바시의 자위대의 자위대헌합론을 비판한다. 현역시절에는 공명당과의 연대에 회의적으로, 일본공산당과 함께하는 전야당공투를 주장하기도 했다. 자위대와 일미안보 용인의 사회당 우경화 노선을 비판. 현재도 호헌운동과 혁신통일운동 활동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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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키 코오조오佐々木更三 1900-1985

에다와 함께 스즈키 파에 속했지만 1960년 타 정파의 반발로 서기장직을 같은 파의 에다 사부로오에게 넘기게 된다. 이후 에다가 대중정치인으로 급부상하자 강하게 비판했다. 에다의 반정립으로 사회당을 이끌었다. 이 과정에서 오히려 크게 세력을 확대한 사회주의협회에 대항하기 위해 만년에는 에다와 다시 화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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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키사카 이츠로오向坂逸郎 1897~1985 

노농파와 사회주의 협회의 지도자이자 큐우슈우대학 경제학 교수, 이와나미판 자본론의 역자. 그는 죽을 때까지 일본의 최좌익 그 자체였다.


사타 타다타카佐多忠隆 1904-1980

기획원 조사관이 되었으나 기획원사건으로 투옥되었다. 전후에는 카타야마 내각의 경제안정본부재정금융국장등을 거쳐 참의원, 사회당 외교위원장, 국제국장등을 역임했다.


사회주의인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약칭. 1951년 코민테른에 대항하여 결성된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국제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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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모사부로오鈴木茂三郎 1893-1970

극심한 빈곤속에서 고학했다. 경제부기자로 재직도중 소련 특파원으로 활약했는데, 이 때 자신의 빈곤체험을 되세기며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노농』동인을 거쳐 무산대중당을 창당하여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시베리아 특파원 시절 군부의 시베리아출병 음모를 파악함으로서 스즈키는 평생 반전사상을 자기게 되었고, 일본의 전쟁에도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 때문에 사회대중당에서 제명당하고, 정치활동을 금지당한다. 전후 사회당이 창당되자 사회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 51년에 위원장에 취임했다. 취임연설에서 "청년이여 총을 들지마라"라는 연설을 하였고, 이는 곧 사회당과 전후 평화운동을 상징하는 말이 되었다. 사회당이 좌우로 분열되자 좌파사회당의 위원장이 되었으며 통일후에도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58년 중의원 선거 패배와 니시오파의 이탈(민사당 창당)의 책임을 지고 60년 위원장을 사임했다. 그 뒤에는 사회주의이론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하여 「일본 사회주의의 길」을 채택시켰다. 전후 좌파의 두가지 상징인 평화주의와 경직된 급진노선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여러모로 중요한 정치가였다.


시마사키 유즈루嶋崎譲 1925‐2011 

큐우슈우대학 교수로서 사키사카 이츠로오와 함께 사회주의협회를 이끌었다.중의원 8선


시모다이라 쇼오이치下平正一 1918-1995

국철노동조합 나가노현 지부 위원장을 거쳐 1955년 중의원 선거에 좌파 사회당으로 첫 당선. 이후 1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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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미즈 신조오清水慎三 1913-1996

전전부터 학생운동, 혁신 관료, 노동운동가를 거쳐 나중에는 대학 교수로 은퇴했다. 활동기간중 수집한 자료를 모아 정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선언: 일본사회당의 신선언

1986년 이시바시 마사시 위원장이 기존 강령적 문서로 여겨진 ‘일본 사회주의의 길’을 ‘역사적 문서’로 보류함으로써 사실상 폐기시키고 채택된 강령. 폭력혁명의 부정 사회민주주의로의 노선전환을 언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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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구네 노보루阿具根登 1912-2004

전 참의원 부의장. 미츠이미이케탄광 출신으로 미츠이미이케 쟁의가 일어날 때 사회당의 일원으로서 중재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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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누마 이네지로오浅沼稲次郎 1898-1960

토오쿄오도 출생. 와세다 대학 입학 후 사회주의운동 투신. 1925년 일본 최초의 단일 무산정당인 농민노동당 서기장에 취임했으나, 창당 3시간 만에 정부에 의해 해산당했다. 이후 일본 노농당을 거쳐 사회대중당에 참가. 전시에는 국가사회주의에 심취하여 군부를 지지하기도 했다. 다만 익찬선거에 출마하지 않음으로서 전후 공직추방을 면할 수 있었고, 이것이 이후 아사누마가 사회당 중간파의 중심인물이 되는 계기가 된다. 사회당이 분열되자 우파 사회당 서기장에 취임. 재통일 후에도 서기장에 취임한다. 1960년 스즈키 모사부로오의 사임으로 위원장에 취임. 1960년 10월 12일 도쿄 히비야공회당에서 열린 자민당, 민사당, 사회당 3당 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을 하던 중 우익 청년의 칼에 찔려 암살당했다. 거구에 큰 목소리로 '인간기관차' '연설백성'등의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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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박수치는 사람은 나리타 토모미

아스카다 이치오飛鳥田一雄 1915-1990

1963년 요코하마 시장에 당선되어 훗날 혁신지자체 돌풍을 불러 일으켰다. 사회당의 요청으로 77년 시장을 사임하고 사회당 위원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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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다 히토시芦田均 1887-1959

외교관 출신. 패전 직후 일본 정계 중심 인물 중 한 사람으로 하토야마 이치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자유당 결성에 참여했지만, 1948년 이누카이 다케루와 협력 민주당을 결성하여 총재 역임. 사회당과의 연정에서 카타야마의 뒤를 이어 총리 역임. 이후 쇼와 전공 사건에 연루되어 사임.


아카마츠 이사무赤松勇 1910-1982

아이치현 출신. 1926년 노동농민당 입당. 31년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 중앙위원. 37년 인민전선 사건으로 체포, 4년간 복역. 전후 일본사회당 결성에 참가. 46년 중의원 첫 당선. 장남이 하토야마내각 농림수산대신 아카마츠 히로타카赤松広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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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마츠 히로타카赤松広隆 1948-

현 민주당 소속 중의원. 일본사회당 서기장, 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당 부대표,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농림수산대신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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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노 준야矢野絢也 1932-

공명당 위원장 역임(1986-1989). 공명당 서기장으로서 사회당 서기장 에다 사부로오, 민사당 서기장 사사키 류우사쿠佐々木良作와 함께 야당연대인 새로운 일본을 생각하는 모임(사공민 연합정권구상)을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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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구치 츠루오山口鶴男 1925-

일명 야마츠루. 15대 총무청장관, 중의원 11선. 11대 사회당 서기장. 14대 사회당 국대위원장, 중의원 예산위원장등을 역임.


야마모토 마사히로山本政弘 1918-2005

남만주철도에서 일하다 전시에는 중위로 필리핀 전선에서 종군하다 포로가 됨. 스즈키 모사부로의 비서로 정치를 시작하여 좌파사회당의 중심멤버가 됨. 72년 사회당 기관지국장이 되어 사회당기관지를 일신, 사회신보社会新報를 대폭 발행하여 누적적자를 해소. 83년부터 91년까지 사회당 부위원장으로 재직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서 서구형 사민주의로의 현실노선 전환을 주장. 은퇴후에도 영향력을 유지하여 무라아먀 위원장 취임을 도왔다. 중의원 7선, 중의원 공로의원 표창.


야마모토 코오이치山本幸一 1910-1996

1959년 사회당 국대위원장으로 안보국회를 이끌었다. 77년 참의원 선거 패배 문제로 타카자와 토라오등 사회주의협회파 간부와 대립, 중집내 반협회활동의 선두에 선다. 결국 나리타 위원장이 사임하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지만 이후 당직을 맡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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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1880~1958

도시샤대학 중퇴 후 상경, 잡지 『청년의 복음』을 간행했으나 1900년 일본 최초의 불경죄로 투옥. 1908년 아카하타 사건赤旗事件으로 재투옥. 1919년 신사회사를 설립하여 『사회주의연구』 창간. 1922년 일본공산당 창당에 참가 「무산계급운동의 방향전환」을 발표,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27년 일본공산당 탈당 후 잡지 『노농』 간행, 노농파의 중심적 이론가로서 활약했으나 1937년 인민전선사건으로 검거. 전후에는 잡지 『전진』·『사회주의』 간행. 1951년에는 사회주의협회 결성. 오우치 효오에大內兵衛와 함께 동인 대표가 되는 등 사회당 좌파의 이론적 지도자로 활약.


야마하나 히데오山花秀雄 1904-1987

노동운동출신. 1926년 노동농민당입당하며 노농대중당, 사회대중당 등에 참여. 1936년 2·26사건 발생에 따른 계엄령이으로 금지된 노동절을 전평 간부 개인 명의로 실시하여 검거. 1937년 일본무산당 중앙집행위원이 되나 인민전선 사건으로 검거, 투옥. 1948년 총동맹 부회장, 전국화학산업노동조합연맹 회장 취임. 1951년 사회당 분열기에는 좌파사회당에 소속. 1966년 사사키 위원장 밑에서 당 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 1967년 카츠마타 위원장 밑에서 당중앙집행부 위원장에 취임. 1969년 12월 중의원 선거에 낙선, 당 부위원장을 퇴임. 정계 은퇴하고 지반을 아들 야마하나 사다오山花貞夫에게 물려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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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하나 사다오山花貞夫 1936-1999

변호사 출신으로 총평 변호인단을 이끌었다. 이후 중의원 8선. 사회당 위원장과 서기장을 역임했다. 호소카와 내각에서 국무대신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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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이 요시노리安井吉典 1915-2012

중의원 11선. 57대 중의원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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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다 사부로오江田三郎 1907-1977

사회당 좌파 출신. 사회당 통일후, 58년에 사회당 조직위원장이 되어 당 조직의 근대화와 젊은 당활동가 처우개선에 진력, 이후에도 젊은 활동가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게 된다. 1960년 사회당 서기장 취임. 아사누마 이네지로가 암살당하면서 사회당 위원장 대행으로 총선거를 지휘. 이때 3당 대표 테레비 토론회에서 온화하고 점잖은 어조로 국민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또한 당 개혁론으로 구조개혁론을 제출하여 사회주의협회등 당 좌파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회당 좌파 출신이던 에다 사부로가 사회민주주의로 경도되기 시작한 것이 이때 부터. 그 이후 계속 사회당 위원장에 도전했지만, 연거푸 고배를 마셨다. 이후 1962년 구조개혁론을 발전시킨 에다비전[미국의 생활수준, 소련의 사회보장,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일본의 평화헌법]을 발표, 이 역시 당내 좌파의 반발로 빛을 발하지 못한다. 1970년부터는 민사당, 공명당과 제휴하는 사공민 협조노선을 내걸었으나, 공산당과의 연대를 중요시하려는 나리타 위원장등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77년 당대회에서 사회주의협회계와 크게 충돌, 탈당계를 제출했지만, 당중앙에서 수리되지 않고, 오히려 제명처분을 받게 되었다. 이후 사공민노선에 동의했던 의원들과 함께 사회시민연합[이후 사회민주연합으로 개칭] 을 결성, 총선거 준비에 들어가나 급사. 에다 사부로오는 전후 일본의 고도성장에 맞춰 일본 사회주의 정치를 현대화 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한편으로 에다 사츠키, 칸 나오토 등으로 이어지는 현재 민주당의 정치 흐름에 큰 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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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노 아키라小野明 1920-1990

제19대 참의원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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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 카오루太田薫 1912-1998

전 총평 의장(1958年7月~1966年8月). 전 우베질소(현 우베흥산) 기획과장. 춘계 임금협상 투쟁 방식[춘투]을 정착시킨 인물. 


오오하라 토오루大原亨 1915-1990

주오대학 졸업후 요미우리 신문에서 근무. 전후 소학교 교원이 되어 히로시마현교직원위원장과 일교조 서기차장등 역임. 좌파사회당 출신. 사회당 통일후 중의원 당선. 중의원 11선.


오카타 토시하루岡田利春 1925-2014

홋카이도 탄노 위원장 출신. 중의원 9선. 토이 타카코 위원장 재임시기에 사회당 부위원장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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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다 히로오和田博雄 1903-1967

관료출신 정치인. 전전에 기획원 관료로 재직했는데, 기획원 관료들을 용공분자로 몰아세운 기획원 사건으로 해임되었다. 와다 본인은 좌익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이 때의 경력으로 인해 결국 좌익활동을 하게 된다. 전후 기획원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을 받고 요시다 내각이 들어서자 요시다의 요청으로 농림대신을 맡게된다. 이 때 일본의 농지개혁을 맡게된다. 요시다의 추천으로 카타야마내각에서 장관직을 수행한다. 그 뒤 정계에 입문 사회당 중의원이 된다. 사회당에서는 좌파에 속했지만, 스즈키나 에다와의 불화로 인해 정치적 성장은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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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나베 츠네오渡邉恒雄 1926-

신문기자, 기업가. 요미우리신문그룹본사대표이사회取締役회장, 주필, 주식회사 요미우리교진군 이사회 최고고문등을 역임. 사단법인 일본신문협회회장등을 역임했으며 ‘나베츠네’로 불려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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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에다 테츠上田哲 1928~2008

NHK 노조 출신, 60년대 일본방송노동조합중앙집행위장, 일본매스컴공투회의 초대의장등을 지냈다. 당시 별명은 "NHK의 밤의 쇼군" "우에다 천황". 68년 NHK 퇴사후 사회당 소속으로 정계에 진출. 70년대 참의원등을 지내고, 이후 중의원으로 진출했는데, 묘하게도 그때마다 이시하라 신타로와 선거경쟁을 벌여야 했다. 사회당에서는 중도우파인 ‘화요회’에 소속. 그러나 이후 타나베 마코토와의 당의장 경선 과정에서 호헌, 소선거구제 반대등을 주장하여 좌파의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후 호소카와 내각이 들어서자 탈당하여 ‘호헌신당 새벽護憲新党あかつき’을 결성. 위원장을 역임. 이후 1995년 동경도지사 선거에 출마 참의원 선거 때 만난 아오시마 유키오, 이시하라 신타로등과 또 다시 만났다. 그 직후 중의원 선거에선 안토니오 이오키가 이끄는 <스포츠 평화당>에 합류하여 출마했지만, 낙선. 이후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총선용 1인정당이었음]을 결성하지만 또 낙선. 2003년 가상정당인 <노인당>에 찬동하여 <노인당 토오쿄오>을 결성. 이후 <여론력 TV>의 운영이나, 잡지 <월간 매스컴 시민>의 편집등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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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무라 준조오의 당장黨葬 사진. 다른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이네무라 준조오稲村順三 1900-1955

본명은 稲村順蔵. 1926년 형 류이치의 영향을 받아 동경대학을 중퇴하고 농민운동을 시작으로 노동농민당에 입당, 이후 『노농』동인을 거쳐 전후에는 사회당 좌파의 지도자가 된다. 사회당 우파에 대항하여 모리토·이네무라 논쟁을 이끌었다. 사회당의 재통일을 앞두고 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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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바시 마사시石橋政嗣 1924-

전주노(전주류군노동조합全駐留軍労働組) 출신. 당내에선 정책통으로 통했다. 70년대 사회당의 비무장 노선을 상징하는 이시바시 구상으로 잘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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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 아라키岩井章 1922-1997 

오오타 카오루와 함께 총평의 주도권을 잡고 '오오타-이와이라인'을 구축했다. 


이토 코오도오伊藤好道 1901-1956

토오쿄오제국대학 재학시절 신인회에 참가. 졸업 후 중외상업신보사中外商業新報社에 취직하면서 토오쿄오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재입학. 중외상업신보에서 논설위원, 경제부차장등을 역임. 사회사상사의 편집동인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1937년에 인민전선사건으로 검거. 중외상업신보를 퇴사하고 만철에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전후 스즈키 모사부로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정치경제연구회를 만들어 이사에 취임하면서 사회당에 입당. 이후 사회주의협회에 참가. 사키사카 이츠로오, 이네무라 쥰조오와 함께 했다. 사회당 통일 이후 강령을 집필하나 협회의 격렬한 반대를 받았다. 당 통일후 당정책심의회장에 취임했지만 이듬해 12월에 급사. 중의원 3선


일본공산당 52년 테제

어떤 문건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1951년 5전협에서 채택된 51년 강령[무투를 결정한 강령]을 말하는 것 같지만 52년이라고 못박은 것으로 봐서는 아닌 것 같다.(아는 분 계시면 알려주세요.)


일본사회당의 지지단체

도시교都市交: 일본도시교통노동조합

동력차노조動力車労組,動労: 국철동력차노동조합

사철총련私鉄総連: 일본사철노동조합총연합회

비철금속非鉄金属, 非鉄金属働連: 일본비철금속노동조합연합회

전전통全電通: 전국전기통신종업원조합(현 NTT노동조합)

전체全逓: 전체신노동조합(현 일본우정그룹노동조합) 

탄노炭労: 일본탄광노동조합연합회

사청동社青同: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



전노全日本労働組合会議(全労会議, 全労)

1954년, 사회당 좌파 주도로 총평이 결성되자 이에 반발하여 이탈하여 조직된 노동운동 내셔널센터. 사회당우파를 지지, 민사당 분열 이후 민사당을 지지. 1964년, 전일본노동총동맹[약칭 동맹]을 결성. 총평에 비해 노사협조주의를 강조 반공적 성격으로 공산당계열의 산별회의[全日本産業別労働組合会議]와 대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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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반니 사르토리Giovanni Sartori 1924~

이탈리아의 정치학자. 민주주의 이론과 정당 체제, 헌법 공학 분야에 많은 공헌을 했다. 정당을 그 숫자에 의해서만 구분할 것이 아니라 ‘유효정당’의 개념을 도입해서 정당 체제의 작동 기제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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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코 미츠金子みつ 1914-2005

본명은 金子光. 대학졸업후 후생성 간호과장, 토오쿄오대학 교수등를 거쳐 1972년 중의원 당선. ‘9조 과학자의 모임’이라 불린 사람들을 이끌었다.


카와노 타다시河野正 1914-2007

큐우슈우대학 의대 해부학 조교수를 거쳐 의료법인제세회医療法人済世会를 설립. 현의회의원이 된 후 중의원 의원 당선. 이후 중의원 8선. 국정에서 자신의 의료지식을 살려 사회보장정책에 기여했다. 사회당을 넘어서 자민당의원들과 깊게 교류한 것으로도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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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경 스즈키 모사부로오와 함께

카와카미 죠오타로오河上丈太郎 1889- 1965

당분열시기에는 우파사회당 위원장, 이후 일본사회당위원장 역임. 카와카미 타미오河上民雄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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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카미 타미오河上民雄 1925-2012

역사학자, 중의원 7선, 일본사회당 국제국장・토오카이東海대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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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중의원부의장 취임인사

카츠마다 세이이치勝間田清一 1908~1989

전전부터 알게 된 와다 히로오에게 낚여(?) 사회당 와다파의 일원이 되었다. 이후 와다파를 물려받아 카츠마다파를 이끌었다. 1967년 당위원장 역임. 사회주의이론가로도 활약 <일본사회주의의 길>이 채택되는데 힘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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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야마 테츠片山哲 1887-1978

변호사출신. 초대 사회민중당 서기장, 중의원 12선, 사회대중당 집행위원, 초대 일본사회당서기장, 초대 일본사회당위원장, 아시다 히토시芦田均와의 연정으로 사회당 출신 최초의 총리 (제46대)를 역임했으나 사회당 내부의 분열로 안정적 집권에 실패함. 이후 민주사회당 상임고문등을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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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토오 칸쥬우加藤勘十 1892-1978

전전 노동운동 시절의 활약으로 불꽃 칸쥬우火の玉勘十라는 별명을 가진 투사형 활동가. 전후 일본사회당 중의원의원, 아시다 내각 노동대신, 입헌민정당、국민동맹의 중의원을 지낸 카토오 쵸오이치加藤鯛一의 친형, 여성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카토오 시지에加藤シヅエ와 잉꼬부부로 유명했다.


코야나기 이사무小柳勇 1912-2005

쿠마모토현 출신. 사회당 참의원을 지냄.


코야마 히로타케小山弘健 1912-1985

역사학자.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군사기술연구로 출발. 일본 근대경제사와 노동· 사회운동사 연구를 했다. 일본공산당의 당원이었으나 제명. 68년 혼슈대학本州大学(현 나가노대학長野大学)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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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왼쪽 두번째, 다소 뻘쭘하게 손을 든 양복아저씨. 1937년 중의원선거에서 37명의 의원을 배출하여 3당으로 도약한 사회대중당에서 주요 지도자들이 만세를 부르는 모습. (앞줄 가운데 아소오 히사시, 뒷줄 왼족에서 네번째가 아사누마 이네지로오)

코오노 미츠河野密 1897-1981

동경대 재학중 신인회에 참가하는 것으로 운동을 시작. 1936년 중의원 당선(이후 12선). 대정익찬회 참가로 인해 전후 공직추방을 당했다. 추방해재후 사회당 우파로 복귀. 사회당 통일후에는 국회대책위원장[한국으로치면 원내대표]을 맡았으나 58년 경직법 투쟁과 60년 안보투쟁의 국면에서 자민당과 사회당우파에 반발한 뒤 1960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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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다 히사오黒田寿男 1899~1986

전전 토오쿄오 대학시절 신인회 가입을 시작으로 운동권 생활을 시작한다. 1937년 농민조합의 지원으로 중의원에 당선. 사회당 결성에 참가하나 아시다 히토시 내각의 예산안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소노다 덴코코등과 함께 제명되었다. 제명된 의원들과 노동자농민당을 결성 초대 주석을 역임(그리고 사회당을 부르주아 정당이라고 맹공격했다.). 이후 1957년 사회당에 복당. 북한, 중국등과 교류활동을 활발히 한 것으로 유명하다. 


키타야마 아이로오北山愛郎 1905-2002

사회당 분열기에는 좌파사회당에 속했다. 인민복을 입고 국회에 등원하기도 하는등 독특한 행동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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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타로오엿金太郎飴 

어디를 자르든 단면이 킨타로오의 얼굴이 나오게 만든 가락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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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가야 신넨多賀谷真稔 1920-1995

히로시마현 쿠와市 출신. 후쿠오카2구 중의원 12선 1952년 좌파사회당으로 첫 중의원 당선.  1965年 사사키 코오조오 위원장 아래 정책심의회장에 취임하여 카츠마다 세이이치 위원장 때도 정심회장을 유임. 1970년 나리타 토모미 위원장이 되자 정심회장을 퇴임. 77년 아스카다 위원장이 취임하자 서기장에 취임(82년 사임) 1986년、중참합동 선거후의 특별국회에서 중원부의장에 취임한다. 1989년, 예산안강행채결을 둘러싼 혼란에 책임을 지고 부의장 사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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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마루 신, 김일성, 타나베 마코토의 조일3당 공동선언 당시의 모습

타나베 마코토田辺誠 1922~

일본 사회당 위원장(1991년 7월 31일 ~ 1993년 1월 19일). 사회당 부위원장 재직 당시 카네마루 신과 함께 조일3당(조선로동당, 자유민주당, 일본사회당) 공동선언을 이끌어 낸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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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북경에서 유소기 국가주석과의 회견

타나카 스미코田中寿美子 1909-1995

평론가겸 정치가, 아버지는 타나카 토시오田中稔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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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니 사토미谷聖美 

현 오카야마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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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노 미노루高野実 1901-1974

전 총평 사무국장(1951~1955) 미군정의 요구에 의해 반공노동운동의 내셔널센터로 시작한 총평을 좌경화 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타카라키 후미히코宝樹文彦 1920~ 

전후의 노동 운동가. 도쿄 아사쿠사 우체국에 근무, 1947년 전국체신노동조합 중앙위원, 1960년 전체 위원장. 총평 우파로, 일본식 노동조합주의를 주창해 노동전선의 통일을 주장했다. 1971년 퇴임한 뒤에는, 전국산별단일조합공제연합회 이사장, 공노위 위원등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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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카자와 토라오高沢寅男 1926-1999

일본공산당 국제파 출신. 사회당 최좌파 사회주의협회의 대간부로 불렸다. ‘사회당의 토라상’ 또는 ‘협회의 프린스’의 통칭으로 유명. 사회당내 노선 논쟁에서 강령적 문서"일본의 사회주의에의 길"을 옹호, 당의 사회민주주의 노선 전환을 거부. 소련 붕괴 전에는 소련 및 동구권 국가들을 ‘우호 방문’, ‘사회주의의 우위성’을 주장했다. 소련 붕괴후 그 과오를 인터뷰에서 밝혀 『주간문춘』은 "타카자와 토라오의 완전패배 선언"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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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 소식을 지지자들과 함께 시청하고 있는 모습

토이 타카코土井たか子 1928~2014

일본 최초의 여성당수, 사회당 위원장(1986년 9월 8일 ~ 1991년 7월 31일) 취임 후 "마돈나 붐" 이후 중의원 선거에서 "오타카상 붐"등을 일으켰다. 1996년 사회당이 명칭을 바꾼 사회민주당의 당대표 역임. 1999년 11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부의장 취임. 



평화동지회

마츠모토 지이치로오가 1947년에 결성한 사회당 좌파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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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리 마사오堀昌雄 1916-1997

80년대 후반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를 내걸은 사회당 우파인 호리 그룹을 이끌었다.


히노 요시오日野吉夫 1901-1978

농민운동가 출신 정치인. 사회대중당 전국 위원으로 1937년 사회대중당 센다이 시의의원으로 당선해 종전까지 지냈다. 전후 일본사회당과 일본농민조합(일농)결성에 참가. 1947년 중의원 선거되나 GHQ에 의해 공직추방. 추방해제 후1952년 중의원 선거 당선으로 복귀. 사회당에선 부위원장 등 역임. 이후 혁신지자체 운동에 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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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노 리키조오平野力三 1898~1981

농민운동가, 정치인, 카타야마 내각 초대 농림상. 그러나 사회당의 당내 갈등으로 인해 파면당하게 되는데, 이는 일본국헌법에 의해 대신이 파면당한 첫번째 사례가 되어 훗날 비슷한 일이 생길 때마다 두고두고 회자가 되었다. 


히라바야시 타케시平林剛 1921-1983

참의원 2선, 중의원 6선. 1936년 일본전매공사 입사후 노조 위원장을 거쳐 53년 좌파사회당 입당. 1975년 나리타 토모미 위원장 시기에 당국회대책위원장에 취임. 사회당내 최초 좌파인 사사키 코오조오파에 속했지만 온건한 인물로 알려졌다. 77년 나리타 위원장의 사임으로 국대위원장을 사임. 1982년 12월, 아스카다 이치오 위원장 아래 일본사회당 서기장에 취임하나 이듬해 심부전으로 급서. 미남으로 사회당의 그레고리 팩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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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를 성장해 2000년대를 살고 있다. 사회학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스스로를 역사학도라고 생각한다. 면식과 만화 수다와 어린이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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